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잘그락-
흰색의 옥을 깎아서 만든 것들끼리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꼭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것만 같았다. 쿠웅쿠웅하고 심장이 느릿하게 뛰며 불길한 울림을 자아냈다. 그 와중에도 이안의 시선은 손끝에 걸린 머리끈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꼭 마치 그것으로부터 모종의 이끌림이라도 느낀 것처럼.
그 모습이 자꾸만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네가 그것으로 인해 뭔가를 떠올리게 된다면,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네가 괜찮아졌다는 사실에 기뻐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나 달콤한 시간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사실에 좌절해야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도 없었다.
이안이 기억을 되찾은 순간 자신은 그걸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런 물음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였다. 이안을 향해 질문을 던졌던 것은.
"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동요를, 불안감을 이안이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했다. 그래서 최대한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말을 내뱉어봤지만 그렇게 입밖으로 튀어나간 목소리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형편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맘같아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머저리같이 그 간단한 것 하나조차 못하다니.
그러지 않았던 건 이안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 덕분이었다.
"아니, 그냥.. 은근히 귀여운 취향이신 것 같아서요."
귓가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뭍으로 건져올려진 물고기마냥 발치까지 떨어져 펄떡거리던 심장이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슬펐다. 네가 선물해준 거라고 한 마디를 못하는 자신이, 그 한마디로 인해 이안이 뭔가를 기억해낼지도 모른다는 걸 두려워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역겨우면서도 슬펐다.
그렇지만..
"그래도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이걸로 할까요."
옆에 네가 있으니까.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옆에 네가 있다면 쓰러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중간에 걸릴세랴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 거기서부터 느껴지는 애정이 용기를 복돋아주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머리끈이 머리에 채워진 순간.
"다 됐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떠오른 순간, 비로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오마."
"앗, 잠시만요."
또 뭐가 남은 걸까.
돌아서다가 말고 그대로 멈칫하니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걱정이 되기라도 했는지 이안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리고는 살짝 구겨져있던 넥타이를 잡아당겨 빳빳하게 펴주더니..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얄쌍해진 팔이 몸을 꼬옥하고 감싸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멈칫했던 것도 잠시, 바짝 다가온 이안의 향기에 얼굴로 피가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하고 귓가로 울려퍼지는 심장소리와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화끈거려서 그대로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금방 오실거죠?"
"그,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요."
혼자 남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참고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 얼굴이, 뭔가를 꾹 눌러 참으면서 억지로 지어보인 듯한 그 미소가,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다가 억지로 떨어뜨린 것같은 손길이 다시 한 번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래서 곧장 학원으로 향했다.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인 탓일까. 학원은 여전히 새벽의 어둠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가 내뿜는 빛이 조심스레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게 꼭 지금 자신의 마음 속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혼란스러웠으니까.
사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라오면서 뻔질나게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기사의 덕목은 충성이지만 우리의 덕목은 순종이다.
-그러니 너도 왕녀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설령 왕녀 님께서 널 친우라 여긴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위치를 착각해서 그분과 맞선다거나 그래선 안 된다.
몇 번이나 들어서 이제는 완전히 머릿속에 새겨진 말을 지금 자신은 어기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은 그걸 어기려는 시도도 생각도 해본 적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해야만 했다. 해내야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있어 지금 머리에 매달린 채 달랑거리는 물건의 존재감은,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이안의 흔적은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그것이 조심스럽게 전해주는 온기를 느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레이시아가 머무는 사저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온 순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마냥 불이 환하게 밝혀진 그곳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상대가 이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상태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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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 시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유달리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볼 때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분명 피곤하긴 한데 자려고 누웠음에도 잠이라는 놈은 찾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잠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마냥 이렇게 누워있는 것보다는 따뜻한 거라도 마시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으니까.
시녀를 호출하기 위해 침대 옆에 달려있는 것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말고 멈칫했던 것은 지금쯤 옆옆방에서 곤히 잠들어있을 한 사람이 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해서 시녀를 부르는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끼이익-
닫혀있던 문을 밀어젖히니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있던 복도 안으로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전하?"
살짝 졸고 있었던 걸까. 문 옆에 서 있던 호위기사에게서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 날아왔다. 그래서 그쪽을 돌아보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붙였다.
쉬이-
다행히 이쪽의 뜻을 알아준 것일까.
"그.. 어쩐 일로.."
뒤이어 흘러나온 호위기사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작아져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뭣 좀 마시려고 나왔다고. 그러자 기사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물음표였다.
하긴 그렇겠지. 이렇게 나올 필요 없이 방 안에 비치되어 있는 줄만 잡아당기면 대기하고 있는 시녀가 다 알아서 해줄텐데 굳이 직접 나온 것이니까.
해서 겸사겸사 좀 움직이고 싶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일일히 설명하긴 귀찮았으니까.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들이키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문득, 아주 문득 이안이 머물고 있는 방쪽에 시선이 갔다.
굳게 닫혀있는 문.
그걸 바라보다가 그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은 것은 어디까지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호위기사로부터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 날아왔다. 이안이 머무는 방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보인 반응도 비슷했다.
그렇지만 싸그리 무시했다.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일따위 저지를 생각 없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이안이 어떤 모습으로 잠들어있을지가.
그래서 편안한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자신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뿐인데..
끼이익-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울려퍼져서 사람을 흠칫하게 만드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고 눈앞으로 드러난 풍경은 상상했던 것하고는 많이 달랐다.
"..이안?"
그곳에는 편히 잠들어있는 이안도, 악몽에 시달리듯 인상을 찌푸린 채 잠들어있는 이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있을 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고가 현실을 따라잡질 못했다.
혹시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장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눈으로 들어온 건 불이 꺼진 채 어둠에 잠겨있는 화장실의 모습이었다. 잠결에 불을 키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을 확률은.. 거의 없겠지.
그렇다는 건?
이안이 이곳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뜻일 터.
비로소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마자 찾아온 건 짙은 색의 의문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분명 감금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선에서 사람을 배치해놨었는데 말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뚫고 나간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에 매달려있던 것도 잠시 깨달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빠져나간 건지를 확인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는 이안을 찾아내야 했다. 찾아내야만 했다. 이곳을 빠져나간 게 그의 자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였다.
혹시라도 그가 깰세랴 일부러 켜지 않았던 불을 환하게 밝히고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방 안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녀들에게 들을 생각이었다. 혹시 무슨 이상한 일같은 건 없었느냐고.
그 다음에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들을 토대로 이안의 행방을 추적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직접 골라 배치한 이들을 방 안으로 불러들인 순간, 그리하여 이안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녀들 앞에 공개된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다른 이들에 비하면 유난히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명의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확 티가 나는 그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안의 실종에 그녀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관이 있다는 걸.
그래서 곧바로 추궁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제 전 근무자가 용변이 급하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적이 있다고 그러긴 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말을 주워섬기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명령했다.
"끌고 와-"
"..네?"
두 번 말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대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빵한 표정을 하고 있던 기사가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방을 달려나갔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명령했다.
"찾아오세요."
이안을 찾아오라고.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으니 찾아서 데려오세요."
"하, 하오나 전하.."
"제가 두 번 말해야 할까요?"
그렇게 사람이 없어졌는데 당장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기만 하던 이들까지 싸그리 방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순간, 이안이 사용하던 침대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역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람을 더 붙여놔야 했던 걸까.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베개 쪽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차가웠다.
바로 조금 전까지 누군가 누워있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대체 언제 빠져나갔길래 이다지도 차가운 걸까.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 때문에 마음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입술을 악물었다. 그 차가움이 꼭 현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느껴지지도 않는 이안의 온기를 억지로 더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들 급하게 뛰쳐나간다고 미처 닫지 못한 문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그새 이안을 찾아낸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 기억도 온전치 않은데 그 상태로 멀리 가봐야 얼마나 멀리 갔겠는가. 분명 방 안에 있기만 답답해서 잠깐 빠져나갔다가 근처를 헤매고 있었던 거겠지.
그런 게 틀림없었다.
그렇고 말고. 이안이 자신한테서 도망치려 들리 없지 않은가?
자신이 그를 얼마나 신경써줬는데 말이다.
그래서였다.
그 소란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쪽으로 향했던 것은.
그렇게 이안을 마주하고 나서 그에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향했던 것이었는데..
"..전하!"
기다리고 있었던 건 예상했던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었다.
자신을 찾다가 호위기사들에게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인지 호위기사들 사이에 갇혀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또 찾아온 걸까.
이 아침부터?
그렇다면 용건이야 뻔했다. 그동안 내세웠던 것과 똑같은 이유겠지.
뻔한만큼 돌려줄 대답도 같았고.
"몇 번이나 말했듯 이안이라면.."
그래서 그대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제발 좀 염치가 있으라는 식으로 핀잔을 줘서 돌려보내려고 했다.
"이안, 찾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 입을 연 순간 디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안이라면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