〈 15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당연히 날 붙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레이시아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을 위한 기회일테니까.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고 그게 해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대체 어떤 변명을 해야 그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아주 잠깐 레이시아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봤지만 답이 보이기는 커녕 찐고구마를 물없이 백 개 정도 목구멍 안에 쑤셔넣은 것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니 아마 레이시아의 심경도 비슷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막막함과는 별개로 그녀는 날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기회라도 주어지는 건 말 그대로 천지차이니까. 그 사실을 레이시아라고 모르지 않을 터.
그래서 따라오는대로 붙잡혀주려고 일부러 느릿하게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데..
'안 오네?'
어째 시간이 지나도 영 소식이 없었다.
처음에야 다 벗고 있었던만큼 옷을 걸쳐입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쯤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시아가 날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마 당혹스러움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려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하긴..'
그럴만한 상황이긴 하지.
아마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 점을 고려하면 레이시아가 날 쫓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는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골치 아프게 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놈이 시간이 지나면 차마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 놈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 업보를 감당하는 것은 온전히 레이시아의 몫이 될 것이고.
벌써부터 레이시아가 날 보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꼭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으로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고민했다. 그녀가 정말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그녀를 대할지를 두고.
일단 당장 떠오르는 건 두 개였다.
하나는 레이시아가 내 눈치를 보다가 어렵사리 대화를 시도해오면 그걸 받아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면 피해다녀봐?'
바로 그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더 나아보였다. 더 끌리기도 했고.
지금이야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내게 손을 대지 않으려 하는 레이시아지만 오늘 이후로 내가 그녀를 계속 피해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그냥 피해다니는 게 아니라 그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아주 노골적으로 피해다닌다면?
아마 처음에는 그 사실을 두고 안도할 가능성이 컸다. 나보다 몇 배는 더 내 얼굴 보기가 난감한 것이 바로 레이시아일테니까. 이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과열될텐데 거기에 나와 얼굴을 맞대기까지 하면 그대로 패닉 속으로 퐁당 빠져버리겠지.
허나 그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사소한 사건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나와 그녀를 둘러싼 것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니까.
나와 영영 안 보고 살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봐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레이시아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테니 당황이 좀 수습되고 나면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시도해올 것이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접근해오든, 눈 딱 감고 얼굴에 철판을 깐채 강행돌파를 시도하든 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마저 내가 계속 그녀를 피해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아예 평생 안 보고 살 것처럼 기를 쓰고 그녀로부터 도망다닌다면?
처음에는 레이시아도 그런 날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태도가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초조함이라는 놈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치켜들 것이고, 그렇게 그녀의 안에 자리를 잡은 초조함은 내가 그녀를 피해다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될 터.
그렇게 불어난 것이 레이시아의 이성을 완전히 흐려놓기까지 과연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성이 흐릿해지고 나서도 레이시아가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도록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뭔지 모를 족쇄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쉬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해보지 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 날부터 레이시아를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늘 다같이 하던 식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방 안에서 해결했고, 어지간하면 레이시아가 있을만한 곳에는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내 행동이 눈치 좋은 이들의 눈에는 꽤나 노골적으로 보여졌던 모양이다.
"혹시 회장님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다른 이도 아니고 앨리스가 이런 질문을 던져오는 걸 보면 분명 그랬던 거겠지.
당사자도 아닌, 이 문제와 일절 상관없는 앨리스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정도라면?
당사자인 레이시아는 내가 자신을 피해다닌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잠잠하다는 건..
'일단은 안도하고 있는 단계인가?'
아무래도 그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까지는 의도한대로 풀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만족스러움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만끽하지 않고 그대로 떨쳐냈다. 진짜로 중요한 건 이 다음부터였으니까.
괜히 해이해졌다가 일을 그르치는 건 피해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살짝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얼굴 위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띄워올렸다. 비슷한 느낌을 간직한 목소리를 입밖으로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뇨? 딱히 별 일 없었는데.."
목소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누가봐도 별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판단한 건지 앨리스는 그에 관해서 깊게 파고든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흐음, 그래?"
얼굴 위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워올리며 그에 어울리는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말았을 뿐.
그또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딱히 놀랍거나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티를 팍팍 냈던 건 앨리스가 아니라 다른 이를 겨냥한 것이었으니까. 지금쯤 문 너머에서 이쪽의 대화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기사 말이다.
'이렇게 팍팍 티를 내줬으니..'
아마 그대로 레이시아한테 전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비슷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레이시아와 얼굴을 마주하기를 꺼린다는 티를 팍팍 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물론,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아무래도 레이시아는 자신을 향한 내 부정적인 반응이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라고 판단해서 그 순간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헌데 시간이 지나도 희석되기는 커녕 그럴 기미 조차 보이질 않으니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걸까.
평소와 같은 일정을 소화한 뒤 방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지더니 뒤이어 들려온 것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의 목소리였다.
"그.. 이안? 방에 있느냐..?"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던져진 그 질문을 들은 순간 잽싸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푸훗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방에 있다는 걸 알고서 찾아와 놓고서는 저런 말이라니.
솔직히 좀 웃겼다.
그렇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다시금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으며 침묵을 지켰다.
그런 내 침묵이 내가 방에 있는 건 물론, 깨어있다는 사실까지 전해듣고서 찾아온 레이시아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완곡한 거절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레이시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길 만나길 거부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 자는 가 보구나.."
깨어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텐데도 저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저 중얼거림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일까.
나?
아니면 자기 자신?
아무튼 날 향한 레이시아의 첫 번째 접선시도는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끝이 났다.
그렇게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걸 택한 그녀는 알지 못했으리라.
내 눈치같은 건 보지 말고 억지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지였다는 걸 말이다.
그 날부터 레이시아는 줄기차게 날 찾아왔다.
평소 그녀가 소화하는 업무량을 생각하면 그렇게 쓸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질텐데 나와의 일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걸까.
어떻게든 나와 대화를 나누고 말겠다는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녀를 나도 끈질기게 피해다녔다.
물론, 언제나 그녀가 먼저 선공을 하고 내가 거기에 대응하는 식이다보니 아슬아슬했던 순간도 몇 번은 있었다.
어찌어찌 그런 순간들마저도 모조리 극복해내며 도피를 이어나가다보니 나중에 가서는 레이시아가 대충 어느 타이밍에 날 찾아오는지 예상하고 먼저 자리를 피하는 일이 가능해질 정도였다.
요령을 터득했다고 해야할까.
그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레이시아가 약올라서 죽으려고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힐 듯 잡히질 않으니 미칠 것 같았던 걸까.
초조함과 원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분노로 얼룩져있는 레이시아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생각했다.
'조금만 더 도망다니면..'
머지 않아 그녀가 내 방으로 쳐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소식'이 학원을 강타한 것은 그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이어나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교류전.
내게는 여러모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를 중심으로 한 소식이 학원을 휩쓸었다.
그래서 잘 알만한 사람한테 물어봤다.
대체 그 놈의 교류전이 뭔지.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교류전이라는 게 대체 뭐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쉽게 말해 교류전은 왕국 각지에 퍼져있는 학원들끼리 서로가 더 잘났다며 경쟁하는 행사였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교류전에 참가자로 뽑힐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여성들에게 다른 학원에 소속된 남성들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식의 행사라고 해야할까.
거기까지만 보면 지역간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참가자들에게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기회를 주는 굉장히 바람직한 행사처럼 보이지만..
'그럴 리가 없지.'
이 세계에서 남자에 대한 인식이 어떤 지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온건한 행사일리 없었다.
여성들에게라면 모를까 남자한테는 필시 그럴테지.
아무튼 이미 몇 번 치뤄진 적 있기에 딱히 문제가 될만한 게 없는 그 교류전이라는 놈이 이번에 왜 문제가 되었는가 하면..
"제국이요?"
"응."
그걸 제안한 주체가 왕국 내에 자리한 다른 학원이 아닌 말 그대로 타국이기 때문이었다.
타국에서 교류전을 제안한 것은 말 그대로 이번이 처음인 상황.
심지어 그런 제안을 해온 곳이 왕국보다 몇 배는 크고, 사람도 몇 배는 더 많은 제국이라는 곳이니 왕국에 몸 담고 있는 이들로서는 당연히 흥분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비단 생도들 뿐만이 아니라 레이시아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들마저도 제국의 제안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기 바빴다.
당연히 받아야한다는 쪽과 받아봐야 우리 쪽이 이길 승산이 적으니 거절해야한다는 쪽으로 나뉜 채로 말이다.
물론, 후자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적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교류전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들은 하나같이 왕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물론 감히 그런 제안을 한 제국의 행태를 건방지다고 말하며 분노마저 내비치곤 했으니까.
뭐, 지금 디아나가 저렇게 씩씩대고 있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기사부 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디아나인만큼 그녀는 이번 건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다.
그리고 그런 증언에 따르면 교류전이라는 어그로 성 발언 뒤에 가려진 제국 측의 진짜 제안은..
'야, 너네 집에 맛있는 거 많다며? 우리 집에도 맛있는 거 많은데 한 번 바꿔서 먹어보지 않을래?'
이었다.
그랬다.
제국 측에서는 자신들이 보유한 뛰어난 남성들을 미끼로 내세우며 왕국에 소속된 재능있는 남성들의 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국 측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후보랍시고 보낸 목록에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정도?
그것이야말로 디아나가 저토록 거세게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 진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