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느긋한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진 찰나 깨달았다.
'노렸네. 노렸어.'
앨리스가 지금 이 타이밍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걸.
그러니까 디아나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을 말이다.
어찌보면 새치기나 다름없는 짓이건만 고양이마냥 사뿐사뿐 날 향해 다가오는 앨리스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미약하게나마 희열이 맴돌고 있었다. 디아나를 따돌린 게 그리도 기분 좋은 걸까.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내 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타고 흐르던 땀을 닦아주었다.
"선배도 참.. 쉬엄쉬엄하시지. 너무 엄하시다니까."
그런 식으로 날 걱정하는 척 디아나를 한 번 깎아내린 앨리스가 이내 내 땀으로 젖은 손수건을 곱게 개서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더니 대신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내가 저번에 그녀의 팔에 몰래 채워주었던 꽃 팔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비록 시간이 지나 꽃잎이 다 져버린 상태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날의 풋풋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꽃망울이 주머니 겉면에 매달려있었으니까.
"배고프지?"
분명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달달하기 그지없는 향기가 코로 훅 끼쳐왔다. 이런 걸 몸은 솔직하다고 하는 것일까. 코밑을 맴돌기 시작한 그 냄새를 맡은 순간 배가 제멋대로 우렁찬 소리를 내뱉었다.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앨리스가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꺼내든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자."
그렇게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것은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막대 형태의 과자였다. 모양이 살짝 어설픈 걸 보면 직접 만든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오늘은 그런 날이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즉시 입을 벌려 내밀어진 것의 끄트머리를 베어물었다.
어쩌면 냄새만 그럴 듯하고 맛은 또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과자를 베어문 순간 혀끝으로 퍼져나간 건 레이시아의 사저에 머무르는 동안 얻어먹었던 것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맛이었다.
달달하면서도 마냥 달지만은 않고 살짝 짭쪼름함이 맴도는 맛이라고 해야할까.
단짠의 밸런스가 완벽한 것이 하루종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린 것일까. 나름 긴장어린 시선으로 내 얼굴을 예의주시하던 앨리스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어때? 맛있지?"
표정을 보니 나름대로 필살기같은 거라도 됐던 걸까. 일단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아직도 한참 남은 과자를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그런 내 대답을 확인한 앨리스가 순간 답지 않게 '흐흫..'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것도 잠시 스스로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게 민망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가 잽싸게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맛이 어떤데?"
내 감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 질문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니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잘 나온 건 그게 전부라서 제대로 맛볼 기회가 없었거든."
아, 그래서였구나.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즉시 입술 끝에 머금고 있던 것을 잠시 떼어내고는 그녀를 향해 아까 느꼈던 감상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하루종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말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던 걸까. 다시 한 번 예의 그 얼빠진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윤기가 살짝 흐르는 붉은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그림같은 미소를 그녀의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몸둘 바를 몰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과자를 갉아먹었다. 빈속에 한창 뛰어다닌 탓에 배고프기도 했을 뿐더러 답례로 받은 것을 남겨선 안 된다고 들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갉아먹고 있었던 것인데 잘 먹는 내 모습을 보니 자기도 살짝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나도 한 번 먹어봐도 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뜸 그리 물어오길래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편으로는 내게 그런 걸 묻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굳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먹고 싶으면 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 안에서 하나 꺼내서 먹어보면 될텐데 굳이 나한테 그리 물은 건 자기가 내게 선물한 것이니만큼 이제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오늘따라 자꾸 귀여운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럼.."
나지막하게 울려퍼진 목소리와 함께 앨리스의 얼굴이 천천히 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옆머리가 방해가 될 것 같았던 걸까.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걷어올리며 내가 베어물고 있던 쪽의 반대편에 도착한 그녀가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던 입술을 슬며시 벌렸다.
혀가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와삭-하고 바삭한 무언가가 부숴지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끊어진 부분에서 과자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어문 것을 그대로 입 안으로 쏘옥하고 집어삼킨 앨리스가 와삭와삭 소리를 내가며 그것을 맛보더니..
"음, 확실히 잘 나왔네."
이내 붉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씩하고 웃었다.
나름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보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뺨에 서린 홍조가 그런 그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니 많이 쪽팔렸던 모양이다.
볼쪽에만 어려있던 홍조가 순식간에 얼굴 전체로 번져나가더니 '으..'하고 살짝 앓는 소리를 낸 앨리스가 제 손안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내게 넘겨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돼?"
혹시 몰라 던져놓고간 당부가 귓가를 맴도는 걸 느끼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앨리스는 대체 뭐가 하고 싶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치명적인 척을 하려면 철판을 깔고 끝까지 치명적인 척을 하던가.
날이 날이다보니 자꾸만 풋풋한 뭔가가 가슴 속에서 끓어올라서 뻔뻔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녀가 넘겨주고 간 것은 그대로 주머니에 챙겼다. 맛도 맛이지만 그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으니까. 아까 얼핏봤을 때 눈밑이 살짝 퀭했던 걸 보면 그럴 듯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재시도를 하면서 밤을 지새웠던 거겠지.
그렇게 앨리스에게 절반 정도를 빼앗기고 남은 부분을 오물오물거리면서 그녀가 건네준 것을 주머니 안에 챙긴 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음료를 조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디아나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어쩜 이리 타이밍이 딱딱 맞는지 살짝이지만 가슴이 서늘할 정도였다. 조금만 어긋났다면 앨리스가 내게 그런 짓을 하고 있을 때 디아나가 들이닥쳤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걸 자제하는 그녀들이지만 과연 그런 상황에서까지 참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디아나라도 내게 과자를 먹이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새치기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테니까.
그런 식으로 살짝 안도하고 있는 사이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디아나가 주방에서 챙겨온 것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마침 어느 정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기에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어 굳게 밀봉되어있는 뚜껑을 따보니 안에 든 것은 살짝 따끈하게 데워져있는 우유였다.
왜 그리 오래걸렸나 했더니만 날 위해 우유를 데운답시고 그랬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슬슬 식어가던 찰나였기에 그런 그녀의 배려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건네받은 병을 꼬옥하고 움켜쥐니 병과 맞닿은 손가락끝으로 마음을 놓이게 하는 온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나저나 우유라..'
많고 많은 음료 중에 하필 우유를 골랐다는 건 준비해온 메뉴가 우유와 잘 어울리는 메뉴라는 뜻일까.
우유하고 잘 어울리는 메뉴라.
당장 떠오르는 건 역시 빵이었다. 거기에 준비를 하다가 손을 베였다는 걸 고려하면..
'샌드위치?'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왠지 그것일 것 같다는 예감이 확 왔다.
일단 우리 둘다 샌드위치라는 음식에 나름의 추억이 있을 뿐더러 샌드위치라면 요리 초보자인 디아나의 눈에도 도전해볼만하다고 보여졌을테니까.
단촐한 메뉴였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샌드위치라면 아무리 제 마음대로 이것저것 추가하는 걸 좋아하는 요리 초심자라 할지라도 실패할 가능성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크니까.
그렇게 샌드위치라고 속으로 확정을 지은 순간, 제 몫의 음료가 담긴 병을 입가에 가져다댄채 연신 내쪽을 힐끔힐끔 거리던 디아나가 꼴깍하고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그.. 혹시 배고프지 않아?"
안 그래도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기에 즉시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좀 허기지긴 하네요."
그리 말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말랑말랑하게 변해버린 배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으니 다시 한 번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이미 서로 볼장 다 본 사이임에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걸까.
그것을 털어내보려는 듯 주먹을 꼬옥하고 움켜쥔 디아나가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준비해온 게 있는데.."
"네?"
귓가로 울려퍼진 디아나의 말을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그에 안 그래도 내 눈치를 보기 바쁘던 디아나가 조금 더 움츠러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날 상대로 오늘이 성 니나브 데이 때 선물받은 것에 대한 답례를 하는 날이라고 밝히기는 부끄럽고, 그렇다고 다른 핑계를 대자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난감했던 걸까. 디아나의 눈썹이 축 늘어지더니 그녀가 자신감없는 목소리로 뭔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핑계를 댄다고 대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알아듣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디아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혹시.. 직접 만드신 거에요?"
이제서야 뭔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간 순간, 뭐라고 열심히 웅얼거리던 디아나의 몸이 흠칫하고 떨리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찌나 빨간지 손대면 펑하고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으, 응.."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하면서도 디아나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예전같았다면 여기서 어버버거리느라 기껏 내밀어준 것을 잡지 못했을텐데 말이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고, 그래서 나름 흡족하게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내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던 그녀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빨갛게 변했다.
그럼에도 디아나는 몰래 숨겨놓은 걸 꺼내들기 위한 손놀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어디다가 숨겨놨나 했더니만 설마 풀숲 사이에 감춰두었을 줄이야.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만..'
무슨 무라도 뽑아내는 것처럼 풀숲 안에서 피크닉용 바구니를 쑤욱하고 뽑아드는데 솔직히 좀 귀여웠다.
그것을 양손으로 꼬옥하고 움켜쥔채 날 향해 주춤주춤 다가오는 모습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숨겨두었던 것을 들고 돌아온 디아나와 바구니를 사이에 둔채 나란히 앉았다.
"열어봐도 돼요?"
"그, 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바구니 쪽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자니 어디선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흘깃하고 맞은 편에 있는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조마조마한 표정을 한채 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 떼놓고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만 보면 내가 지금 손대려 하는 게 폭탄상자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내가 안에 들어있는 걸 보고 실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걸까.
그런 거라면 안심해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럴 일은 없을테니까.
허나 그리 말한다고 디아나가 안심할 가능성은 적었기에 서둘러 그것을 열어젖혔다.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바구니 안의 모습은..
"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했다.
흰색의 종이로 깔끔하게 포장된 샌드위치들이 서가 안에 꽂힌 책들마냥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채 바구니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일단 겉모습은 완벽한데..'
중요한 건 역시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겠지.
그걸 확인하는 것만큼은 나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어서 침을 꼴깍하고 삼키면서 바구니 안을 채우고 있던 것중에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까보았다.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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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디아나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는 상당히 괜찮았다.
내용물을 보니 앨리스를 포함해 세 명이서 스터디를 할 때 내가 종종 싸주었던 것을 참고한 것같았고.
아, 나 혼자서 바구니 안에 든 것을 다 해치우기에는 여러모로 무리라서 디아나도 자연스럽게 샌드위치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렇게 디아나와 나란히 앉아서 그녀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에 그녀가 가져다 준 우유를 곁들어 먹고 있으니..
"참.."
제 몫의 샌드위치를 오물대면서도 연신 내 반응을 살피던 디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으며 내쪽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뭐, 입가에 소스라도 묻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흘리지 말고 먹어야지."
살짝 나무라듯 말한 그녀가 내 옷 위로 떨어져있던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깜빡하고 숨기지 못했던 것을.
'눈치 못채겠지..?'
딱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 옷 위로 떨어진 것을 툭툭 털어내던 디아나의 손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