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맘 같아서는 더한 것도 해주고 싶었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허락된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앨리스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을테니까.
지금이야 살짝 삐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잠자코 내가 볼 일을 끝마치기만을 기다려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앨리스가 들이닥쳐서 나와 클레어가 서로 붙어있는 꼴을 보게 된다면?
'음..'
모르긴 몰라도 내 신상에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내게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아마 다른 식으로 혼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만 가보겠다는 뜻으로 내밀고 있던 발을 떼어냈더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클레어로부터 아쉬워 죽겠다는 눈빛이 날아와 꽂혔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다시 한 번 덧붙였다. 방금과 같은 감각을 더 맛보고 싶다면 잊지 말고 날 찾아오라고.
내 말을 듣고 대체 어떤 광경을 상상했길래 몸을 저렇게 묘하게 움찔거리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까. 그러면서 연신 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는 클레어를 향해 피식하고 웃은 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클레어를 뒤로한채 그녀와 내 모습을 가려주고 있던 나무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니 아까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클레어와 자리를 옮긴 것이 그리도 불만이었던 걸까. 팔짱을 낀채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앨리스의 얼굴을 평소보다 살짝 부풀어있었다. 그렇게 뾰로통한 심정을 온몸으로 피력하며 서 있던 것도 잠시, 내 기척을 감지한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팔짱을 풀고 황급히 내쪽으로 달려왔다.
혹시 내가 뭐 엄한 일이라도 당하진 않았는지 걱정이 됐던 걸까.
순식간에 내 앞에 도달한 앨리스가 내 어깨를 꽈악 부여잡은 채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다고 특별한 게 눈에 띌 리 없었다.
손에 묻어있던 크림은 클레어가 혀로 열심히 핥아서 깨끗하게 해줬고, 그녀의 음부를 애무하던 발은 다시 신발 속으로 숨어버렸으니까.
신발까지 벗겨서 살핀다면 발이 젖어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야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해서 피식하고 웃으며 언제 토라져 있었냐는 듯 온몸으로 나에 대한 걱정을 피력하는 앨리스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연히 안심하라는 의미였다.
"별 일 없었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 말하면서 내 어깨를 꽈악하고 틀어쥐고 있는 앨리스의 손을 슬며시 토닥이니 나지막한 한숨소리와 함께 앨리스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있던 걱정이라는 이름의 그늘이 살짝 걷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꽤나 짙은 색의 의문이었다. 클레어가 날 찾아온 이유가 그리도 궁금했던 걸까. 말해주기 전까지는 시선을 거두지 않을 기세라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잘지내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적당히 상대하다 돌려보냈다고 말하니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앨리스의 시선이 어느 순간 살짝 옆으로 비껴갔다. 그렇게 나와 클레어가 향했던 곳을 향해 잠시동안 시선을 던지던 그녀가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는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며 날 향해 손을 내미는 앨리스의 손을 마주잡고 그대로 숲을 떠났다.
숲을 빠져나와 사저로 돌아가는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딱 하나 뿐이었다.
'누구한테 쓰는 게 좋을까.'
지금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걸 누구한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결정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후보들이 다 각양각색의 매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랬다.
맘 같아서는 세 명 모두에게 써보고 싶었지만..
'힘들겠지.'
그도 그럴 것이 남은 게 한 사람이 딱 한 번 복용할 수 있는 양에 불과했으니까.
그걸 세 명한테 나눠서 먹이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섣불리 시도하기가 좀 그랬다. 1인분을 셋으로 나눠봐야 한 사람한테 권장복용량에 한창 못 미치는 양이 돌아가게 될텐데 그랬다가 효과가 안 나오기라도 하면 이 귀한 약만 날려먹는 꼴이 될테니까.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살짝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문제로 이토록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만큼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셋 중에 누가 좋을까.
눈 딱 감고 어느 한 명을 택해보려고 해도 다른 두 명에게 사용했을 때가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확정을 지을래야 지을 수가 없었다.
'하..'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면 참 행복했을텐데.
그러다보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람 심리상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오늘 오두막에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남은 게 좀 더 많았을까.
과거 사건까지 끄집어내서 후회를 곱씹던 것도 잠시, 이왕 이렇게 된 거 상상이나 해보기로 했다.
지금 주머니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 약을 각자에게 사용했을 때의 모습을 말이다.
일단 상상부터 해보고 제일 괜찮은 사람한테 쓰면..
그리 중얼거리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만약 디아나가 이걸 먹게 된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를.
'처음에는 당황할 것 같은데..'
그건 디아나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약의 정체를 알려주고 복용시켜도 원래는 나오지 않던 것이 나오는 셈이니까.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겠지.
아마 디아나라면 놀라서 굳어있다가 내 말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의 가슴을 내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엄청나게 부끄러워하겠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뻐하겠지.
내가 그토록 자신한테 절절하게 매달린다는 사실에 기뻐서 입꼬리를 움찔움찔대지 않을까.
분명 그럴테지.
그에 비해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앨리스는..
'오히려 이용할 것 같은데.'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앨리스라면 아마 가슴에서 갑자기 모유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날 유혹하지 않을까?
분명 줄듯 말듯 날 애태우려 들겠지.
스스로 보란듯이 제 가슴을 쥐어짜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레이시아는 어떨까.
잠깐 상상해봤다.
그리고 덕분에 결정할 수 있었다.
레이시아한테 이걸 쓰기로 말이다.
'아직 답례를 못 받았으니까..'
답례 대신이라고 치면 되지 않을까?
다만 대놓고 먹이기는 좀 그럴 것 같아서 그때부터 궁리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레이시아에게 이걸 먹일 수 있을까.
그걸 가운데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저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레이시아가 한창 업무를 볼 시간이라 묘하게 소란스러운 사저에 입성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궁리를 이어나갔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 뒤에 이어진 약먹는 시간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가다보니 결국 결정지을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 레이시아가 이걸 들이키게 만들지를 말이다.
결론이 난 이상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다른 이들은 슬슬 잠자리에 들 야심한 시각,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그대로 레이시아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그 앞에 도착하고 나니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굳게 닫힌 문 아래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밤을 샐 생각인 걸까.
그 옆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를 향해 시선을 던져 인사를 건넨 뒤 닫혀있는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최근들어 밤마다 자주 찾아갔더니 이제는 내가 이 시간대에 방문하는 것이 나름 익숙해진 걸까.
"음, 들어오도록."
그 말에 닫혀있던 문을 몸으로 떠밀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제 손에 거머쥔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 저거..'
연출인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확 왔지만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레이시아가 열심히 일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분명 처음봤을 때는 귀찮은 일을 피해 도망이나 다니는 말괄량이 왕녀님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본판이 워낙 뛰어나다보니 그런 모습도 안 어울리진 않을테지만 역시 이렇게 기품 넘치는 모습이 그녀한테는 더 잘 어울렸다.
그런 식으로 온몸으로 자연스럽게 기품을 발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내 시선이 제법 따끔했는지 레이시아가 서류 쪽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날 향해 물었다.
오늘도 차 한 잔 하러 온 거냐고.
옅은 미소와 함께 내뱉어진 그 말에 슬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고.. 드릴 게 있어서요."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아니면 깜빡한 건지 뭐가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모르는 척 넘어갔던 '답례'가 떠오르기라도 했던 걸까.
고운 선을 그리고 있던 레이시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린 그녀가 얼굴 위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꺼내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레이시아의 허락에 용기를 얻은 척 주머니 안으로 손을 밀어넣어 그 안에 넣어두었던 것을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물끄러미 내쪽을 바라보며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레이시아의 눈에 이채가 서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건.."
갑자기 이질적인 왠 약병같은 게 튀어나오니 의외였던 걸까.
살짝 말끝을 흐리며 의문을 표하는 레이시아를 향해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최근 들어서 밤 새는 일이 잦으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걱정이 된다고 말하니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연분홍빛 입술이 살짝 움찔대는 걸 볼 수 있었다. 미소를 짓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기쁘면 그냥 속시원히 웃으면 될텐데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걸려서 저렇게 기쁜 걸 참는 걸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만스럽게 느껴져서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하던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
최근 들어 실험을 이유로 자주 만나는 카트린느한테 체력회복에 도움이 될만한 약을 부탁해봤고, 그게 이거다.
그리 말하면서 주머니 안에서 꺼내든 약병을 선보이니 그걸 바라보는 레이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안 그래도 슬슬 체력이 달리던 참이었던 걸까.
표정을 보니 내 성의를 사양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 노력을 봐서라도 어지간하면 받아들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바로 마실테니 내어달라고 말하는 레이시아의 앞으로 나아가 그것을 내미니 자연스럽게 약병을 받아든 그녀가 곧바로 그것의 뚜껑을 땄다.
뽕-!
맑고 경쾌한 소리가 집무실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코밑을 맴돌기 시작한 건 굉장히 묘한 향기였다. 이 향기를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좋고 나쁘고를 따지면 분명 안 좋은 냄새는 아닌데 느낌이 워낙 묘하다보니 좋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꼭 마치 우유에 섞지 말아야할 걸 섞어놓은 것 같은 그런 냄새라고 해야할까.
코 밑을 맴도는 것으로부터 그런 감상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뚜껑을 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그지없었던 레이시아의 표정은 어느새 어색하게 변해있었다.
설마 냄새 때문에 나중에 마시겠다고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냄새가 워낙 미묘해서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다행히도 이 자리에서 바로 마실 생각인가 보다.
시녀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옆에 놓여져있던 찻잔을 집어들어 그 안에 든 것을 입 안으로 털어넣어 깔끔하게 비워낸 레이시아가 그 안에 약병에 든 것을 따라냈다.
레이시아의 도움을 받아 좁은 병 안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약이 아까보다 더욱 격렬하게 미묘하기 그지없는 냄새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에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푼 레이시아가 찻잔 안에 든 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내가 가져다 준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제 입 안으로 털어넣은 레이시아가 날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찻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
그 소리가 울려퍼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시아가 잠깐 머리를 식히길 원하는 것 같아서 그녀와 마주앉아 적당히 말동무를 해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해주던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하고 떨렸다. 뭔가 이변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