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30)화 (130/366)



〈 13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앨리스는 내가 자길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물건을 발딱 세우도록 학습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온몸을 사용해서 날 사정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눈치챘을 때는 솔직히 좀 웃겼다. 그딴 일이 실제로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는데..

'..이게 되네?'

놀랍게도 가능하더라.

앨리스를 볼 때마다, 정확히는 그녀의 몸 특정 부위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곳을 이용해서 날 사정시키던 모습이 떠올라서 물건이 제멋대로 반응을 해댔다.

물론, 약을 먹었을 때처럼 미친듯이 발기하거나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게 되는 정도?


그럼에도 놀라운 건 매한가지긴 했다.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내가 저항하든 말든 꼬박꼬박 챙겨먹였던 환의 또다른 효과라도 되는 걸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하나씩 늘어갔다.

허나 그게 무엇이든 간에 영원할 수만은 없는 법.


시간이 지날수록 별탈없이 이어지던 교국을 향한 도피행에도 잡음이 끼기 시작했다.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방향을 바꾸는  없이 쭉쭉 잘만 내달리던 마차가 방향을 트는 일이 조금씩 잦아졌다.

그럼에도 검문에 걸린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럴만한 기미가 보이면 일찌감치 방향을 틀어 회피하는 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그랬다.

바로 오늘까지는 말이다.


쿵쿵쿵-


마부석과 연결되어 있는 쪽에서 마차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제법 다급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에 반응한 앨리스가 옆에 앉혀놓고 있던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쪽으로 향했다.

똑똑-

일부러 짧게 끊어친 것같은 소리가 마차 안으로 연달아 울려퍼졌다. 미리 정해둔 신호같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뒤이어 울려퍼진 소리를 듣고 앨리스가 저렇게 표정을 구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쯧."


귀찮게 됐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앨리스가 대뜸 자신이 기대고 있던 좌석 뒷편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거기에 뭐라도 숨겨놓은 걸까. 상체까지 한껏 앞으로 숙인 것이 여차하면 그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물론, 좁아서 무리겠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좌석 뒷편을 뒤지던 그녀가 이내  안에서 자그마한 보따리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저건  뭐하는 물건일까.

솟구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척을 하면서도 은근히 그쪽을 힐끔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보따리 안으로 손을 밀어넣고 그 안을 뒤지던 앨리스가 거기서 꺼내든 것을 내 머리 위에 뒤집어씌웠다.

좌석 뒷편에 처박혀 있었던 탓일까. 뭔가가 머리를 덮음과 동시에 먼지가 한웅큼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텁텁한 맛에 그것을 입밖으로 뱉어내고 있자니 머리 위에 강제로 뒤집어쓰게 된 것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몸을 집어삼켰다.

흡사 포대자루에 집어삼켜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 때 수도에서 파견근무를 수행할 때 사교도 놈들한테 납치당하던 주황머리 년의 기분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답답한 느낌에 허우적대고 있자니 뭔가가 몸을 쑤욱하고 잡아당겼다.


덕분에 포대자루처럼 느껴지던  밖으로 고개를 내밀게 된 순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내 몸 위에 강제로 뒤집어씌운 것의 정체는 사제복이었다.


포대자루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사이즈 자체가  원래 몸에 맞춰져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야..'

덕분에 다시 한 번 몸이 줄어들었다는  실감할  있었다.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여기저기가 나풀대는 것이  하늘다람쥐가 된 것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몸도 한결 가벼워졌겠다 어찌어찌 바람만  타면 활강도 가능할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직접 입은 나도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보는 입장에서는 어떻겠는가.


어색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일까. 내게 그걸 입힌 장본인의 얼굴 위로 난감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자기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던 모양.

"으음.."


입술을 살짝 깨문  침음성을 흘리던 앨리스가 대뜸  허리춤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찰칵-


버클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리춤을 따라 둘러져있던 가죽 벨트가 그녀의 손에 잡혀 쭈욱하고 딸려나왔다. 그것을 그대로 내 허리에 휘감은 그녀가 그것을 이용해 펄럭거리던 옷자락을 고정시켰다.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것일까.


아예 로브까지 뒤집어 씌워서 사제복의 옷깃하고 소매부분만 살짝 드러나도록 조치한 앨리스가 살짝 벌어져있던 셔츠 옷깃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렇게 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 제 가슴골 사이에 숨겨놓고 있던 자그마한 주머니를 끄집어낸 그녀가 그 안에서 손가락만한 크기의 병  개를 끄집어냈다.


투명한  안에는 각각 검은색과 갈색의 액체가 반쯤 담긴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둘 중에서 검은색이 담긴 쪽을 먼저 따서 제 입안으로 털어넣은 그녀가 이내 갈색 병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검은색 때 그러했듯 제 입안으로 털어넣더니..

"읍?!"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눈을 뜨고 있던 앨리스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넘겨주는 걸 얼른 받아마시라고 으름장을 놓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굴복한 척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조심스레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런 식으로 제  안으로 털어넣었던 것을 모조리 내게 넘긴 그녀가 꾸욱하고 누르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있으면 누나가 기분 좋은  하게 해줄게?"

야릇함이 듬뿍 배어있는 목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치며 지나가는 숨결에 간지러워하는  어깨를 움츠리니 작게 웃은 그녀가 뒤로 젖혀져있던 후드 부분을 내 머리 위에 푹 뒤집어씌웠다.

덕분에 편했다.


후드가 얼굴 대부분을 가려줘서 대놓고 앨리스를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앨리스가 내게 먹였던 약의 정체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빨갰던 앨리스의 머리칼이 어느새 새카맣게 물들어있었다. 그녀가 들이켰던 병 안에 담긴  찰랑거리던 그 색깔 그대로였다.

덕분에 굳이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도 알  있었다. 지금 내 머리가 어떤 색으로 물들어있을지를.

혹시 모를 디아나의 추적을 대비해서 카트린느가 같이 넘겨준 걸까.


그런 거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쓴 게 과연 좋은 판단일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묵했다.


그러고 있으니 귀경행렬 사이에 낀 차량마냥 느릿하게 움직이던 마차가 이내 완전히 멈춰섰다.


이윽고 울려퍼진 건 똑똑하고 굳게 닫혀있는 마차 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에 반응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니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를 툭툭 두들긴 앨리스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을 열어젖히며  너머 서있던 이를 향해 용건을 묻는 앨리스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약간이지만 불쾌함마저 섞여있는 것이 누가봐도 급한 여정을 방해받은  불쾌해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마차 안을 살피기 위해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던 이로부터 움찔하는 기색이 날아들었다.

여태까지 통제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는 이들만 상대하다가 갑자기 거칠게 나오는 상대를 마주하니 당황한 걸까.


그리고 앨리스는 그런 상대방의 빈틈을 그냥 흘려보낼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주저함으로부터 빈틈을 포착한 그녀는 그것을 득달같이 물고 늘어졌다.

검문 중이니 협조를 바란다는 기사의 발언에는 지금 감히 교국 소속의 마차를 검문할 생각이냐는 식으로, 내 얼굴을 확인해볼 수 있겠냐는 기사의 요청에는 지금 이 분이 누군줄 알고 감히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냐는 식으로 상대방을 손에 쥐고 흔들어대는데 기사의 멘탈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보는 내가 다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증거랍시고 내세운 게  가관이었다.


밤마다 대체 뭘 그렇게 끄적거리나 했더니 저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걸까.

기사를 핍박하는 앨리스의 손에는 누가봐도 교국에서 내려온 듯한 명령서가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이대로 무사히 검문을 통과할  있을 것 같았지만, 앨리스를 상대하고 있는 기사도 은근히 만만치 않았다. 우리 둘에게서 무언가 수상한 냄새같은 거라도 맡았는지 실시간으로 멘탈이 갈려나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어떻게든  얼굴을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듯 끝끝내 물러서질 않는달까.

지금이야 초반의 우위를 이용해 앨리스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지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금방 그 반대가 될  뻔했다.

그래서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조심스럽게 걷어울렸다.

전부 벗지는 않고 얼굴하고 사제복의 옷깃 부분만 살짝 드러나도록 걷어올렸더니 앨리스와 드잡이질을 벌이던 기사의 눈동자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살짝 커지는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걷어올렸던 후드를 다시금 뒤집어썼다. 그러자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아..'하고 아쉬움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던 상황을 해결하는데에는 말이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영 맥을 못 추는 것이 정신이 다른  가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이라도 되었던 것인지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검문을 피해 빙 돌아서 움직이느라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페이스를 벌충하기 위해 밤길을 내달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렇다할 조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밤길을 내달리고 있는 것치고는 굉장히 쾌적한 움직임을 선보이던 마차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거칠게 멈춰섰다.


갑작스러운 마부의 행동에 말들도 놀랐던 것일까.

히히힝하고 말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꼭 단말마처럼 울려퍼졌다.

 품 안에 가둬놓고서 약속했던대로 기분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가 졸지에 반대쪽 좌석에 머리를 박게된 앨리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마부한테 항의라도 할 생각이었던 걸까.

표정을 구긴 채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앨리스가 대뜸 표정을 굳혔다.

마차 문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횃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레이시아인지 디아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추적의 손길이 마침내 이쪽의 목덜미까지 도달했다는 걸.

어느 정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솔직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저들은 보낸 건 누구인지, 그리고 앨리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생각인지가 말이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더니..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입술을 까뜩 깨물고 있던 앨리스의 표정이 악독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선택은..


"잘 들어."


날 협박하는 것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연기한 걸 폭로당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에게 협력해라.


자신은 절대 혼자 죽지 않을 거라면서 열심히 으름장을 놓는 앨리스로 하여금 보란듯이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겁 먹은 척을 하고 있으니 앨리스가 이내 가슴골 사이에서 예의  약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보관하고 있던 환을 꺼내 내 입안에다가 쑤셔박았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손가락 끝에서 뭉개진 것들이 그대로 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내게 약을 먹인 앨리스가..


"뭐야? 왜들 이리 몰려오셨을까?"


내 손을 잡아끌며 마차 문을 밀어젖혔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 위에 떠올라있던 초조한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대신 뻔뻔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태연자약한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앨리스의 손에 이끌려 마차를 벗어나게 된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시아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한채 앨리스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디아나.

그 둘을 필두로 한 이들이 마차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살짝 의외였던 건 그 사이에 주인공 놈도 섞여있다는 점이었다.

카트린느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대신해 추적조에 가담하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둘은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카트린느 입장에서 저놈만큼 부탁하기 좋으면서도 믿을만한 상대도 또 없었겠지.

아니, 그래서 이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네~? 다들 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허겁지겁 몰려오셨냐니까요?"

웃음기어린 목소리와 함께 앨리스가 주변에 있는 이들을 상대로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내 몸을 제 품안으로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순간 등에 와닿은 딱딱한 것은 아마도 앨리스의 허벅지에 채워져있는 비도들 중 하나였겠지.


다른 것들에 비해 묘하게 또렷한 그것의 감촉을 느끼면서 속으로 가늠해봤다.


'뽑을 수 있으려나.'

어찌어찌 저걸 뽑는데 성공한다 치더라도 찌르는 건? 힘이라고는  한톨도 느껴지지 않는 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팔로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할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려해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미수에 그치든 절반에도  미치는 성공이든 어찌되었건  눈 부릅뜨고 지금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이에 앨리스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내가 원했던 일이라는 식으로 포문을 연 그녀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는 식으로 응수하고 나선 디아나와 레이시아의 멘탈을 단 한 마디로 완전히 부숴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죠. 제가 다 말해줬거든요."


"..뭐?"

"선배가 이안한테 한 짓도, 회장님이 이안한테 하려고 했던 짓도 전부-"


처음부터 동요를 내비친 디아나에 비하면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레이시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다 말해줬다는 소리죠."

그렇게 둘을 패닉 속으로 밀어넣은 앨리스가 다시금 입을 털기 시작했다.


진실을 들려줬더니 더이상 수도에 있고 싶어하지 않아했고, 자신은 그런  바람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학원과 관련된 일은 교국에 도착한 다음에 교단 측의 입회 하에 혼인절차를 밟는 식으로 처리하려고 했으며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즉흥적으로 쥐어짜낸 것치고는 꽤나 그럴 듯한 시나리오가 앨리스의 입을 통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이만 보내주시죠? 이안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면서요?"


그리고 그 시나리오의 결론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니들이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이만 우리를 보내줘라.

앨리스의 발언에 디아나와 레이시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술을 꾸욱하고 깨무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침묵에 빠져있던  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였다.


지금까지 들은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쳐도 이것 하나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그녀가  향해 화살을 돌렸다. 앨리스와의 도피행이 정말 내 소망 하에서 벌어진 일이 맞다면 그렇다고 말해달라고, 그러면 자신들은 깔끔하게 물러나겠노라고.

물론, 디아나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일까.

디아나가 앞으로 나서려했지만 레이시아 쪽이 한 발 빨랐다. 레이시아의 손이 위로 올라간 순간 디아나의 양옆에 서 있던 이들이 나서서 디아나를 제지했다.


그런 식으로 디아나를 제지한 레이시아가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정말이냐고 그리 묻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 뒤로 따라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디아나의 것이었다. 그녀는 레이시아가 동원한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도 이쪽을 향해 간절하기 짝이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려꽂힌 것은 날 끌어안고 있던 앨리스의 것이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깨를 감싸안고 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그것이 몸을 꾸욱하고 짓누르는 느낌이 꼭 아까 말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너도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거라고 으름장이라도 놓는 듯 했다.

그러면서 허벅지를 이용해 은근히 내 물건을 자극해대는 것이 잘만 협조한다면 좋은  해주겠다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들었지? 이안?"


복잡하기 그지없는 몸짓에 비해 귓가로 울려퍼진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앨리스의 목소리 속에 깃들어있는 미약한 떨림을.


"네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으시겠다네?"

그러니 많이 힘들겠지만 한 번만 부탁한다는 것처럼 앨리스가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날 디아나와 레이시아를 향해 돌려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야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 깨달았다.


할 거라면 지금이라고.


그래서 손을 움직였다.

미리 파악해둔 곳을 향해서 뻗은 손 안으로 아까 등을 타고 올라오던 딱딱한 감촉이 감겨들었다.

사악-

뱀이 바닥을 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불길하기 짝이 없는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을..

그대로 내 배에다가 박아넣었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 쪽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몸이 제멋대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야 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으로 부릅 뜨인 채로.

그게 마지막이었다.


배쪽에서 올라온 격통과 함께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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