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진짜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사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별 생각없이 문을 열었는데 그 너머에 사람이 쓰러져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순간적으로 철렁했던 심장이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방정맞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하고 귓가로 울려퍼지는 심장 소리를 반쯤 외면한채 엎어져있는 카트린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카트린느가 만들어내는 약의 비밀을 노리고 모종의 세력이 사람을 보내서 그녀를 습격하기라도 한 것일까.
수많은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끼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던 순간 귓가로 울려퍼진 건 도롱도롱하고 누군가 작게 코를 고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조금씩 끓어오르던 긴장감이 그대로 증발해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허탈함과 황당함이었다.
아니, 이 여자는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두고 왜 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걸까.
침대보다는 바닥이 더 좋다고 항의라도 하고 싶었나?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카트린느가 이곳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측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일반인인 나와 카트린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그랜드 캐니언 정도 되는 간극이 말이다.
아니면은 혹시 또 제 몸으로 임상실험을 한답시고 약을 잘못 주워먹기라도 한 걸까.
그게 그나마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것들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있는 카트린느가 평소처럼 꼬맹이 모드가 아니라 요염함이 흘러넘치는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 그런 내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고.
'그나저나..'
카트린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잤다. 아래에 뭘 깔고 있는 것도 아닌지라 바닥의 딱딱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몸이 상당히 배길텐데 불편하지도 않은 걸까.
그것도 모자라서 이따금씩 바닥에 얼굴을 비벼대는데 저러다가 가시라도 박히는 게 아닐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베개같은 거라도 가져다 주면 좀 괜찮으려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있는 카트린느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생각으로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으음.."
그런 식으로 태평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관찰하고 있으니 그녀가 잠결에 입을 오물대기 시작했다. 표정이 묘하게 행복해보이는 걸 보면 꿈속에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있는 걸까. 헤헤하고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진짜..'
생긴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어울릴 것 같은 오피스레이디 그 자체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글러먹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제 치태를 남이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다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꿈 속 세상에 퐁당 빠진 채 연신 헤헤하고 헤픈 웃음을 흘려대는 카트린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분명 성격상 관리같은 것도 안할텐데 볼이 어쩜 저렇게 애기 볼따구마냥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일 수가 있는 걸까.
꼭 갓 쪄낸 찹쌀떡같은 것이 만져보면 어떤 느낌일지 무지하게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인지 한 번 확인이나 해볼겸 깨울 생각으로 발그레하게 살짝 상기되어 있던 볼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던 것인데..
"하움.."
그 순간 카트린느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며 그녀를 향해 뻗어져나가던 내 손가락이 여전히 우물거리고 있는 입술 속으로 쏘옥하고 빨려들어갔다. 그야말로 절묘하기 그지없는 타이밍이었다. 너무 절묘해서 혹시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나저나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중이길래 입 안으로 들어간 내 손가락을 저리도 자연스럽게 쪽쪽 빨아대는 걸까.
카트린느의 혀가 손가락을 스칠 때마다 닿은 부분에서 근질근질한 감각이 올라왔다. 아주 잠시동안 그 감각을 만끽하다가 손가락을 빼내 그것으로 볼을 콕 찔렀다.
"으응.."
그 정도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뒤트는 걸 보니 깨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더 찔러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으.."
살짝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꽉 맞물려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륵 움직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일까.
눈꺼풀이 열리며 드러난 눈동자는 잠기운으로 젖은 채 멍한 기운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일단 잠기운부터 어떻게 할 것이지 제 단잠을 방해한 장본인의 정체가 그리도 궁금했던 것일까.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데구르르 움직여 마침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그렇게 막 깨어난 카트린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확실한 건 일단 그녀가 예상한 범위 내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이 마주친 순간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뜰 이유가 없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채로 날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풀이나 뜯을 겸 잠깐 굴밖으로 마실을 나갔다가 늑대하고 딱 마주친 토끼같았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몇 시간이고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아서 먼저 말을 걸어봤다.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이, 이안?"
"우리 나눠야할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지금 모습의 장점을 알게 된 이후로 몸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딱히 개의치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따져야할 건 따져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까 지어보인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채 그리 말하니 내 말에 찔끔한 표정을 하고 있던 카트린느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소파도 아니고 바닥에 벌러덩 엎어져서 잠든 꼴을 보인 게 그리도 민망했던 것일까.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인 카트린느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아까 눈여겨보았던 티슈를 한 장 뽑아서 내밀었다.
"그 전에 얼굴 좀 닦으시고요."
지금 카트린느의 얼굴은 그야말로 총체적난국 그 자체였다. 자면서 흘린 것도 흘린 거지만 바로 조금 전까지 바닥하고 찐하게 딥키스를 나누고 있었던 탓에 먼지가 어느 한 곳을 가리지 않고 아주 덕지덕지 묻어있었으니까.
아마 거지가 봤다면 동종 업계 사람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티슈를 내밀고 있으니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을 한층 더 붉게 물들인 그녀가 얼른 씻고 나오겠다면서 허둥지둥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내가 내민 티슈를 빼먹지 않고 챙겨간 건 덤이었다.
그렇게 카트린느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촤아악하고 폭포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오두막 안으로 울려퍼졌다.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얼굴만 문제였던 게 아니었던 모양.
하긴 아까 말은 못했지만 살짝 쿰쿰한 냄새가 나긴 했으니까. 그 왜 며칠동안 옷 안 갈아입으면 나는 냄새 있지 않은가.
이왕 들어간 김에 그것까지 해결할 생각인 걸까.
계속 어딘가에 물을 끼얹는 소리가 욕실 쪽에서 들려왔다.
'그나저나..'
갈아입을 옷 안 들고 가지 않았나?
설마 그 옷을 그대로 다시 입을 생각은 아닐테고..
소파 위에 걸터앉아서 오두막 특유의 형편없는 방음을 만끽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있던 문이 살짝 열리며 조심스럽게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 이, 이안?"
다 씻고 나서야 제가 뭘 깜빡해버렸는지를 깨달은 것일까.
문틈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카트린느가 조심스럽게 그지없는 목소리로 부탁을 해왔다. 옷 좀 가져다주면 안 되겠냐고.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포옥하고 내쉬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미 여러 번 방문해본 경험이 있는 그녀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
'이야..'
분명 들릴 때마다 치워줬던 것 같은데 몇 주 방치했다고 다시 이런 꼴이 될 줄이야.
헛웃음을 흘리며 뱀이 벗어놓은 허물마냥 여기저기 늘어져있는 것들을 발로 걷어내며 옷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옷장 앞에 도착해 굳게 닫혀있던 옷장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날 반긴 건..
"어욱..?!"
산사태였다.
옷가지들로 만들어진 산이 무너져내리며 그대로 날 덮쳤다.
대체 얼마나 쌓아둔 건지 옷장 문을 잡고 있음에도 쏟아지는 옷가지들에 떠밀린 옷이 제멋대로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빨래는 했는데 차곡차곡 개서 넣기는 귀찮고 그래서 대충 마르자마자 그대로 옷장 안에 쑤셔넣었던 것일까.
그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덮친 옷가지들에게서 풍겨져나오는 빨래와 걸레 사이의 냄새를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쑤셔넣을 거면 완전히 말리고 나서 쑤셔넣던가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와중에 입 안으로 살짝 파고 들어오는 게 있어서 그대로 퉤하고 뱉어내니 돌돌 말린 검은색 팬티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뭐, 덕분에 옷을 고르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요상한 냄새를 풍기는 것들을 대충 옆으로 밀어내고 나니 남은 거라고는 팬티 한 장과 셔츠, 그리고 얇은 천으로 된 반바지가 전부였으니까.
'이것 참..'
괜히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팬티의 디자인 때문이었다.
분명 세트로 샀을 텐데 제 짝궁은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서랍 안에 지 혼자 남겨져있던 그것은 팬티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그냥..'
끈 아닌가?
이걸로 뭐가 가려지기는 하나?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팬티가 이 꼴이면 브래지어는 도대체..
맘 같아서는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리고는 챙긴 것들을 그대로 들고서 카트린느가 기다리고 있을 욕실로 향했다.
"앞에다가 놔둘게요."
"고, 고마워.."
말한대로 들고 온 것을 욕실 문 앞에 내려두고 천천히 물러서니 닫혀있던 문이 살짝 열리며 그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무사히 갈아입을 옷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카트린느가 욕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였다.
들어갈 때만큼이나 빨간 얼굴을 한채 엉거주춤하게 걸어나오는 카트린느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유독 그 팬티만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던 이유를.
아무래도 취향이 아니라 홧김에 샀다가 과감하게 그지없는 디자인 때문에 차마 입을 엄두가 나질 않아서 방치해두었던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습을 드러낸 카트린느는 민망해서 죽으려고 했다.
연신 내쪽을 힐끔대면서 어기적어기적 걷는 것이 평소와는 많이 다른 착용감이 영 적응이 되질 않는 모양.
그 와중에 반바지는 살짝 작아서 그녀의 하체에 쫙 달라붙은 채 끈으로 된 팬티와 음부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가린답시고 손을 다리 사이에 모은 채 걸음을 옮기던 것도 잠시, 내 앞에 도달한 그녀가..
"자, 잘못했어..!"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그런 카트린느의 움직임에서 망설임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꼭 마치 제가 살 길은 이것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문제는 그녀의 복장이었다.
안 그래도 여러모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었는데 바닥에 엎드리면서 여기저기가 잡아당겨지고 늘어나면서 굉장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개중에 제일 압권이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엉덩이 쪽이었다.
셔츠 자락이 말려올라가며 그새 살짝 밑으로 내려간 반바지 위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엉덩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야한데 살짝 드러난 엉덩이골 사이에 끼어있는 검은색 끈이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마성의 끈이었다.
보면 볼수록 한 번 잡아당겨보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았으니까.
유혹이 어찌나 강렬한지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손이 제멋대로 그것을 향해 뻗어나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인데..
카트린느에게는 그런 침묵이 '분노'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인지 카트린느가 엎드린 채로 몸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 그래도 살짝 내려가있던 바지가 살결을 타고 미끄러지는데..
"일어나세요."
"하, 하지만.."
"용서해드릴테니까 일어나서 이야기해요."
그래서 엎드려있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일으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트린느가 일어서지 않으면 대신 다른 게 일어서버릴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