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자그마한 몸이 천천히 기울어진다.
그 광경이 꼭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새하얀 셔츠 위로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붉은 자욱도,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린 새빨간 핏방울을 바닥이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모습도 다 그랬다.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순간 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대로 현실에 내동댕이쳐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내심 자신말고 다른 이가 나서서 지금 눈앞으로 펼쳐져있는 상황을 수습해주길 바랬다.
허나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쓰러져있는 이안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앨리스라는 년도 그랬다.
제 머리칼 색만큼이나 붉은 액체의 향연에 그만 압도되어버리고 만 것일까.
눈을 부릅 뜬채 굳어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명심하렴. 다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전부 다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들었던 말이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꼭 그렇게 될 거라고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이안이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꼭 그녀의 탓이라고 책망이라도 하는 듯 했으니까.
'전부 다 잃어버릴 거라고?'
누구 마음대로.
아직 제대로 가져본 적조차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그딴 식으로 결말을 낸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그래서 허리춤에 달아놓았던 주머니를 거칠게 끌러냈다. 이안의 행방을 쫓기 위해 학원을 떠나기 직전에 카트린느가 혹시 모르니 가져가라면서 챙겨주었던 약이 그 안에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 못했겠지만 급박한 상황을 대비하여 효과 좋은 비상약같은 건 분명히 빼먹지 않고 챙겨넣었을 터.
그래서 주머니 뒤져 그럴 듯해 보이는 걸 꺼내들려고 했다.
꺼내들려고 했는데..
손끝이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그래서 마음만큼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게 분해서, 급해죽겠는데 빌어쳐먹을 정도로 따라주질 못하는 몸에 대한 짜증이 확 끓어올라서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빛이 터져나왔다.
주변을 점령한 빛은 태양빛처럼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도, 달빛처럼 어슴푸레하지만 포근한 빛도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지만 그럼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빛이었다.
신이나 성인에게서 뿜어져나온다던 후광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빛은 쓰러져있는 이안만큼이나 가녀린 체구를 하고 있는 남성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원의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학원에 소속된 생도인 걸까. 그러고보니 카트린느가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이라면서 출발하기 전에 처음보는 남자 한 명을 끌고왔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 남자가 학원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대체 정체가 뭐길래..
이안이 쓰러질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신이 압도당하는 걸 느끼고 있으니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안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리 생각한 순간 벌어진 것은 기적이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잘 벼려진 칼날에 의해 활짝 벌어져있던 상처가 스스로 아물어들며 머금고 있던 것을 바닥으로 뱉어냈다.
캉-!
흙바닥 위로 삐죽하고 솟아나있던 자그마한 돌멩이와 바로 조금 전까지 이안의 몸에 박혀있던 비도의 날이 맞부딪히며 난 소리가 어딘가로 먹혀들어가던 정신을 일깨웠다.
그에 주춤한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 상처가 자리하고 있던 부분을 꾹 누르고 있던 손을 뒤로 물린 남자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건 그에게도 꽤나 부담이 되는 일이었던 걸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남자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것도 잠시, 도움의 손길을 뻗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이 사건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자리로 불러모았다.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에 홀린 듯 그쪽을 향해 다가가니 남자가 넌지시 부탁을 해왔다. 주변에 있는 이들을 잠시만 물려줄 수 있겠냐고.
여전히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였고, 그에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을 향해서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그들을 뒤로 물린 순간,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고 있던 남자가, 아니 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뒤이어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래서일까.
이해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충격같은 것도 상대적으로 덜 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 광경을 봐버렸을 뿐더러 진이 자신을 믿어달라며 보여준 것또한 기적이라 불러야 마땅한 광경이었으니까.
수십 년동안 신을 섬긴 고위 성직자들도 보여주지 못하는 기적이라 불러야 마땅할 광경을 두 번이나 목도했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거기에 그런 것들을 두 번이나 펼치고도 아직 여력이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전히 남자의 손에 머물러있는 예의 그 황홀한 빛이 남자의 말에 설득력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믿기 싫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안을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만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믿기 힘드신 건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 남자를 계속 이곳에 붙잡아두려면.."
그런 자신의 내심을 짐작한 것일까.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과 함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내뱉어진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동시에 손등 위로 포개어진 손이 손등을 토닥이기 시작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까지 들은 말은 전부 진실이라는 걸,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가 숨기고 있는 자그마한 비밀도.
깨달음이 찾아든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건 아까도 울려퍼진 적 있는 것이었다.
-명심하렴..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 했다. 방법은 이것 뿐이라고, 그러니까 얼른 고개를 끄덕이라고.
그게 싫었다.
싫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확실한 거냐고.
그렇게 하면 정말로 성공할 수 있는 거냐고.
그러자 돌아온 건 후하고 짤막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였다.
"글쎄요. 그건 당신들이 하기에 달린 것 아닐까요?"
다만-
"명심해요. 연결이 견고해질 때까지 절대로 그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는 걸."
짤막하게 내뱉어진 말 뒤로 덧붙여진 건 경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 걸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이 남자는 바로 도망치는 쪽을 택할테니까요."
천천히 뻗어져나간 손가락이 디아나의 품 안에 안겨있던 이안의 앞머리를 훑었다. 꼭 안쓰러운 무언가라도 어루만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 내려다보는 눈길은 굉장히 서늘했지만.
"아, 그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겠다. 기사들에게도 입단속을 해두지."
"감사합니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물끄러미 이안을 내려다보던 진이 실 끊어진 인형마냥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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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 있던 눈을 뜬 순간, 그리하여 내가 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세 명과 대면하게 된 순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웅크리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각성의 충격과 함께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것처럼 괴로워하는 척을 하면서 셋을 향해 부르짖었다.
"대체 왜.."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렸냐고, 나만 사라지면 원래대로 돌아갈텐데 대체 왜 그랬냐고.
절절하게 부르짖은 순간 돌아온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반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던졌던 강수가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걸.
그녀들은 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읍소하면서 이제부터는 네가 바라는대로 해주겠다면서 날 설득하려고 했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말들을 경청하고 있던 나는 적당히 듣다가 거기에 넘어간 척을 했다.
물론, 마지막으로 믿어보겠다는 티를 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 중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날 대하는 레이시아의 태도였다.
날 통제하고 제 손 안에 두려던 레이시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러고 싶어하는 기미는 살짝살짝 엿보이긴 했지만 그걸 드러냈다가 내가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 그걸 억지로 참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남부에서 돌아오고 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할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유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서로 모종의 합의라도 본 것인지 자유는 보장해주되 디아나 아니면 앨리스가 번갈아가며 내게 찰싹 달라붙었으니까.
그렇지만 충분히 이해가능한 조치였다.
나라도 이렇게 했을테니까.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목격해버렸는데 내가 자신들의 보호를 받아들이게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안심이 될 리가 없겠지.
셋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해야할까.
어떤 식으로 적극적으로 변했냐고 하면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긴 힘들었지만 체감상 그랬다.
"서, 선배.."
예전같았다면?
내가 힘들다고 어필한 순간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꼬옥하고 끌어안아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더.. 흐읏..! 할 수 있지?"
그리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서 무리라고 말하면 예의 그 환을 먹여서 억지로라도 기운을 차리게 만드는 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조금.. 흣.. 더 힘내자?"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디아나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음과 동시에 그녀의 입 안에서 뭉개진 것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씩 힘을 잃어가던 물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힘을 되찾았다.
안쪽에서 물건이 확 부풀어오르는 느낌이 꽤나 당황스러웠던 걸까. 제가 그렇게 만들어놓고서는 디아나가 꺅하고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며 내 몸 위로 풀썩 엎어졌다.
그러더니 몸을 다시 일으키는 대신 혀를 빼꼼하고 내밀어 내 목덜미를 혀끝으로 핥짝핥짝 핥아대기 시작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핥아대고 있는 지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디아나가 핥고 있는 곳은 바로 오늘 아침에 앨리스가 키스마크를 남겨놓았던 곳이니까.
'둘이 번갈아가면서 이러는 걸 보면..'
독점욕이 사라진 건 분명 아닌데 말이지.
혹시 뭐, 내가 기절해있는 사이에 먼저 내 아이를 임신하는 쪽이 날 차지하기로 극적인 대타협같은 거라도 본 것일까.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날 쥐어짜고 말겠다는 의지가 어렴풋이나마 느껴져서 그런 생각까지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레이시아가 지금껏 이렇게 잠잠한 것이 말이 되질 않으니까.
셋이서 그런 식으로 타협을 본 거라면 디아나나 앨리스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덤벼들었을 이가 바로 레이시아였다. 독점욕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한 것이 바로 그녀니까. 분명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쥐어짜려고 했겠지.
그럼 대체 뭘까.
대체 어떤 식으로 합의를 봤길래 디아나를 비롯한 이들이 이런 식으로 달라진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짐작가는 것도 딱히 없었고.
그렇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정 안되면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저질러버리면 그만이니까. 다음 회차가 많이 고달파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힘든 건 매한가지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 편히 즐겨도 괜찮겠지.
'그나저나..'
확실히 카트린느의 솜씨가 좋긴 한 것 같았다.
쓰러지기 직전에 느꼈던 고통을 떠올려보면 꽤나 제대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그만한 걸 흉터하나없이 말끔하게 치료해놓을 줄이야.
이 정도면 전회차에서 고위 사제랍시고 거들먹대던 놈들이 펼치던 치료술법하고도 비벼볼 수 있을만한 수준이었다.
이 세계에는 그딴 이능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아마 내게 쓴 치료약만 만들어서 팔아먹어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꼬맹이 시절의 이안도 그런 점을 알아봤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미리 밑밥을 깔아뒀던 거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가며 쓸데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을 털어내고 나니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행복했다.
레이시아의 키스를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 디아나나 앨리스와 침대에서 노닥거리다가 밤이 되면 다시 레이시아의 품 안에서 잠을 청하는 나날이 마치 쳇바퀴마냥 반복되었다.
그러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 작은 몸을 유지한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카트린느가 어지간하면 꼬맹이 모드로 있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달까. 옆에 착 달라붙어서 수발들어주는 이가 항시 대기하고 있으니 불편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로지 장점만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하고는 별개로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허약함만큼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계를 맺을 때 조금 주도적으로 나가보려고 하면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 그걸 따라주질 못했으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데 이 부분만큼은 확실히 개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체력단련이라도 해야할까.
정 안되면 카트린느한테 자양강장제같은 걸 부탁해봐도 되겠지.
그녀도 찔리는 게 없지는 않을테니 어지간하면 내 요구를 들어주려 할테니 말이다. 그녀의 솜씨로 만든 거라면 효과도 확실할 것이고.
아무튼 그렇게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다보니 조금씩 수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행복은 수도에 도착하는 순간 끝일테니까.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