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 뒤로도 한참동안을 내 손을 이용한 성욕해소에 몰두하던 레이시아는 내 손이 축축하게 변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이제 더는 움직일 힘이 남질 않은 걸까.
침대 위로 풀썩 엎어진 레이시아의 몸이 가쁘게 들썩였다. 그렇게 잠시동안 엎어져서 숨을 고르던 그녀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설마 또..?'
아니면 드디어 본방인가?
그런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레이시아의 표정은 굉장히 위험해보였다. 눈 속에서 뭔가가 일렁거리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눈빛을 한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레이시아가 날 향해 몸을 기울인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날 향해 다가왔다. 그 뒤에 울려퍼진 건..
쪽-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볼쪽에서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붙었다가 떨어져나가는 감촉이 아주 또렷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이걸로 참겠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 볼에 입을 맞춘 레이시아가 이내 그것을 그녀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버린 내 손가락 쪽으로 옮겼다.
아까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가 내 손가락을 감싸안았다. 동시에 살짝 물기를 머금고 있는 부드러운 살덩이가 내 손가락 사이를 노닐기 시작했다.
"후움.."
그렇게 자기가 해놓은 것을 직접 처리한 레이시아가 다시금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내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고 있었다.
어쩌면 그대로 침대를 벗어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자리를 뜨기에는 살짝 아쉬웠던 걸까.
아니면 여러모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여댄 탓에 그녀도 피곤했던 걸까.
슬쩍 실눈을 떠보니 레이시아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속살이 살짝 비춰보이는 새하얀 슬립 하나만을 몸에 걸친 채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진탕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어쩜 저렇게 내리쬐는 조명마저도 완벽할까.
그녀의 뒷편에 자리한 커다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이 그녀의 살결에 윤기를 더해주었다. 새파란 달빛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청초해보였다.
그래서 꼭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딘가 비현실적이라고 해야할까.
"으음.."
그래서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척을 하며 레이시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그녀가 그대로 허공으로 스르륵 녹아들어 사라질 것만 같았으니까.
헌데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나 보다.
추워서 그러는 척 온기를 찾아 레이시아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으니 꽤나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움찔하고 떨리며 동요를 있는 힘껏 드러내는 그녀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하아..'하고 나지막한 한숨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더듬더듬 손을 움직인 레이시아가 저 멀리까지 밀려나있던 이불을 끌어와 몸 위에 덮어주었다.
이불 특유의 안락함과 맞닿은 살결을 통해 전해져오는 포근함은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나중에 할까..'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노곤함에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그렇게 레이시아의 품 안에 안긴 채 그대로 다시 골아떨어졌다.
.
.
.
.
.
.
.
.
.
.
.
.
.
.
.
.
.
.
.
.
.
.
.
.
.
발렌타인 데이에게 화이트 데이라는 짝궁이 존재하듯 이 세계판 유사 화이트데이라 할 수 있는 성 나니브 기념일에도 짝궁은 존재했다.
다만 성 니나브 데이처럼 거창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냥 '답례의 날'이라고 불릴 뿐이니까.
아무튼 뭐하는 날인가 하면 말 그대로 성 니나브 데이 때 선물받은 것에 대한 답례를 하는 날이다. 그 날 선물받았던 꽃 장신구를 다시 남자에게 돌려주며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꽃 장신구가 많이 해진 상태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장신구가 많이 해져있을수록 그만큼 그걸 선물해주었던 이를 많이 생각했던 것으로 친다나?
뭐,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평범한 꽃 장신구라면 몇 달은 커녕 며칠도 못 버티고 진작에 끊어지고도 남았겠지만 성 니나브 데이때 팔던 것들은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상당히 질겼으니까.
그게 해졌다는 건?
그만큼 그걸 자주 차고다니거나 자주 만지작댔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그 부분은 이해가 갔지만..
'왜 하필 직접 만든 음식이어야 되는 걸까.'
그 부분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혹시 따로 뭐 유래같은 게 있나 싶어 나름대로 알아봤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았고 말이다.
다만 직접 만든 음식을 선물하는 이유만큼은 알아낼 수 있었다.
직접 만든 음식을 선물하는 게 앞으로 내가 널 책임지고 먹여살리겠다라는 의미라나?
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근들어 학원이 굉장히 시끌시끌했다. 생도들이 생도용 식당을 기웃거리는 빈도 수또한 부쩍 늘어났고 말이다.
원칙대로라면 남자한테 꽃 장신구를 선물받은 이들만의 이벤트인지라 이 정도까지 소란스러워질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손가락만 쪽쪽 빨면서 커플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만 보느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일말의 가능성에 도전하려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고역을 치루고 있는 건 학원의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평민 생도들만 그러는 거라면 모를까 나름 한가닥하시는 이들마저도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 섣불리 거절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학원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무슨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마냥 레이시아의 사저에서 생활하는 세 명에게도 고스란히 전염되었다.
가장 먼저 그 분위기에 감염된 것은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아무래도 다른 생도들과 부대끼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은 그녀다보니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가봐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티가 팍팍나는 그녀를 기점으로 앨리스가, 그리고 레이시아가 그 분위기에 감염되어버렸다.
덕분에 디데이를 삼일 정도 남겨둔 지금은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셋 다 긴장하면서도 살짝 들떠있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아니 단순히 셋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외로 오두막 밖하고는 담 쌓고 살 것 같은 카트린느도 최근에는 최면의 힘을 빌어서 내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묻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보니 디데이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조금 더 컸지만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네 명 모두 요리하고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보이는 타입이었으니까. 특히나 디아나나 레이시아는 먹을 걸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행위를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확률이 높은만큼 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요리라니 대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야 한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역시 지금이라도 카트린느한테 효과 좋은 소화제라도 하나 받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먹는 순간 안에 뭐가 들어있든 속을 뻥 뚫리게 해주는 놈으로다가 말이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제발 레시피대로만 해주면 좋을텐데.'
허나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요리 초보일수록 제가 요리를 잘 하는 줄 알고 멀쩡한 레시피에 자기멋대로 어레인지를 가하곤 하니까.
그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앨리스나 카트린느 쪽은 상대적으로 걱정을 덜 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둘은 뭔가를 직접 만들어먹은 경험 정도는 있을테니까.
'의외로 잘할 지도..'
특히나 기대가 되는 쪽은 카트린느였다. 해놓고 사는 걸 보면 가사일하고는 거리가 백만광년쯤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지만, 레시피에 따라서 뭔가를 만든다는 행위에 가장 익숙하면서도 철저한 것이 바로 그녀니까. 요리할 때도 비슷하게만 한다면 먹을만한게 나오지 않을까. 이것도 그녀가 참고한 레시피가 멀쩡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디아나가 디아나답게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요 며칠 관찰한 결과 짬이 날 때마다 사저의 주방에 들려서 거기 상주하는 이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배우는 것 같았으니까.
기대감과 불안감이 서로 교차하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마침내 디데이가 도래했다.
과연 누가 포문을 열 것인가.
그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셋을 자극해 셋이서 작당한 것을 캐낸다는 계획을 잠시만 멈추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같은 날까지 그런 짓을 하긴 좀 그랬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던지고 준비되어 있던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있으니..
똑똑-
"이안?"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냐고 묻는 듯한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입고 있던 것을 마저 입고 그녀를 마중나갔다.
막 일어난 모습이 파괴력이 상당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오셨어요?"
날 마주치자마자 슬며시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흠하고 작게 헛기침을 한 디아나가 날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그럼 갈까."
"네."
흔쾌히 그것을 마주잡은 순간 볼 수 있었다.
날 향해 내밀어진 것말고 그 반대쪽 손에 밴드가 덕지덕지 감겨있는 모습을 말이다. 딴에는 나름대로 숨겨본다고 숨겨본 것 같은데 워낙 이례적인 모습이다보니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었다.
손으로 가서 닿는 내 시선을 디아나도 느낀 것일까. 어정쩡하게 옆구리쪽에 붙어 숨어있던 손이 순간 움찔하며 움츠러들더니 그대로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와 함께 울려퍼진 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를 몰아내기 위한 헛기침소리였다.
제 어설픔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모습을 내게 보이는 게 그리도 민망했던 걸까.
귓가로 울려퍼지는 소리에 반응한 척 시선을 들어올려보니 바로 조금 전까지 볼쪽에만 머물러있던 것이 어느새 귀까지 번져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마저도 민망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한 디아나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와 함께 막 씻고나온 탓인지 더욱 향기롭게 느껴지는 그녀 특유의 체향이 코로 훅하고 파고들어왔다.
최근 들어서 디아나하고는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운동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에 하던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게 일상인 지금 몸에는 충분히 빡쎘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 바퀴만 더 돌아볼까?"
그리고 교관으로서 고용한 디아나는 꽤나 엄격했다. 준비운동만으로도 벌써 숨이 벅차서 내가 조금만 쉬다가 출발하자고 신호를 보내도 싹 무시하고 싱긋 웃으면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디아나였으니까. 혹시 아까 내가 자기를 놀린 걸 이렇게 복수하려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넘어질세랴 내 손을 꼬옥하고 움켜쥔채 살짝 앞쪽에서 날 이끌어주는 그녀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최근들어 산책 겸 운동 코스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의 사저 주변이었다.
디아나의 인도에 따라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생각했다.
'언제 주려나..'
아마 디아나는 아직 내가 눈치채지 못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진작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녀가 운동코스 중간 쯤에 자리하고 있는 벤치 쪽에 뭔가를 숨겨놓았다는 걸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뭔가를 확인하듯 자꾸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대는데 어떻게 눈치를 못 챈단 말인가?
그래서 뭘까.
대체 뭘 준비해온 걸까.
목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기 위해 헉헉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메뉴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자니 그런 내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였던 것인지 아니면 슬슬 준비해온 걸 꺼내들만한 타이밍이라 생각한 것인지 살짝 앞에서 걷던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채 내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마저 돌까?"
그래도 여기서 끝내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즉시 고개를 끄덕이니 디아나가 나를 예의 그 벤치를 향해 이끌었다.
그에 아까 전부터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호기심이 한층 더 부풀어오름과 동시에 심장이 바로 조금 전하고는 다른 의미로 두근두근하고 뛰는 걸 느끼고 있자니..
"마실 것좀 가져올게."
날 벤치에 앉힌 디아나가 그리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음료는 따로 준비해오지 않은 모양.
그랠서 그런갑다하고 디아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좋은 아침이네~?"
그 잠깐의 틈을 앨리스가 비집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