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혹시 소리라도 날세랴 느릿하게 움직이던 레이시아의 손이 마침내 도달한 곳은 내 다리였다. 그게 제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답답해서 치우려는 걸까.
'아니면..'
계속되는 내 유혹에 마침내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던지..
지금까지 선보인 움직임만으로는 둘 중에 어느 쪽일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렇게 조심조심 움직이는 걸 보면 야한 짓을 할 생각인 것 같으면서도 단순히 혹시 내 숙면을 방해할까봐 우려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둘 중에 어느 쪽일지는 이어지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을테니까.
그러고 있자니 내 다리 쪽에 머물러있던 레이시아의 손이 한 차례 파르르 떨리며 묘한 떨림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역시..'
내가 잠든 틈을 타 저번처럼 야한 짓을 할 생각인 걸까. 내 손을 이용해 자위를 했었던 저번처럼 또 내 몸을 사용해 지금쯤 잔뜩 자극당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을 욕구를 달래보려고?
생각이 자꾸만 그런 쪽으로 흐르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 정도로 긴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번에는 손가락이었으니 이번에는 조금 더 과감해지지 않을까.
나름대로 기대감을 품은 채 이어질 레이시아의 행동만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제 손가락에 깃든 떨림 때문에 혹시 내가 잠에서 깨어날까봐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레이시아가 내 허벅지 중간 쯤 되는 부분을 꾸욱하고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그와 함께 귓가로 울려퍼진 건 '후우..'하고 짧게 내뱉어진 한숨소리였다.
막상 저지르려고 하니 또 양심이라는 놈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는 걸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살짝이지만 자괴감이 섞여있는 것 같은 그 소리에 티 나지 않게 입 안쪽의 살을 슬며시 짓씹은 순간, 떨어져나갔던 레이시아의 손이 다시금 몸에 와닿았다.
다만 이번에는 허벅지가 아니라 상체 쪽이었다.
거기서 뭘 하려고 그쪽에 손을 대는 걸까.
아무래도 아래쪽보다는 기대감이 덜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서 한창 기세좋게 부풀어오르던 기대감이라는 놈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기 충분한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톡-
그 뒤로 따라붙은 건 단추 풀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어찌보면 거품이 터질 때 나는 소리와도 살짝 닮아있는 것 같은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옷자락이 벌어지며 상대적으로 서늘한 공기가 얇은 런닝셔츠로 덮여있던 상체를 슥 훑으며 지나갔다. 그 묘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떠니 단추를 모두 풀어내고 나서도 내 몸 위에 머물러있던 레이시아의 손이 움찔거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혹시 내가 깨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더니 이내 깊게 잠든 사람의 그것마냥 가느다랗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딱 보니 내가 혹시라도 깨어났을 걸 대비해 잠든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심스레 실눈을 떠봤다. 그랬더니 눈으로 들어온 건 눈을 꼬옥하고 감은 채 잠든 척 연기를 펼치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연기실력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든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저 모습이 진짜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시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미모가 워낙 압도적인지라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쏠려서 어색한 부분을 파악할만한 겨를이 주어지질 않는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곤히 잠든 척 열심히 연기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장난기가 치밀어서 '으음..'하고 살짝 웅얼대는 듯한 음성을 입밖으로 내뱉으며 꼬물꼬물 레이시아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녀와 몸을 바짝 밀착한 채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까 전부터 귓가로 다이렉트로 내려꽂히며 묘하게 날 자극해대던 레이시아의 가느다란 숨소리에 균열이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농밀한 스킨십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흐읍..!'하고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며 규칙적으로 울려퍼지던 숨소리가 딱 멈추었다. 그렇게 아주 잠시동안 숨을 멈추고 있던 그녀가 다시 숨을 내쉬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오는 것의 형태는 전과는 살짝 달라져있었다. 아까 울려퍼진 것에 비하면 한결 거칠어졌다고 해야할까.
레이시아는 어떻게든 그걸 단속해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뚫고 흘러나오는 숨소리는 더 거칠어졌으면 거칠어졌지 결코 나아지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걸 진정시켜보려는 그녀의 노력 때문에 전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숨소리가 중간중간에 계속 끊어졌으니까.
'으이구..'
그럼에도 노력을 멈추지 않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살짝 안타까워서 이만 편하게 해주기로 했다.
"으응.."
잠꼬대를 하듯 웅얼대는 듯한 소리를 입밖으로 내보내면서 레이시아의 품 안으로 파고든 이래로 쭉 맞닿아있던 그녀의 가슴에 대고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가뜩이나 오늘 잔뜩 괴롭힘을 당한 탓에 평소보다 민감하게 변해있을 가슴에 새로운 자극이 주어지니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헛숨을 크게 들이키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짐과 동시에 레이시아의 몸 전체가 부들부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설마..'
방금 그걸로 살짝 가버리기라도 한 걸까.
피부를 타고 전해져오는 가느다란 떨림을 느끼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 지가 궁금해져서 슬쩍 실눈을 떠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나오려고 하는 뭔가를 있는 힘껏 참아내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었다.
"흐으.."
그녀가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나지막한 신음성이 입술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니,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단지 신음성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내가 열심히 얼굴을 부비적거린 덕분에 잔뜩 풀어헤쳐진 가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새하얀 언덕 끝에서부터 언덕만큼이나 새하얀 액체가 주륵하고 흘러내렸다. 욕실에서 전부 짜내서 더 나올만한 구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약효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 잠깐 사이에 리필되기라도 한 것일까.
새하얀 액체가 굴러떨어지는 눈물마냥 레이시아의 가슴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모습이 그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내 얼굴에 와서 닿은 순간.
"으으음.."
다시 한 번 잠꼬대를 빙자하여 그녀의 가슴에 대고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다만 아까하고는 느낌을 살짝 다르게 했다. 아까는 말 그대로 응석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방금은 그녀의 가슴을 자극하는데 초점을 뒀으니까.
효과는 확실했다.
맘같아서는 아까 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이나 입술을 이용해 레이시아의 가슴을 꽉 쥐어짜고 싶었지만 사정상 그건 힘들었기에 꿩대신 닭이라고 얼굴을 이용해 풍만하기 짝이 없는 가슴을 짓뭉개니 물풍선을 생각나게 하는 촉감을 선사해주던 그것이 이내 아까 실컷 맛보았던 뜨뜻 미지근한 액체를 세차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흐으으읏..!"
흡사 사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세차게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액체가 내 얼굴을 적시기 시작함과 동시에 팔과 맞닿아있던 레이시아의 등이 쫙 펴졌다가 이내 동그랗게 움츠러들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만채 레이시아가 격렬하게 몸을 떨어댔다.
그렇게 그녀의 몸에 깃들었던 떨림이 가신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일까.
맞닿아있던 살결을 통해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솔직히 좀 웃겼다.
잠들어있는 와중에 얼굴이 축축해질 정도로 액체를 뒤집어 썼음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날 보며 위화감을 느끼고 의심할 법도 한데 슬쩍 실눈을 떠서 확인해본 레이시아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막 가버린데다가 제가 엉겁결에 벌려놓은 광경이 너무 참담한 나머지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쓸만한 정신이 없었던 걸까.
그 뒤로 한참동안을 안절부절 못 하며 온몸으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라는 말을 표현하던 레이시아가 이내 걸치고 있던 가운 자락을 손으로 움켜쥐어 내 얼굴을 적시고 있는 것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레이시아는 간간히 '으..'하고 침음성 비슷한 걸 흘리며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자괴감의 정도를 성심성의껏 표현해냈다.
조심스레 내 얼굴에 쏟아낸 것을 닦아내던 레이시아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건 얼굴에서 느껴지던 축축함이 진정이 되고 난 후였다.
자괴감이 너무 극심해서 차마 내 얼굴을 마주보고 누워있을 수가 없었던 걸까.
내 목 밑에 깔려있던 팔도 빼내고, 허리를 휘감고 있던 내 팔과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가있던 내 다리도 걷어내길래 그런 건줄 알았는데 그 뒤에 이어진 레이시아의 행동은 날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스륵-
내가 자기가 흘린 것으로 젖어버린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게 신경쓰이기라도 했던 걸까.
조심스럽게 뻗어온 레이시아의 손이 살짝 흐트러진 채 내 몸 위에 걸쳐져있던 잠옷의 상의를 조심스레 벗겨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잠에서 깰세랴 조심조심하며 내게서 잠옷 상의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레이시아가 그것을 들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도록 그걸 어딘가에 숨겨놓고 새 걸 가져오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드레스룸 쪽으로 향하길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을 들어가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펑퍼짐한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니까.
어째 익숙하게 느껴지는 로브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온 순간 반사적으로 눈에 힘을 꽉 주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눈이 제멋대로 번쩍 뜨일 것만 같았으니까.
아까 들고 갔던 내 잠옷도 잊지 않고 챙겨든 것일까. 로브로 덮여있는 레이시아의 옆구리 쪽이 살짝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한채 레이시아가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녀가 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방을 빠져나간 이유가 뭔지를 말이다.
지금까지 가버렸던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일부러 저녁 약을 스킵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이시아를 흥분시켜서 선을 넘게 만들기 위함이었지 이런 걸 노렸던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좀 황당했다.
'아니..'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만찬이 떡하니 차려져있는데 그걸 외면하고 다른 식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하는 건 대체 무슨 심리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자꾸만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탈선을 시도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살짝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그것과는 별개로 일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처럼 로브까지 풀로 갖춰입고서 방을 빠져나간 걸 보면 아무래도 저번에 구관에서 했던 걸 또다시 시도하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신속하게 따라붙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만 잠옷 상의를 레이시아한테 강탈당한 탓에 그대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지금쯤 내 몸에서 페로몬이 풀풀 풍겨져나오고 있을텐데 거기에 위에 얇은 나시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바깥을 돌아다닌다?
'그건 좀..'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까닥 잘못하면 이상한 년한테 걸릴 가능성도 있으니까.
해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적당한 것을 걸치고 방을 빠져나가니 문 옆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로부터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회장님은.. 어디가셨나요?"
"잠이 안 오신다며 잠시 돌아보고 오시겠다면서 나가셨습니다만.."
"아.."
기사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레이시아 쪽으로 합류하려는 것처럼 사저의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기사는 딱히 날 제지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저를 빠져나온 순간, 시야 끝으로 로브를 뒤집어 쓴채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많이 급했던 걸까.
그 잠깐 사이에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있었다.
해서 최대한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도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좁히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