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36)화 (136/366)



〈 13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간신히 카트린느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를 향해 물었다.

대체  그러고 있었던 거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엔 좀 그래서 주의도  환기시킬겸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아.. 그, 그게 실은.."


돌아온 건 꽤 장황한 답변이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던, 아니 찾지 못했던 이유를.

"나도 책임은 져야하니까.."


그래서 계속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단다. 어떻게든 날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확 어지럽더라구."

제멋대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서 잠시 누워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다면 카트린느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태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당분간 원래 몸으로 돌아가긴 틀렸다는 걸.

그 밤낮을 가리지 않는 실험을 통해서 뭔가 단서를 건졌다면 저런 표정일 리가 없으니까.

'뭐, 딱히 상관없긴 한데..'


연신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카트린느에게는 살짝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이 빌어먹을 허약함만 해결된다면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솔직한 심정이니까.

그래서 역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척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쓰러질 때까지 무리를 하는 게 말이 되냐면서 속상해하는 척을 하니 역으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카트린느의 입꼬리가 묘하게 움찔대는 걸 볼 수 있었다.

꼭 마치 기분 좋은 걸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참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더 기분좋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식사는요."


 말에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멈칫했던 카트린느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배가 꼬르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대신해 내 물음에 답했다.


하고 있는 꼴도 민망해 죽겠는데 몸까지 따라주질 않으니 많이 민망했던 것일까.

카트린느가 고개를  숙였다. 아래를 향해 드리워진 머리칼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그녀의 귀는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대로 오두막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몸을 일으키자마자 카트린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렇게 얼굴로 따라붙은 그녀의 시선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먹을 거  있어요?"


그동안 봐온 게 있다보니 솔직히 별 기대  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부엌은 상태가 괜찮았다.


식재료를 조달해주는 사람이 바로 어제 들렸다 간 것일까.


저번에 들렸을 때하고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풍부한 식재료가 주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조금 마르긴 했어도 멀쩡한 빵에다가 상하지 않은 우유라니.


카트린느의 주방에서 이런 것들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외에도 햄에 소세지에 야채도 좀 있길래 그냥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뭔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에는 몸이 따라주질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선택한  샌드위치였는데 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샌드위치를 싸는 것도 상당히 힘에 부쳤다.


샌드위치가 완성될 쯤에는 손에 힘이 없어서 차마 칼을 쥘 수가 없었다. 해서 그냥 자르지 않고 통째로 내가기로 했다. 괜히 무리하다가 잘 만든 샌드위치에 피를 끼얹는 꼴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완성한 것 옆에 우유  잔을 곁들여준  거실이나 좀 치우고 있으라고 내보냈던 카트린느를 주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맘 같아서는 서빙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는데 왠지 가다가 떨어뜨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든 것을 챙긴 카트린느와 함께 주방을 빠져나온 순간..


'허.'


코로 흘러들어온 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익숙한 향기였다.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거실이나 좀 치우라고 했더니  사이 이런  세팅해놨을 줄이야.

"이건.."

무시하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코밑을 맴도는 향기에 슬며시 아는 척을 하니 옆에서 걷던 카트린느가 순간적으로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아, 그게.. 환기가 잘 안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카트린느가 되도않는 변명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어차피 실패작들인데 이렇게라도 써먹는 게 좋지 않겠냐면서 나름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를 상대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다보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이것도 나름 오랜만이라서 그런 지 묘하게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허나 그걸 티낼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의식하듯 내가 싸준 샌드위치를 점잖게 오물거리는 카트린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차피 물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기에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이 너무 허약하다고?"


"응."


고개를 끄덕였더니 돌아온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꼭 마치 '난 안 그러던데..'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중얼거리던 카트린느가 이내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로 내 평소 몸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로 심각하다니까? 조금만 걸어도 숨이 목까지 차올라서 운동을 하고 싶어도  수가 없어."


"그 정도라고..?"

내 열변을 듣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좀 깨닫게 된 것일까.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다시 접시 위에 올려놓은 카트린느가 우유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그대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누가봐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코밑을 맴도는 향기 때문에  모습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향초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일부러 저러는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약이 있으면 좀 받을  있을까?"

고민에 빠진 카트린느를 상대로 조심스럽게 요청했더니 돌아온 건 그건 좀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원한다면 줄  있기는 한데..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왜?"


"생각치도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부작용에 대해 언급하는 카트린느의 얼굴은 드물게도 굉장히 진지하기 짝이 없어서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양강장제를 뜯어내는 건 실패로 돌아간 상황, 해서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줄곧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아, 그나저나 그.. 동글동글한 약들 있잖아."


그러자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묘하게 당황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그건 왜..?"


"아니, 무슨 용도길래 그렇게 하루 세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건가 궁금해서."


"으음, 그게.."

뭐길래 저렇게 대답을 망설이는 걸까.


그러지 말고 얼른 대답해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카트린느를 쳐다보고 있으니 제게로 쏟아지는 내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뭐?"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었다.


대답을 들어놓고도  믿겠다는  되물었던  바로 그때문이었다.


페로몬 억제제라니.

진실을 알게 되니 뭔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카트린느가 샌드위치를 먹는 척을 하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위렇게 되고 나서 디아나나 앨리스가 가끔가다 평소하고는 다르게 뭔가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과감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유를 말이다.

당시에는  과하게 흥분했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약먹는 걸 깜빡한 날에만 그랬단 말이지.'


그 때마다 둘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페로몬의 효과는 일단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용할 수 있을 지도.'


약 먹고 말고에 따라 페로몬을 뿜어냈다가 말았다가 하는 몸이라니 스위치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장난감 로봇이 떠올라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이왕 이런 몸이 된 만큼 그걸 제대로 활용해야 억울함도 덜하지 않겠는가.

그걸 앨리스나 디아나한테 쓸 생각은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둘과는 평소에도 충분히 몸의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하지만 레이시아라면?

자그마한 것이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탓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그녀라면 어떨까.

생각하면 할수록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물론, 나중 일일 수밖에 없는 그것보다는 지금 눈앞으로 닥쳐와있는 것부터 해결하는  먼저겠지만.

"하음.."

이만하면 슬슬 타이밍이 된  같아서 슬쩍 하품을 하니 얼마 남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깨작거리면서 은근히  얼굴을 살피고 있던 카트린느가 눈을 번뜩였다.


"졸려?"

그런 물음이 귓가로 날아든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일텐데 목소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꼭 '얼른 졸리다고 대답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탓에 순간 웃음이 새어나올 뻔 했지만, 어찌어찌  눌러서 막아낼 수 있었다.

"응.. 너무 일찍 일어났나봐."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리 말하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살짝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렇게 연거푸 하품을 하다가 살짝 몸을 늘어뜨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 상태로 아주 살짝  것처럼 고개를  번 까닥거렸더니..

"많이 졸리면 눈 좀 붙일래? 어차피 디아나 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면서."


"음.."


"그러지 말고 누워있어. 나중에 고개 아프겠다."

이미 잠기운에 먹혀버린 것처럼 카트린느의 우려섞인 목소리에 대충 답을 하면서 고개를 꾸벅하고 앞으로 숙였다가 원래대로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러면 조금만.."


결국 몰려오는 잠기운을 이겨내지 못한 것처럼 스르륵 몸을 옆으로 뉘였다.


"덮을 거라도 줄까?"


"아냐.."

카트린느의 물음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답을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조심스럽게 치우는 듯한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접시를 치우고 있는 걸까.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저 멀리 놓아두었던 향초를 아예 이쪽으로 가져온 것일까.


발자국 소리가 커질 때마다 코밑을 맴도는 향초의 향기 또한 그에 맞춰 강렬해졌다.

그렇게 내 앞으로 돌아온 카트린느가..

"이안?"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물론,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잠결에 그러는 것처럼 입술을 살짝 오물거렸다.


"이안..? 누나 목소리 들려..?"


"응.."

카트린느의 부름에 반응한 건 그녀가 몇 번 더 나를 부르고  후였다.

실제로 어느 정도 졸리긴 했기에 잠기운에 젖은 목소리를 꾸며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날 부르는 목소리에 답을 하니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트린느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름 오랜만이라서 그런 걸까.

그녀는 가장 먼저 내게 걸어두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암시들의 상태부터 확인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친히 알려주었다.

네가 지금까지 걸어두었던 것들은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걸.

"기억 안 나? 정말로?"

"응.."

그게 그리도 분했던 것일까.

까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하긴, 카트린느 입장에서는 나름 오랫동안 공을 들여 쌓아올린 탑이 무너진 것같은 기분이었을테니까. 당연히 분할 수밖에 없겠지.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짝 막막했던 모양이다.

초조하게 주변을 배회하는 듯한 기척이 그녀로부터 전해져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아..!'하고 나지막한 탄성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러더니..


"이안."

"응..?"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카트린느가 대뜸 그리 물어왔다.

무슨 꿍꿍이인 걸까.

아직 거기까지는 짐작이 되질 않았지만, 왠지 '그렇다.'라고 답하길 원하는 눈치라서 그대로 해주었다.


"응.."

"그러면 누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응, 네가 옆에서 도와주면 더 빨리 결과를  수 있을  같아."


그러니까 도와줄 거지?

카트린느는 그리 물었고, 그에 나는 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랬더니 뒤이어 속삭여지기 시작한 건..

"이 오두막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다 실험에 관련된 거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이상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할 필요 없어. 알겠지?"

진짜 세뇌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을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던 카트린느가 이내 내게 신호를 보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박수를 치면 잠에서 깨어나는 거야?"


"응.."


이제 일어날 때라고.

짝-!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박수 소리와 함께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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