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앨리스 시점****
그 명령이 전해진 건 남부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기별을 받고 평소처럼 명령서를 회수한 순간, 그리하여 손바닥 만한 지령서 안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한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신탁의 남성에 가까워 보이는 이들에 대해 보고하라는 내용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얼굴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뿐이라면?
그에 대해 적어서 제출하기만 하면 끝날 일이다. 잠복을 한답시고 며칠이고 밖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필요도, 타겟을 어떻게 목적지로 유인할 수 있을까 생각해내기 위해 골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었다. 그저 펜을 손에 쥐고 빈종이에 몇 번 끄적이기만 하면 될테니까.
그 정도로 쉬운 임무였다. 아마 그걸 받아든 게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이안에 대한 것을 휘갈겨 써서 제출한 다음에 룰루랄라하며 농땡이를 피우러 갔겠지.
그래,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일 것이고.
평소에 수행하던 것에 비하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임무인데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확신이 없었고,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이안에 대해서 제출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윗선으로 흘러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이안에게 뭔가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고.
문제는 멈칫한다 해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멈칫할 때마다 교육받을 때는 정말 되도 않는 개소리라고 생각하며 흘러넘겼던 말들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며 그 안을 제멋대로 헤집어댔다.
자꾸만 이안을 찾아갔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안의 얼굴을 보면 확실해질 것 같았으니까. 어느 쪽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것이 한 방향으로 딱 굳어질 것 같았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이안을 찾아갈 때마다, 그리하여 그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번잡하기 그지없었던 머릿속이 정돈되는 것같았으니까.
교국은 분명 고마운 곳이었다. 뒷골목 바닥을 구르던 자신을 건져올려 주었으니까. 이안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교국 측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덕분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돌아갈 집처럼 소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이안은 달랐다.
소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 이후 처음으로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니까.
이안이 자신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마음이 아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참고 기다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아는 이안이라면 기억을 되찾자마자 자신을 찾을테니까.
그래서 이안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안이 몰래 학원을 빠져나가 디아나 고 년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 와중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순간 마음 속에서 뭔가가 삐걱하고 파열음을 내며 살짝 비틀어졌다. 그와 함께 드러난 건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숨겨놓았던 자그마한 균열이었다.
슬며시 드러난 그곳을 통해 시커먼 것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이안에게 있어 자신은 언제나 '두번째'였다.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할 때도, 월말 평가를 치룰 때도 이안의 시선은 자신보다는 늘 디아나 그 년한테 머물러있었다.
당시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때는 이안이 그렇게까지 신경쓰이지 않았으니까. 감정의 크기를 어떻게 재단할 수 있겠냐만은 분명 그 때 자신이 이안을 상대로 품고 있었던 건 '관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초원을 헤매던 이안을 발견해서 구해낸 것도 자신이었고, 그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었던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은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 한 군데가 망가져버린 인간을,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하게 망가진 인간 뿐이니까. 제대로 된 고난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을 년들이 과연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척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관계는 결국 파탄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안의 옆에 있는 건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옆을 차지하고 있다면 거짓된 관계가 파탄나면서 그가 또다시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테니까.
그 점을 고려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안을 디아나 고 년하고 떨어뜨려놔야만 했다.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중에 기억을 되찾았을 때 이안이 받게 될 상처 또한 깊어질테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 둘을 떼어놓을 수가 있을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런 일이 가능할까.
기회라는 놈은 예전에 뒷골목에서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갑자기 눈앞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번에는 좀 많이 뻔뻔했다.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이안의 옆에 있는 걸 허락해주겠다고 지껄여대는데 자꾸만 실소가 새어나오려고 해서 참는 게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대체 누구 마음대로 자신을 두 번째라고 단정짓는 걸까.
그리 결정한 것이 이안이라면 화는 나고 섭섭할 지언정 이토록 반발심이 치솟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인의 마음이 그러하다는데 어쩌겠는가?
그에 비해 눈앞에 있는 년은 대체 무슨 근거로 저딴 말을 지껄여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딴 말들을 지껄여대는 것일까.
이안이 가장 힘들 때는 뒷짐지고 아무 것도 안 했던 주제에 일단 디아나 고 년을 떼어내기만 하면 이안이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는 태도가, 자신은 첫 번째가 될 것이고 이쪽은 당연히 그 후순위가 될 거라고 이미 단정지은 듯한 모습이 심히 눈에 거슬렸다.
너무 눈에 거슬려서 맘같아서는 저 아리따운 상판을 곱게 갈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저런 자신감을 갖는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는 타입이었으니까.
눈앞의 여자는 말이다.
지위도, 얼굴도, 몸매도, 심지어 행동거지하나 마저도 완벽하니 당연히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평민 남성에 불과한 이안을 손에 넣고 주무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테니까.
그 점을 고려하면 지금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제 지위를 가지고 찍어누르기만 하면 끝날 일이니까.
반발?
디아나 고 년은 당연히 반발하겠지만 다른 곳은 잠잠할 것이다.
자신은 상관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다음 대 왕위가 확정된 인물하고 척을 지고 싶은 머저리는 없을테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건 아마도..
'하.'
노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
음습한 냄새가 났다. 노리고 있는 게 대충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보나마나 선역을 노리고 있는 거겠지. 결정적인 순간에 딱 나타나서 위기에 빠진 남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그런 역할 말이다.
확실히 계획대로만 된다면 효과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속에 든 것이 어찌되었건 간에 겉모습 하나만큼은 완벽하니까. 그런 여자가 위기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온다면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남자는 드물 터.
노리고 있는 게 그거라면 이쪽이 맡게될 역할이야 뻔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게는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역할보다는 그런 역할이 더 잘 어울렸으니까.
그게 뭣같아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쪽의 감상과는 별개로 이안의 곁에서 디아나 고 년을 떼어낼 수만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해서 어디 뭐라고 지껄이나 한 번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랬더니 귓가로 울려퍼진 건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디아나 그 년한테 이안을 빼앗기고 나서 뭘 하면서 지내나 했더니만 그 카트린느라는 년하고 짝짜꿍을 하면서 이런 거나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이건.."
보란듯이 늘어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어들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면 될지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며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지금의 상황이 이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그가 진짜로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디아나의 곁에 있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처음만 하더라도 그게 말이 되냐면서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던 자그마한 가정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한 가정이 머릿속을 차지한 탓일까.
바로 조금 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묘하게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학원을 빠져나간 이안이 무사히 디아나의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부분같은 게 그랬다.
너무 작아서 확신까지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기묘한 위화감이 머리를 콕콕 찔러댔다.
그래서..
'확인해보자.'
결정했다. 이왕 저쪽의 계획에 한손 보태기로 마음먹은 김에 이 기회를 빌어 한 번 확인이나 해보기로.
그를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확실하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머릿속을 콕콕 찔러대는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 사실은 자신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 전보다 더 확실하게 이안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이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순간 그대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닐 거야.'
아닐 거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자신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저쪽이 세운 계획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척을 했다.
"마차하고 마부는 이쪽에서 준비할게요. 그쪽에서 준비하면 쉽게 추적당할 가능성이 크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결국에는 이쪽이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레이시아의 저 자신감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득이었다. 저것 덕분에 의심받는 일 없이 이쪽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계획에 끼워넣을 수 있었으니까.
'만약에..'
이안이 자신을 배신한 거라면, 자신을 속이고 있던 거라면 마땅히 그 댓가를 치루게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를 아프게 하거나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여러가지 길 중에서 자신으로 통하는 길만 제외하고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들을 모조리 부숴버린다면, 자신 외에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면 결국 자신을 택할 수밖에 없을테니까. 그럼 자신에게 그가 그러하듯 그에게도 자신이 첫 번째가 될 수 있겠지.
판과 계획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에 약속 장소로 나온 이안을 빼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에 이쪽을 향해 던진 배신감어린 눈빛이 꽤 아프긴 했지만, 가슴 안쪽에서 올라오는 욱씬거림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까.
그래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안을 미리 대기시켜놓은 마차로 옮겼다. 그렇게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부터는 신기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일단 먹이기만 하면 된다길래 수면제 비슷한 것이겠거니 했는데 시간을 뒤로 돌리듯 사람의 몸이 줄어드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중간에 한 번 멈춰서 갈아입힐 옷도 구해야만 했다.
헐렁하게 변해버린 옷대신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히고 나니 눈앞으로 등장한 건 그 이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병약하고 가녀려보이는 인상의 미소년이었다.
그 모습이 눈으로 박혀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며 배 안쪽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고의적으로 엎어져있는 이안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하고 끊어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걸 막기 위해 눈을 돌렸던 것인데 한 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감각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것을 진정시켜보려고 심호흡도 해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갈증은 더 강렬해졌다.
목이 탔다.
모래라도 한웅큼 씹어삼킨 것마냥 목 안쪽이 거칠거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있는 이안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그렇지만 꾹 눌러참았다.
일단 한 번 닿게 되면 뭔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치밀어오르는 감각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이 깨어났다.
그래서 자꾸만 새어나오는 초조함을 다시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면서 미리 준비해둔 함정 속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내심 그가 거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길 간절히 기도했는데..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기대했던 것하고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제서야 납득이 좀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 이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짐과 동시에 꾹꾹 억누르고 있던 것이 일제히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