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43)화 (143/366)



〈 14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순간 내려앉은 침묵과 함께 긴장감이 미친듯이 몰려오며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눈치챘나?'

상대가 디아나라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눈치없는 그녀라도 과자 부스러기와 빵 부스러기 사이의 질감 차이는 구분할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나름 긴장하고 있었더니..


"..샌드위치만 먹으면 목이 메일테니까 우유도 같이 마시고."

언제 멈칫하고 있었냐는  디아나가 살포시 웃으며 내게서 손을 떨어뜨렸다.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봐버렸으니까. 디아나가 손가락 끝에 묻어나온 부스러기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하고 짓뭉개며 비비적대는 모습을 말이다. 꼭 그것의 질감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같은 모양새였다.


그냥 털어내면  것을 굳이 그렇게 확인까지 한다?

백퍼 눈치깐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를 한다는 건..

'진짜 뭔가 있긴 한가보네.'

그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대체 뭘까.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무슨 합의를 봤길래 명백히 새치기를 당했음에도 디아나가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저렇게 꾹 눌러 참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런 의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서 아까하고는 다르게 샌드위치에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분명 입으로 그걸 먹고 있는데 그게 코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뭐, 그래도 샌드위치는 확실히 맛있었다.

삶은 계란하고 감자를 뭉갠 것에 크리미한 소스를 섞어놓은 것이 부들부들한 빵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잘게 썰어놓은 소세지가 섞여있어서 식감도 나름 재밌었고.


가져다준 우유하고도 참 잘 어울려서 덕분에 샌드위치  개와 우유 한 잔이 들어가 언제 홀쭉했었냐는 듯 빵빵하게 변해버린 배를 문지르고 있으니 날 보며 피식하고 웃은 디아나가 비어버린 바구니를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운동도 다 했겠다 볼일도 끝났겠다 이제 들어가려는 것일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입가에 살짝이지만 부스러기가 남아있길래 잽싸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에 반응한 디아나가 다시 내쪽으로 돌아선 순간,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입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몸짓을 내 의도하고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일까. 자신을 향해 들이밀어지는 내 손가락을 확인하고는 순간 살짝 눈동자를 떨었던 디아나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뭐 답례의 키스라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은..


'여기서는 좀 그렇지.'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간 고스란히 레이시아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

저번에 그렇게 떡하니 밥상까지 차려줬음에도 꾹 눌러 참고 손가락만으로 만족했던 걸 떠올려보면 그런다고 당장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해서 피식하고 웃으면서 그녀의 윗입술 쪽에 남아있던 빵 부스러기들을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슥 훑어냈다.


제가 예상하고 있던 감촉하고는 많이 달랐던 걸까. 질끈 감겨져있던 디아나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리며 그 아래 숨겨져있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랗게, 아니 똥그랗게 변해있는 모습이 꼭 제 천적을 보고 크게 놀란 토끼같았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가 놀랐다는 걸 표현하고 있는 디아나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그녀의 윗입술을 훑었던 엄지손가락을 내 입쪽으로 가져와 혀로 살짝 핥았다.

"빵 가루가 묻어있더라구요."


  일은 끝났으니 이제 하던  마저 해도 된다는 의미로 그리 말하니 내 도발아닌 도발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던 디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칠칠맞게 입가에 빵가루를 묻히고 있는 꼴을 내게 보인  그리도 민망했던 걸까.


"으.."

디아나는 살짝 앓는 소리까지 내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로 날아와 꽂히기 시작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뭔가를 강렬하게 바라는 듯한 눈빛,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그것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 깨달았다. 방금 내 행동이 디아나의 욕망에 불을 질러버렸다는 것을.


타오르는 시선이 어찌나 강렬한지 여기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하다못해 어떤 식으로든 허락의 의미가 담겨있는 시그널을 보내기만 하면 남들이 보던 말던 그대로 내게 달려들기라도  기세였다.


그런 디아나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기는 하지만..

"슬슬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곧 있으면 아침구보 시간인데.."


슬슬 그래야할 시간이었다. 레이시아가 손을 써준 덕분에 훈련이나 강의같은 것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기사부 부장인 디아나기에 그녀에게는 아침구보를 하기 위해 집합한 이들을 인솔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걸 잠시 깜빡 잊은 것 같아서 손수 그 점을 일깨워주니 돌아온 건 허를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아주 입술까지  깨물어가면서 원통해하는데 맘같아서는 내가 대신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몸이 이렇다보니 아마 그건 불가능할테지만.

그렇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디아나가 포옥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렇지.."

그와 함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것은 살짝 체념한듯한 목소리였다.

허나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 낙담하고 체념했냐는 듯 순식간에 예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돌아온 디아나가 날 바라보며 선언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올게."

이건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침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인 걸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 오늘 아침구보에 참가하는 이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눈이 완전히 뒤집힌 걸 보면 오늘 아침구보가 대충 어떨지 안 봐도 예상이 갔으니까. 분명 저번에 날 힐끔대다가 디아나의 꼭지가 돌아버렸을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터.

그렇게 의욕에 가득 찬채 사저를 떠나 서관으로 향한 디아나한테는 참 미안한 이야기긴 하지만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같은 건 없었다. 내게도 일정이라는  있었으니까.

쳇바퀴마냥 반복되는 일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침 약을 챙겨먹고서 카트린느가 기다리고 있을 오두막으로 향하려하니 디아나가 출발할 때 용케도 같이 안 끌려간 앨리스가 스리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꿰찬 앨리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고양이가 떠올랐다. 살짝 시건방진 성격의 고양이 말이다. 찾을 때는 어디 숨어서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스리슬쩍 나타나서 몸을 비비적대는 꼴이 딱 그렇달까.


"아침구보  가셨어요?"


디아나는 갔는데 넌 여기서 뭐하는 거냐는 식으로 물으니 돌아온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매번 부지런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러니 이렇게 가끔씩은 빼먹기도 해줘야 인간미가 있어보이는 법이라며 뻔뻔스레 자기합리화를 시전해대는데 솔직히 조금 웃겼다. 그녀가 어제도 아침구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알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랬다.

"그 오두막 가는 거지? 자자, 그럼 출발할까?"

이 주제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봐야 제게 좋을 게 없을거라는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걸까.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과 동시에 스리슬쩍 등을 떠미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못 이기는  그것에 떠밀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앨리스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내옆으로 따라붙었다.

그와 함께 귓가로 날아든 건..

"어땠어? 디아나 선배가 직접 싸준 샌드위치 맛은?"


그런 질문이었다. 솔직히 앨리스가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그런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내가 무슨 답을 내놓든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놓고서는 눈빛으로는 은근히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었으니까. 조마조마함과 기대감이 반씩 섞여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옆얼굴로 날아와꽂히는 것이 얼른 자기가 준 게 더 맛있었다는 답을 하라고 채근이라도 하는 듯 했다.

나름 자신이 있다는 걸까.

'뭐, 확실히..'


그럴만 하긴 했다.


둘이 같은 메뉴가 아닌지라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살짝 애매한 건 사실이지만  떼놓고 둘 중에 어느 쪽이  내 취향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앨리스가 선물해준 막대과자 쪽을 고를테니까.


디아나가 만들어준 샌드위치가 맛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도 맛은 있었다. 앨리스가 만든 과자가 워낙 치트키라서 그렇지.


'단짠은 반칙이지.'


일단 내 본심자체는 그랬지만 왠지 그걸 그대로 말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내가 자기가 준 것을 선택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걸 보니 자꾸만 심술이라는 놈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든다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긴 좀 그런  같아서..


"맛있더라구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사실대로 말했다. '사실'대로.


아마 앨리스가 듣길 원했던 말은 저게 아니었을테지만.

아니나 다를까  말이 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순간 기대감어린 눈빛으로 내쪽을 힐끔거리던 앨리스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어? 이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그런 식으로 얼굴 위로 동요를 내비치던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잽싸게 그것을 주워담은 앨리스가 자연스럽게 내 말에 맞장구를 쳐왔다.


"하긴 디아나 선배가 그런 쪽이랑은 영.. 연이 없어보이긴 하지."

"그러니까요."

얼핏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가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아니라는 걸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전부터 앨리스의 입술이 묘한 경련을 선보이고 있었으니까.  마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께 더 맛있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데 내 눈치가 보여서  눌러 참고 있는 걸까.

그 경련은 카트린느가 머무는 오두막 앞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정도로 참았으면 답답해서라도 질문을 던져볼법도 한데 앨리스는 내 눈치를 본다고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선배."


날 오두막 앞까지 데려다주고 그대로 돌아가려는 앨리스를 불러서 멈춰세웠던 건 말이다.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는지 천천히 몸을 돌리던 그녀가 내 부름에 반응해 그대로 멈칫했다. 그 상태로 굳어있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붉은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앙증맞은 귀에 대고..


"과자.. 아껴먹을게요."

그리 속삭였다.


높이를 맞추기 위해 살짝 까치발을 들어야해서 솔직히 폼이  안 살았지만 상관없었다.


귀에 대고 그대로 내뱉어진  속삭임이 앨리스의 귓속으로 빨려들어간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귀가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그녀가 그대로 우뚝하고 정지해버렸으니까.

꼭 연료가  떨어진 로봇을 보는 것 같았다. 완전히 멈춰서버린 앨리스를 뒤로한채 도망치듯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런 날 반긴 것은..

"어, 와, 왔어?"

흡사 야한 거라도 보다가 걸린 것마냥 잔뜩 당황한 얼굴을 한채 뭔가를 허둥지둥 숨기는 카트린느의 모습이었다. 뭔가를 들여다보듯 살짝 몸을 굽히고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반응해 내쪽으로 황급히 돌아선 그녀가 등뒤로 돌린 손을 나름 다급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난리도 아니었다.


제 주인의 심경만큼이나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한 손에 채인 것들이 엎어지고 쏟아지며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오두막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요란한지 바깥에  있던 앨리스가 당황의 주박에서 깨어나 오두막 안으로 뛰쳐들어왔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고, 괜찮은 거냐고 묻는 외침은 덤이었다.


물론, 그대로 내보냈다. 다행히 내가 멀쩡하다는  확인하고는 순순히 물러나더라.

그렇게 앨리스를 내보내고 나서 다시 카트린느 쪽을 돌아보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제가 쳐놓은 난리를 수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꽤 중요한 거라도 엎어진 걸까.

요염해보이는 인상에 맞지 않게 울상을 한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나름 귀여웠다.

'그나저나..'


얘는 또  준비했길래 이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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