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23)화 (123/366)



〈 12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그래, 그렇게  거였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너였구나. 네가 한 짓이었구나.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안이 그럴  없지.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얼마나 신경써줬는데 말이다.


이제서야 개운치 않았던 부분이 명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찾아든 것은 헛웃음이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신을 찾아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헛웃음만 피식피식 짓고 있으니 이어서 들려온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보호할 생각입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야?"

'보호'라니 그딴 짓이나 저지른 네가 그런 말을 지껄일 염치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진심으로 그렇게 지껄이는 거냐고.


그로인해 피어나게될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다행히 아직 염치를 완전히 내다버린  아니었나 보다. 무어라고 반박을 하는 대신 입술을 꾹하고 깨무는 모양새가 누가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다음부터는 쉽다. 저 흔들림을, 그로인해 생겨난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최대한 벌려놓기만 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알아서 토해낼테니까.

자신이 아는 디아나는 그런 아이니 말이다.

그래서 곧바로 그곳을 찌르고 들어가려 했다.

꾸욱하고 닫혀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사이에서 잔경련과 함께 튀어나온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안이 그걸 원합니다."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 머릿속으로 재생되기 시작한 건 불과 며칠 전에 봤던 광경이었다.

기억을 잃었음에도 자연스럽게 디아나를 향해서 다가가는, 디아나를 걱정하던 이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것의 존재를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서 있는 둘의 모습이, 울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자신이 다 아프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이안의 모습이 이곳에 다른 이들이 끼어들 자리같은 건 없다고 속삭이는 듯 했으니까.


그래서 부정했다.


있는 힘껏 부정했다.

운명이라니 그딴  있을 리 없으니까.


기억을 잃었음에도 이안이 디아나한테 관심을 보인 건.. 어디까지나 몸에 새겨진 기시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이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게 바로 디아나니까. 향기 때문이든 모습 때문이든 간에 당연히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부정하려 했는데..

"이안이.. 그랬습니다. 제 옆에 있고 싶다고."


저 말을 들은 순간 그럴 수가 없어졌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저건 보나마나 사실일테니까.


디아나의 성격상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건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봐온 사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더욱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참아야만 했다.

누군가와 싸울 때 약점을 함부로 내보이는  머저리나 하는 짓이니까.


그래서 울컥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것을 있는 힘껏 내리눌렀다. 내리눌러서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는 다시는 드러나지 않도록 깊숙한 곳에 파묻었다.


쉽지는 않았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익숙치가 않은 탓에 그것들을 다루는 게 말만큼 쉽지만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했다. 해야만하는 일이었기에, 절대로 실패해서는  되는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동요를 감춘 뒤에..


"그러니 저번에 말씀하셨듯 이안이 바라는대로.."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초조해보이는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바람대로 하겠다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자신의 반응이 의외였던 것일까.

초조함으로 물들어있던 얼굴이 움찔하며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화악하고 밝아지기 시작하는 그것을..


"그런데 말이야."

곧바로 찌르고 들어갔다.

"이쪽에서 이안의 상태를 확인하러 찾아가도 상관없겠지?"

네게는 '전적'이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이해해달라는 투로 내뱉으니 나름 결심같은 것으로 굳어져있던 얼굴이 크게 흔들리는 꼴을 볼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부러 콕 찝어서 언급했으니 디아나의 성격상 어지간해서는 이안의 몸에 손대지 못할테지. 양심이 그걸 허락치 않을테니 말이다.

제가 분에 못이겨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가 상당히 뼈아팠던 모양이다.

"..예."


꾸욱하고 입술을 짓씹은 디아나가 초조함인지 양심의 가책인지 모를 것으로 덜덜 떨리는 손끝을  머리를 향해 가져갔다.

그렇게 뻗어져나간 손가락이 머리를 하나로 모아주고 있던 익숙한 모양새의 머리끈에 닿은 순간 그곳에 깃들어있던 떨림이 차츰 잦아드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거였구나.


네 부적이.

네 약점이.


네가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있게 해주는 믿음의 근원이.


그렇다면 당연히..

"어, 뭐야 오늘도 차고 왔네?"

그것부터 부숴줘야겠지.


"그 머리끈 말이야."


제 자신감이나 다름없는 것을 언급하니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꽤 귀여웠다. 너무 귀여운 반응이라 우스울 정도였다.

지적당하자마자 그렇게 화들짝 놀랄 거라면 애초에 드러내질 말던가.

저렇게 애지중지한다는 걸 드러내면 그것부터 부숴달라고 광고하는 꼴 아닌가.

"잘 차고 다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직접 고른 보람이 있어."


그리 말한 순간,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물음표였다. 이쪽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바로는 알아듣지 못한 걸까. 그렇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될테니까.

그래서였다.

"아, 혹시 몰랐어..? 그거 내가 고른 건데."


디아나의 반응을 '그렇게' 오해한 척 그리 말했던 것은.


일단은 믿음의 상징부터 부숴준다.

그리고 그로인해 흔들리기 시작하면..


"정말 몰랐나 보네.."

그렇게 드러난 틈에 의심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심어준다.


그래서였다.


아차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던 것은.

물론, 씨앗이니만큼 그게 당장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지만 나중이라면 어떨까.


"아무튼 잘 차고 다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고른 보람이 있네."

그래서 그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그걸로 충분했다. 디아나는 이미  번 의심을 해본 전적이 있으니까.

원래 의심이라는  그렇다.

아예 해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다면 상대방을 믿어보려고 해도 자꾸만 고개를 치켜드는 게 바로 의심이라는 놈이니까.


방금 심어둔 씨앗은 그것에 힘입어 머지않아 쑥쑥 자라날테지.

그렇게 자라난 것이 딱 한 번만 힘을 써주면 된다.

 번만 더 실수를 저지르면 디아나는 거기서 완전히 끝나버릴테니 말이다. 아마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알아서 나가떨어질 터.

그러니까..


"아무튼 그렇다니 기사들을 다시 불러야겠네."

오늘은 이만 물러나자.

그러기 정말 싫지만 참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거니까.

머릿속에서 뭔가가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는 게 느껴졌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지금은 깔끔하게 물러나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래야 디아나가 제 안에 뭐가 자리를 잡았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 아닌가?

당장은 끔찍할 정도로 싫더라도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독이면서..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예..? 아, 네."


"그럼 돌아가 봐. 나도 이만 쉬어야겠으니까."

그리 말했다.


피곤하다는 것처럼 몸을 살짝 늘어뜨리면서.

물론, 말은 그리 했지만 디아나가 돌아간들 편히 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이 이토록 술렁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데 어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디아나를 돌려보내고 난 후에..


그녀에게 말했던대로 이안을 찾으라고 내보냈던 기사들을 다시금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다시 내보냈다.

혼자서 상대가 벅찬 상대라면?

협력자를 구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들하고 전리품을 공유해야할테지만..

'상관없어.'


상관없다.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건 자신이 될테니까.


그리  수밖에 없도록 만들테니까.

'그 전에..'

이안의 나쁜 버릇도 조금 손을 봐둬야겠지.

그렇게나 신경을 써줬는데 기회가 생기자마자 디아나한테 쪼르르 달려가다니,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하다니 참으로 괘씸하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공동전선을 펼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래서였다.


불러들였던 기사들을 다시 내보냈던 건 말이다.


시간대가  많이 이르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이안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그들도 사양하지 않고 달려올 터.


그러니 지금 당장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기다리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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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시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머리끈을 고른  이안이 아니었다니.

머리에 매달려있는 것이 유달리도 무겁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렇게나 힘을   있었던 건 이안의 격려도 격려지만 머리끈 덕분도 컸다. 이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일종의 부적같은 것이었으니까. 자신에 대한 이안의 마음과 노력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헌데 실은 그게 가짜였다는 말을 들어버리니 가슴 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발이 닿는 곳마다 그곳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무사히 학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문의 마차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건  그대로 천운이었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타서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일단 해결하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임에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택에서 출발할 때보다 더 복잡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저택에서 출발할 때 떠안고 있었던 것하고는 다르게 당장은 해결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이걸 해결하고 싶다고 이안을 찾아서 질문을 던진들?


돌아오는 건 의문섞인 대답뿐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에게는 기억에도 없는 일일테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가슴 어림이 꽈악하고 죄어들며 답답하다는 느낌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머리에 매달려있는 걸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려봤다.

아까는 그렇게 하니까 답답하고 초조했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는데..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던 것이었는데..


아까하고는 다르게 전혀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답답해지기만 했다.

그와 함께 머리카락 쪽에서 전해져오던 무게감이 한층 더 묵직해졌다.


너무 무거워서 부담이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지 않았던 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자꾸만 마음 속으로 의심이라는 것이 고개를 치켜드는  사람 심리상 어쩔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안은 늘.. 자신이 얻은 지명권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는데 사용했겠거니하고 지레짐작하고 넘기곤 했었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만에 하나  지명권들이 모조리 다른 곳에 사용된 거라면..


불길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그곳을 헤집어댔다.


그래서 그걸 털어내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저택에 도착할테니까.

이런 고민에 젖은 얼굴을 이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분명 이안은 무슨 일이냐면서 걱정을 해올테니 말이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를 의심이나 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그런 걱정을 받을 자격같은 건 없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어찌어찌 그것들을 얼굴 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정돈된 표정으로 이안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를 마주하고 다 잘 해결됐다고, 그러니까 더는 걱정할 필요없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뒤돌아서 서 있는 그의 손에 쥐어져있는 것을 목도한 순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옷장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것을 이안이 손에 든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 위에 직접 새겼던 것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고 있는 걸 확인한 순간..


표정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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