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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126)화 (126/366)



〈 12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역시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려운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아니면 지금의 디아나에게는 애정어린 섹스가 선물해주는 달콤함이 너무나도 각별했던 것일까.

처음의 한 번 이후로 그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제가 날 상대로 느끼고 있는 죄책감같은 감정들을 모조리 덮어씌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디아나는 쉬지않고 날 요구해왔다.


학원까지 빠져가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그짓만 해댄 건 아니었다.

우리 둘다 사람인지라 체력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디아나는 나와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나와  껴안고 가만히 누워 체온을 나누는 것도 좋아했다.  몸 위에 누워서 가슴에 귀를 가져다댄채 콩닥콩닥 울려퍼지는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안정감이 든다나?


문제는 주로 알몸이나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로 그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내쪽에서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먼저 덤벼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그녀 입장에서나 내 입장에서나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방을 빠져나가면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산산조각나서 사라지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디아나는 방밖으로 나가려 들지를 않았다.

학원도, 평소하던 단련도 빼먹고 식사는 집사가 가져다주는 걸로 해결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방 안에 붙어있으려고 하는데..


보는 입장에서 솔직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뭐 한달동안 그런 것도 아니고 이제 고작 삼일 째였으니까.

조금 더 지켜보다가 계속 저러면 그때 가서 손을 쓰면 될 터.


딱 보니까 나랑 떨어지기 싫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정 안되면  꼭 잡고 산책이나 데이트라도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가 레이시아와의 대담 결과를 듣게 되었던 건 그 와중이었다.


"그러라고 했다고요?"


"..응."


입술이 손가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느낌이 영 적응이 되질 않았던 걸까.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일일히 입을 맞추니 흐트러진 금빛의 머리칼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던 자그마한 귀가 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변화를 눈에 담으면서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


레이시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 지가 말이다.


설마 이제와서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이의 남자를 탐내는 게 양심에 찔리기라도 한 것일까.


'에이, 설마.'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어차피 그 상황에서  수 있는 말도 딱히 없었을테니 말이다.


"확인하러 온다고 하셨다구요?"

"응.. 네가 잘 지내는지 보러 온다고.."

아까보다 목소리가 살짝 작아진 것이 누가봐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게 티가 확 났지만 모르는 척 해줬다.

그나저나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오겠다라.


그렇다면 아마 뭔가 일을 벌인다면 십중팔구 그때가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일을 벌이냐는 건데..

'대놓고는.. 아마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었다.

대놓고  납치하거나 그런다면 디아나가 가만히 있을  없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무슨 방법을  생각인 걸까.


나름대로 추측해봤지만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그.. 이안.."


디아나가 갑자기 날 불러왔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일까.

해서 상념 속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아, 아까부터 뭐가 자꾸 엉덩이를 찌른다만.."


 상태로 수줍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것이 뭘 원하는 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그에 싱긋 웃으며 물어보았다.


"싫어요?"


그래서 싫냐고.

"그,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귀여운 그녀지만 특히나 귀여운 점을 손에 꼽자면 바로 저것이었다. 자기 쪽에서 먼저 요구하는 걸 굉장히 부끄러워 한다고 해야할까.


지금도 봐라.


이 세계의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진작에 '야!  번 하자!'라고 말하면서  위에 올라타고도 남았을텐데 그러는대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눈치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살짝 촉촉하게 젖어든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데..


"그런 게 아니면요?"


그렇게 묻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나는.."


귓가로 울려퍼지는 당혹감이 듬뿍 배어든 목소리를 만끽하면서 조심스레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이미 몇 번이고  손을 받아들인  있는 그녀의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서 이미 살짝 젖어있는 균열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톡 건드렸다.


애무는 하지 않고 내가 그곳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정도로 가볍게 툭툭 건드려가면서 빨갛게 달아올라있던 디아나의 뺨에 대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난 하고싶은데."


그러자 내 품안에 쏘옥하고 들어와있던 디아나의 몸이 흠칫하고 떨리면서 촉촉하게 젖어있던 그녀의 균열 사이로 뭔가가 주륵하고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느끼면서 다시금 속삭였다.


내가 이러는  싫냐고.

그러자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격렬하기 짝이없는 도리질이었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격렬하게 도리질을 쳐대는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붙인 채로 쿡쿡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정말 다행이라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행이네요. 이제 디아나 아니면 어디 가지도 못할테니까."

속삭이듯 말하면서 몸을 살짝 빼내 그대로 디아나의 위로 올라탔다.

 말에 또 불안감같은 거라도 느낀 것인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

그것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면서 그녀의 왼손을 잡아  입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왼손 약지에 대고 가볍게 입술을 누른 뒤에..

"그러니까 책임져줄거죠?  이렇게 만든 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마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디아나의 눈동자 속으로 수많은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그런 눈을 한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녀가 마침내 내놓은 대답은..

내 목을 팔로 휘감고 제쪽으로 끌어당겨서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레이시아로부터 내 상태를 확인하겠다는 연락이 날아든 것은 그런 식으로 디아나와 행복하기 그지없는 한때를 보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네 저택에서는 혹시라도 이안이 압박감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으니  그렇고 따로 장소를 마련해둘테니 그곳으로 나오면 된다면서 사실상 생떼를 쓰고 있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직감했다.

대체 뭘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내 무릎 위에 걸터앉은 채로 나와 같이 도착한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녀로부터 불안함에 젖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이, 이안.."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부르는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번에는 저쪽에서 맞춰줬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저쪽의 뜻에 맞춰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뉘앙스로 말하니 무어라고 말하려던 디아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뜻이 시선을 통해 전해졌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는 더이상 날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 생겨도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갖출 뿐.


그리고 마침내 저쪽에서 편지를 통해 통보했던 날이 도래했다.


디아나는 내가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동행하고자하는 의지를 밝혔지만 내쪽에서 거절했다. 편지에는 디아나가 동행해선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달라붙는 그녀를 떼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저택을 빠져나와 약속장소로 향하는 동안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다.


저쪽에서  준비했을지를.

'아무리 그래도..'

막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진짜로 디아나와 싸우겠다는 뜻이니까.

 납치해서 어딘가에 가둔다거나 하는 과격하기 짝이없는 짓같은 건 어지간해선 저지르지 않을 터.


그렇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하나뿐이다.

학원과 관련된 문제를 빌미로 드는 것.

아마도 그걸 핑계로 댈 확률이 높겠지.


레이시아의 사저 안에서 생활할 때야 사실상 학원을 관리하는 주체가 그녀라서 그와 관련해서 손을 쓰는 것이 가능했을 뿐더러 강의나 훈련같은데에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더라도 일단은 '학원'내에 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강의와 훈련을 빠지는 건 물론 생활또한 학원 밖에서 하고 있는 상태다.


그쪽에서 그걸 빌미로 내세운다면 이쪽은 일단 거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서 생활하는 것은 성인된 남성의 의무니까.

'의무를 저지르면 바로 얄짤 없이 공창행이라고 했었나..?'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도주'한 케이스에 한해서고 내 경우에는 이래저래 일도 있었던만큼 그 부분을 참작해서 아마 거기까지 가지는 않을테지만..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겁을 주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터.

특히나 지금처럼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굳게 믿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일단 그런 식으로 내게 겁을 줘서 알아서 학원으로 기어들어오게 만든 다음에.. 그 다음에 손을 쓸 생각이지 않을까.


물론, 그리 된다면 디아나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

하지만 손을 쓰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학원에서 합법적으로 빼낼 수 있는 수단은 결국 결혼 하나 뿐인데 디아나의 성정상 거기까지 도달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테니까.


지금은 많이 잠잠해진 양심이 차마 거기까지는 허락치 않을테니 말이다.


설령 그녀가 어찌어찌 거기까지 도달했다 할지라도 레이시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고.


'대충 그렇게   같은데..'

뭐, 기든 아니든 간에 일단 약속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확인할 수 있을 터.

해서 마차가 멈춰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째 익숙하게 느껴지는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순간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외관을 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허.'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노리고 여길 택한 건지 아니면 여기만큼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악취미다 싶었으니까.

하필이면 내가 디아나에게 마지막을 고하며 망토를 돌려주었던 곳을 약속 장소랍시고 잡아놓을 줄이야.


디아나가 가게 이름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약속 장소가 이곳이라는 걸 알아봤다면 내가 나가는 걸 기를 쓰고 막았을 거다. 그리고 나서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든 했겠지.

그 점을 고려하면 알고서 일부러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여기 오게 되면 내가 뭔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레이시아 입장에서는 그 얼마 안 되는 가능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거..'


아무래도 표정관리에 주의해야할 것 같았다.


저쪽에서 누가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레이시아가 나왔다면 자칫 잘못하면 위화감을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


해서 표정을 다잡으며 디아나가 붙여준 이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이안!"

날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살짝 몸을 일으킨 채 이쪽이라는 것처럼 손을 흔드는 앨리스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저쪽에서 내보낸 사람이 앨리스라는  확인한 순간 그나마  안도할  있었다.

따지고보면 레이시아, 카트린느, 앨리스  중에서 가장 정상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앨리스니까. 그녀가 나온만큼 막 나가거나 그러는 일은 거의 없을 터.

그래서 안심하고 그녀와 마주앉아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오는 그녀를 상대해가며 자연스레 근황을 주고받았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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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어?'

어느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하더니 몸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몸을 가누려고 하면 할수록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정신이 꼭 마치 어딘가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엄습해왔으니까.


자꾸만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어떻게든 눈의 초점을 맞춰보려고 눈에 힘을 바짝 줘봤지만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졌다. 그리고 흐릿해져가는 시야 끝에서 누군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와중이었다.

"이제야 약효가 좀 도나보네."

내가 알던 앨리스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있는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물거리던 시야가 암전하며 의식이 그대로 툭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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