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뭐야.'
벌써 돌아왔다고?
느낌상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나랑 얼른 하고 싶어서 서두르기라도 한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어떻게든 볼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허둥지둥하며 서두르는 디아나의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같아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심장이 놀라서 벌렁거렸다.
그런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다면 다름아닌 카트린느였다. 노크 소리가 오두막 안으로 울려퍼진 순간 그녀가 보여준 반응은 뭐랄까..
몰래 물건을 슬쩍 하려다가 가게 주인한테 불린 꼬맹이 같았다.
그래, 딱 그랬다.
앉은 자세에서 몸이 펄쩍하고 튀는 데 내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겠지.
그렇게 생각치도 못했던 방문객의 등장에 서로 당황하고 있던 순간 들려온 건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다른 목소리였다.
"카트린느? 안에 있어요?"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나무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귀에 익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분명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건데 누구 목소리가 저랬는지 당췌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까.
그나마 비슷한 걸 꼽아보자면 주인공 놈의 목소리 정도?
그 놈의 목소리가 가늘어지면 딱 저런 목소리일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목소리의 주인에 대한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자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허둥지둥 날 일으켜세운 카트린느가 날 바라보며 선언했다. 오늘의 실험은 여기서 종료해야할 것 같다고.
"응? 왜?"
그래서 그냥 계속하면 되지 왜 멈춰야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것처럼 의아해하는 반응을 얼굴 위로 내비췄더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건지 카트린느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로 전직해버렸다.
"..카트린느?"
허나 세상은 가혹했다.
그녀에게 평화롭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까.
문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조금씩 인내심이 증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마 여기서 한 번 정도 씹으면 그때는 문을 열고 들어오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카트린느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던 걸까. 그녀가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렸다. 머리 굴리고 있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리는 느낌이었다.
"그, 그래..! 실험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래."
그리 말한 카트린느가 평소에도 관계를 맺을 때 다른 이가 들어오는 일은 없지 않냐는 말을 잽싸게 덧붙였다.
"하긴 그건 그렇지."
"이해했지? 그러니까 얼른 옷부터 입자."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니 살짝 고개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잔뜩 풀어헤쳐진 단추들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제 몰골이 남에게 보여줄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걸까.
단추를 채우기 위해 아래쪽을 향해 있던 얼굴이 일순간 새빨갛게 변하더니 카트린느가 어디선가 실험용 백의 하나를 꺼내 잽싸게 몸에 걸쳤다.
그리고 나서야..
"어, 왔어?"
문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닫혀있는 문을 열며 방문객을 맞이하는 카트린느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찾아온 거길래 저렇게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나 싶었으니까. 친한 친구라도 찾아온 걸까.
궁금한 마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카트린느의 인도에 따라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이는 주인공 놈의 모습이었다.
놈도 나랑 비슷한 타이밍에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까. 카트린느 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내쪽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앞으로 내딛어지던 놈의 몸이 그대로 멈칫했다.
설마 여기에 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내쪽을 향해있던 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더니 그것이 다시금 카트린느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주인공 놈의 움직임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놈의 시선을 받은 카트린느가 즉시 입을 열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밝혔다.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문의를 하러 온 거라는 그녀의 설명에 주인공 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그.. 잘 지냈어?"
대뜸 그리 묻는 게 아닌가. 피차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 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나저나 잘 지냈냐라.
그 질문에 뭐라 답하면 좋을지 살짝 아리송하긴 했다. 내 기준으로는 잘 지낸 게 맞긴 한데 이 세계 기준으로 하면 잘 지냈다고 보기 좀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으니까.
"그럭저럭? 너는? 아까 보니까 목소리가 좀 이상하던데."
놈의 목소리는 어느새 내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있었다.
아니, 내 머릿속에 있는 것하고는 완벽히 똑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것보다 살짝 가늘긴 했으니까.
그래서 감기라도 걸렸냐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던 건데..
"음, 최근 들어서 목이 좀 안 좋아서.."
놈이 손으로 목을 어루만지며 얼굴 위로 쓴웃음을 띄워올렸다.
목이 안 좋다라.
"감기?"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네.. 약을 구해서 먹어봐도 나아지질 않더라고."
아, 그래서 카트린느를 찾아온 건가? 평범한 약으로는 효과가 없어서?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놈이 카트린느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그게.."
슬쩍 말끝을 흐리는 카트린느의 표정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그것만 보고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완성이 되질 않은 모양.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오늘 이곳에 방문하기 전까지 오두막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내쪽에 집중한답시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
"그.. 혹시 많이 급한 거야?"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리 말하면서 왜 은근히 이쪽을 힐긋거리는 걸까. 카트린느의 우선순위에서 나보다 뒤로 밀렸다는 사실이 새삼 분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나?
결국 부탁했던 것을 수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놈은 카트린느를 향해서 꿩이 없으면 대신 닭이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평소 받아가던 거라도 달라는 놈의 말에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처럼 즉시 고개를 끄덕인 카트린느가 어딘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그렇게 졸지에 놈과 단둘이 남겨지게 된 순간 나와 놈 사이로 내려앉은 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딱히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어떨까.
그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기차를 타고 수도로 상경하는 동안 내게 얻어먹은 것들부터 시작해서 남부에서의 일까지 내게 빚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전자의 것이야 사실상 몇 푼 되지도 않는 거라 빚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후자의 것은 부채감이 어마어마할 거다. 다 떼놓고 상황만 놓고 보자면 나는 그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놈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걸 택했던 거니까.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건 필시 공감능력따위는 밥 말아먹은 사이코 새끼일 터.
아니나 다를까 침묵이 계속되자 놈이 묘하게 내쪽을 힐긋대기 시작했다. 다만 그렇게 날아와 꽂히는 시선은 내가 내심 예상했던 것하고는 조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대로라면 안절부절 못 하는 시선으로 내쪽을 바라봐야하는데 지금 날아와 꽂히는 것들은 그렇다기 보다는 관찰하는 느낌에 가까웠으니까. 꼭 마치 자기 머릿속에 있는 뭔가하고 날 나란히 앉혀놓고서 비교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혹시 뭐 내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이안이랑은 많이 달라져서 그 부분에 이상함같은 걸 느끼고 있기라도 한 걸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똑똑-
다시 한 번 문 두들기는 소리가 오두막 안으로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또 누가 찾아온 걸까.
노크 소리에 반응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워올린 순간 닫혀있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건 다름아닌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이안."
볼일을 끝내자마자 바로 여기로 달려온 모양이다. 목소리에 살짝이지만 헐떡거림이 섞여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날 부르며 안으로 들어서던 디아나가 그대로 멈칫한 것은 주인공 놈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그와 함께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 디아나가 주인공 놈을 상대로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말이다.
주인공 놈을 발견한 순간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명백히 상대방을 껄끄러워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증오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대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어서 껄끄러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혹시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동안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래도 저 반응은 말이 안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놈을 발견한 순간 디아나가 얼굴 위로 내비친 반응은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나 보일 법한 그런 반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성립할 수가 없는 가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놈은 어느 하나 디아나보다 윗선에 있는 게 없으니까.
일단 신분부터가 디아나 쪽이 훨씬 위인데다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지위도, 성적같은 것도 모두 디아나 쪽이 명백히 위였다.
내가 기억하는한 그랬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 튀어나왔다는 건..
'내 기억이 틀렸다는 소리겠지.'
뭘까.
대체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디아나가 주인공 놈을 자기보다 윗사람 바라보듯 바라보는 걸까.
심상치 않은 예감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썩 반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이런 느낌이 들 때마다 꼭 생각치도 못한 방식으로 개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었으니까.
솔직히 지금까지는 디아나와 앨리스, 그리고 레이시아가 서로 손을 잡고서 무슨 작당을 했던 간에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준비했던 간에, 설령 그것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촘촘한 그물이라고 한들 내게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래서 그것만 믿고서 내심 태만하게 늘어져있었던 것인데..
직감이라는 놈이 지금 이 순간 내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태평하게 그것만 믿고 있다가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저 놈도 관련이 있으려나?'
당장 궁금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날 두고 작당을 한 게 셋이 아니라 넷이라면, 그 네 자리 중에 한 자리를 저 놈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면?
많이 골치아파질테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디아나가 얼굴 위로 띄우고 있던 것을 평범한 것으로 갈아치웠다. 그것도 그냥 바꾸는 게 아니라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하게 말이다.
덕분에 긴가민가함과 확신 사이를 배회하며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것이 확신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다짐했다.
어떻게든 셋이서 작당한 내용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그러면..'
누구 위주로 캐보는 게 좋을까.
누굴 자극해야 즈그들끼리 꽁꽁 숨기고 있던 걸 내 앞에서 술술 털어놓을까.
디아나?
'아니지.'
남을 속이는 데 있어 영 재능이 없는 디아나지만 그거하고 알고 있는 비밀을 지키는 건 명백히 별개의 것이니까.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내가 쥐고 흔들어댄다고 하더라도 쉬이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앨리스?
아니면 레이시아?
어느 쪽을 흔드는 게 이 삼각동맹인지 사각동맹인지 알 수 없는 것의 붕괴를 불러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주인공 놈과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은 디아나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날 향해 손짓을 했다.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그에 답을 하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잠시만요. 카트린느 누나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요."
셋 중에 누구 입이 제일 가벼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