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앨리스를 상대로 졌다는 사실이 많이 충격적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날부터 디아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뭐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대개 둘 중에 하나였다.
대체 어디서 주워온 건지 알 수 없는 요상한 제목의 책을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거나 몸에 쫙 달라붙는 운동복을 착용한채..
"운동하세요?"
하체운동을 하고 있거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물으니 자세를 취하기 위해 몸을 굽히던 디아나의 몸이 휘청였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란 걸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바닥하고 찐한 딥키스를 나누게 될 거라는게 눈에 훤히 보여서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는데..
몸을 날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는 걸.
덕분에 넘어지는 디아나를 잡아주기는 커녕 그대로 그녀의 밑에 깔리게 되었다.
디아나를 대신해서 바닥하고 입을 맞춘 뒤통수 쪽에서 욱씬거림이 올라옴과 동시에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얼굴을 포옥하고 감싸는 게 느껴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체향이 평소보다 훨씬 짙어진 채 콧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 이안? 괜찮은 것이냐?"
조심스레 그걸 들이키고 있자니 당황한 듯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디아나가 허둥지둥 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손을 움직여 그런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이리저리 부볐다.
작아져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행동을 해도 걸리적거리는 게 없달까. 원래 몸일 때는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장난아니었는데 말이다.
몸이 줄어들면서 그런 쪽의 장벽도 같이 제거되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디아나를 상대로 응석 비슷한 걸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런 내 행동을 당혹스러워했다.
"자, 잠깐.. 따, 땀이.."
제 몸을 적시고 있는 땀방울이, 거기서부터 피어날 냄새가 신경쓰였던 걸까. 최선을 다해 디아나의 몸에 매달려있으니 그녀의 몸이 흠칫흠칫 떨리며 당혹스러움을 표출했다.
그렇게 디아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뒤 가슴골 사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혹시 안 좋은 냄새같은 거라도 날까봐 안절부절 못 하던 디아나의 눈빛이 바뀐 건 그 다음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여 내게 입을 맞추었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그런 느낌의 입맞춤이었다. 그에 괜찮다는 뜻으로 혀를 살짝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핥으니 바닥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이 내 몸을 감싸안았다.
혹시 내가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몸을 끌어안은 팔에서 제법 힘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디아나가 내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일전에 느꼈던 섭섭함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격렬하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디아나의 품에 안긴 채 그녀를 달래주다가 어느 정도 만족한 것 같을 때쯤 그녀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접객용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책들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저건.."
뭐냐는 뜻으로 슬쩍 말끝을 흐리니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아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책쪽을 향하고 있던 내 시선을 차단했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 정도?
그 탓에 디아나의 몸에 치인 책의 탑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러면서 책이 펼쳐졌고, 그와 함께 드러난 건..
"음.."
살색으로 가득한 삽화였다.
살짝 침음성을 흘리며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타있는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낸 그 삽화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내 시선을 차단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디아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건 그러니까.."
일단 들켰으니 변명은 해야겠는데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일까. 디아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침도 삼킨 것인지 목울대가 출렁거린 건 덤이었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그녀를 따돌리며 활짝 펼쳐진 책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흐음.."
그리고는 굉장히 시선을 사로잡는 삽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든 것일까.
"이, 이안 이건 그러니까.. 그게.."
디아나가 격렬하게 팔을 퍼덕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럼에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건 매한가지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요즘 왜 안 찾아오시나 했더니.."
이런 것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 오해한 척 목소리하고 표정을 내리까니 디아나의 표정이 덜컥 흔들렸다.
"아, 아니다! 그런 건..!"
"아니면요? 이렇게 잔뜩 쌓아놓고 보시는 이유가 뭔데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꼴보기도 싫다는 듯 이리저리 널브러져있는 책들 사이로 툭 던지며 물으니 허둥지둥하던 디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렸다.
"그게.."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널 조금 더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네?"
"그.. 나랑 하면 편해질 때까지 오래 걸리니까.."
사정같은 노골적인 단어를 쓰기에는 좀 부끄러웠던 것일까.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한채 우물쭈물 말을 내뱉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디아나."
"응.. 읍?!"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것도 잠시,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내가 이끄는대로 내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그녀의 입안을 헤집어대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떨어뜨렸다. 한창 좋았는데 떨어져나가니 살짝 아쉬웠던 걸까. '아..'하고 나지막하게 내뱉어진 소리와 함께 꼬옥 감겨있던 눈꺼풀이 살짝 열리며 몽롱하게 변한 하늘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의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쉽지는 않았다. 작아진 건 손도 마찬가지라 예전처럼 완벽하게 감쌀 수가 없었으니까. 대신 깍지를 끼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앞으로 그런 고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하라고.
내 말이 그리도 의외였던 걸까.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며 살짝 얼빠진 듯한 음성이 연분홍빛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그게 책한테.. 뺏기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니까 책을 들여다보고 혼자서 공부할바엔 차라리 나한테 와서 말을 해라. 그러면 내 몸으로 '실습'을 시켜주겠다.
부끄러워하는 척 그리 말하니 디아나의 눈이 확 커졌다. 그것도 잠시 아까봤던 열기가 다시금 그녀의 눈동자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그동안은 앨리스와 비교당할까봐 날 찾는 걸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어버리니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한채 디아나가 날 향해 바짝 다가섰다. 그대로 날 안아들고 침대로 직행하기라도 할 것처럼.
"..안 돼요."
손을 내밀어 그런 그녀를 막아세웠다.
설마 이 타이밍에 내가 거절할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디아나의 얼굴 위로 '어?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날 향해 다가오던 그녀의 몸이 그대로 멈칫했다. 그 상태로 굳어있던 것도 잠시, 살짝 울컥한 듯한 표정이 얼빠진 표정을 대신했다.
"그.. 가야할 곳이 있어서.."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에 당황한 척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며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지금말고 갔다와서.. 알겠죠?"
가야할 곳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당장은 이걸로 참아달라는 뜻으로 그리했던 것인데 그만 역효과가 나버렸다.
가라앉기는 커녕 오히려 더 불이 붙은 느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디아나는 자신이 동행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니까 얼른 해치우고 돌아와서 하자는 것처럼.
"얼른 씻고 나오마."
그러니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발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니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만한 것들은 죄다 스킵해버린 걸까.
평소처럼 하나로 모아묶은 그녀의 금빛 머리칼이 흠뻑 젖은 채 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상태로 얼른 가자며 날 재촉하는 그녀를 다시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좀 아니었으니까.
"나는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아요."
결국 직접 말려주겠다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산책가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 하던 그녀를 자리에 눌러앉힐 수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손수 말려주고 나서야 사저를 나설 수 있었다.
'일단 그럼..'
예정대로 카트린느부터 찾아가야겠지.
최근들어 내가 특별히 주시하고 있는 이들을 꼽자면 역시 레이시아와 카트린느였다.
시도때도 없이 내게 달라붙어오는 디아나나 앨리스하고는 다르게 유달리 잠잠한 레이시아와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해들었을텐데도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카트린느.
둘 중에서 상대적으로 시급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카트린느였다.
레이시아 쪽이야 왜 그러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으니까.
그에 비해 카트린느 쪽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뭐,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이 허약함만큼은 어떻게든 해야했으니까.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나름대로 시도도 해봤는데 대체 얼마나 허약해진 건지 기초적인 운동조차도 쉽지 않았다. 관계를 맺을 때는 흥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교적 체력이 괜찮은 느낌인데 운동을 하려고만 하면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고 해야할까.
그렇다보니 솔직히 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내며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엔딩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걸 막아줄 수 있을만한 사람은 카트린느 뿐이었다. 애초에 날 이렇게 만든 게 바로 그녀니까. 당연히 해결법또한 알고 있을 터.
그렇게 카트린느가 실험실겸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오두막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음..'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와 몸에 푹푹 박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법 강렬한 그 느낌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니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린 디아나가 주변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흩뿌렸다. 그리고 나서야 좀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여전히 시선이 날아와꽂히는 건 매한가지긴 했지만 아까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니까.
디아나나 앨리스, 레이시아를 비롯해 사저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을 상대할 때마다 느낀 것이긴 한데 이렇게 밖에 나와서 걸어보니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외모가 예전의 것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파괴력이 상당하다는 걸.
예전의 것이 상대방을 두근거리게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느낌이라면 지금의 것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홀리는 느낌?
'뭐, 확실히 귀엽긴 하던데..'
욕실이나 화장실에 들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얼굴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옆에서 걷던 디아나가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혹시 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올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깜빡하고 있던 뭔가라도 떠올린 것처럼 '아차..'하는 표정을 한채 낭패감에 젖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디아나?"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그녀를 불러보니 안절부절 못 하던 그녀가 결국 사정을 밝혔다.
오늘 낮까지 처리해야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만 깜빡해버렸다고.
"그럼, 다녀와요."
"하, 하지만.."
"오두막 안에서 기다릴테니까 금방 다녀오면 되잖아요?"
결국 디아나는 날 오두막 바로 앞까지 데려다준 뒤 허겁지겁 서관을 향해 떠났다.
많이 급한 일이긴 했나 보다.
잠깐 눈 감았다가 뜬 사이에 벌써 숲 입구까지 빠져나간 걸 보면.
그렇게 빠르게 멀어져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문객을 거절하듯 굳게 닫혀있는 오두막의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것을 두들겼다.
똑똑-
나름 힘 줘서 두들겼다고 생각했는데 안까지 전해지긴 무리였던 걸까.
'아니면..'
아직 자나?
혹시 몰라 이름도 불러봤지만 그럼에도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잠들어있는 갑다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누나?"
카트린느가 날 맞이해주었다.
바닥에 쓰러진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