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맞추고 있던 입을 떼어내고 보니 디아나의 눈꼬리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아.."
떨어져나가는 내 입술의 감촉이 아쉬웠던 걸까.
감겨져있던 그녀의 눈이 스르륵 열리며 그 아래 숨겨져있던 푸른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물기에 젖어서 그런 걸까. 평소에는 푸른색이던 눈동자가 지금은 어쩐지 막 개인 하늘의 색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 눈에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움찔하고 몸을 떨어보였다. 동시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죄,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셨.. 죠? 혹시 싫으셨던 건.."
꼭 마치 디아나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그것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처럼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척을 하니 눈을 슬며시 뜬채 입술을 벌리고 있던 디아나가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아, 아니다..! 나, 나는.. 이건 그러니까.."
뭐라고 말하려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한 번 더 해도 괜찮을까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슬쩍 내리깔면서 그리 말하니 디아나의 어깨가 다시 한 번 움찔거렸다. 내 말에 어떤 식으로 답을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던 걸까. 그새 원래의 빛을 되찾은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고개를 끄덕이자니 양심에 켕기기라도 했던 걸까. 자신은 이런 행복한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역시 싫으셨던 건.."
크게 낙담한 사람처럼 말꼬리와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랬더니..
당황으로 눈동자를 한 번 크게 떤 디아나가 입술을 꾹 한 번 깨물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누가봐도 허락의 의미가 담겨있는 몸짓이었고, 그에 기뻐하는 척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으면서..
"흐읍.."
다시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입을 맞춘 순간 살짝 앞으로 내밀어져있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나지막한 숨소리가 그대로 내 입안으로 빨려들어왔다. 그것을 그대로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키면서..
"흐웁.."
살짝 벌어져있던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어 그 안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아까보다 훨씬 더 농밀하게 입을 맞추면서 아까 전부터 그녀와 마주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실었다. 내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기라도 하는 것처럼 깍지를 낀 뒤에 거기에 꼬옥하고 힘을 주자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 들어와있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 자그마한 떨림이, 이따금씩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신음성과 살짝이지만 울음기가 배어있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맞추고 있는 입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를 밀어넘어뜨릴 기세로 그녀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무게감에 순간적으로 철렁하기라도 한 것일까. 내 허벅지 아래에 깔려있던 디아나의 하체가 움찔움찔하고 경련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흐으.."
나와 그녀의 입술 틈 사이에서 흘러나온 흐느낌이 귓가로 울려퍼지는 게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심장이 쿵쿵 뛰면서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키스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애달픈 모습을 보여줘버리면..
'참기 힘든데..'
진짜 미약이라도 들이킨 것처럼 배 안쪽에서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맞추고 있던 입을 조심스레 떨어뜨렸던 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가면 정말 끝까지 쭉 달리게 될 것만같았으니까.
허나 그래서는 안 됐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아직은 그랬다. 거기에 디아나에게 부탁해야할 것도 있었고.
나중에 처리해도 상관없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꽤 시급하게 처리해야하는 것이니까. 에라 모르겠다하고 뒤로 미뤄놨다가 일이 겉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번지기라도 하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나였다.
그래서 한 발 물러나려던 것이었는데..
"이, 이안.."
아무래도 입을 맞추며 흥분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창백하게 질린 채 초췌한 느낌을 물씬 풍기던 디아나의 얼굴 위로 어느새 혈색이 돌아와있었다. 그것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살짝 불그스름하게 물든 얼굴과 구름낀 하늘마냥 흐릿하게 변한 눈동자.
그런 모습을 한채 날 올려다보며 내 이름을 불러오는 디아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대로 그녀를 꼬옥하고 끌어안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녀를 내 품 안으로 가두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은 채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새벽 특유의 서늘한 공기를 살짝 머금은 그녀의 체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코밑을 맴도는 그 향기가 너무나도 중독적이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쪽으로 잡아당긴 그곳에 코를 파묻었다.
"자, 잠깐.."
내 행동이 당혹스러웠던 걸까. 내 품 안에 갇혀있던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육체가 작게 바르작대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와 맞닿아있는 부분을 통해 전해져오던 심장의 박동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것이 내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이것대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사르륵하고 황금을 녹여 짜낸 듯한 실이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어느새 살짝 거칠게 변한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며 그곳을 따라난 솜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디아나 님.."
내 부름에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던 것일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내 품안에 갇혀있던 것이 흠칫하며 굳어지더니 이내 파르르 경련했다.
"제가.. 디아나 님을 어떻게 불렀었나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호칭이나 좀 정리해두기로 했다. 언제까지 디아나 님, 디아나 님하고 부를 순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리 물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디아나 입장에서는 살짝 답하기 부끄러운 내용이었나 보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다시 한 번 몸을 흠칫흠칫하고 떨어대는데..
그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괜히 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디아나 누나?"
일부러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채 속삭이듯 물었던 것은.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내 목소리가 그리도 자극적이었던 걸까. 디아나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며 깍지를 낀 채 마주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꼬옥하고 힘이 살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혹시.. 디아나?"
그게 결정적이었다.
더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걸까. 놀고 있던 그녀의 손이 어느새 위로 올라와 내 가슴팍을 덮고 있던 셔츠를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간청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서, 선배라고 불렀다."
디아나가 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살짝 헐떡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선배요?"
"그, 그래.."
그러니까 그만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셔츠가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며 구겨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만할 생각은 없었지만.
"음.."
뭔가 이상하다는 기색을 스리슬쩍 내비치니 그런 내 반응에 철렁하기라도 한 것일까.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 들어와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혹시 방금 그걸로 내가 뭔가 기억해내지는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시선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살피는 디아나의 시선에서 살짝이지만 집요함이 느껴졌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내민 손을 잡은 순간부터 언젠가는 그걸 놓아야만 한다는 걸 머릿속에 새기며 내심 각오같은 걸 굳히기도 했겠지만 그녀가 예상한 순간은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을테니까. 이제 막 건져올린 것을 바로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겠지. 내게 있어서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그건 그만큼 디아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가, 내가 선사하는 감정들이 소중한 것이라는 뜻이니까.
"무, 무슨 문제라도.."
아무튼 그래서일까.
내 눈치를 살피며 던져진 디아나의 목소리는 살짝이지만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냥.."
"..."
"마음에 안 들어서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순간적으로 해석이 되질 않았던 걸까. 내쪽을 향하고 있던 디아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건 눈동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다가..
쪽-
가볍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연인끼리 선배가 뭐에요. 거리감 있어 보이잖아요."
그리고는 툴툴거리듯 말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뭔가 불안한 예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잘게 경련하던 푸른색의 눈동자 속으로 짙은 안도감이 왈칵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찾아든 것은 옅은 민망함이었다. 혼자 지레짐작해서 삽질하고 있었던 게 그리도 부끄러웠던 걸까. 안 그래도 흥분으로 살짝 발그레하게 물들어있던 디아나의 얼굴이 한층 더 빨갛게 변했다.
그리고 그 붉음은 어느새 그녀의 귀까지 번져있었다. 덕분에 빨갛게 익어버린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주저하는 척을 하다가 속삭이기 시작하니 어디선가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살짝 긴장한 척 마주잡고 있던 손쪽에 힘을 실으며 그리 물은 순간이었다. 볼부터 귀까지를 차지하고 있던 홍조가 이내 그녀의 얼굴 전체로 폭발적으로 번져나갔다. 아마 효과음같은 걸 넣을 수 있었다면 '펑!'같은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그.. 으으.."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될텐데 디아나는 말 그대로 어쩔 줄 몰라했다. 새빨갛게 변한 제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자길 보지 말라는 것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빨갛게 익은 제 얼굴을 감추던 그녀가 이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함께 얇은 셔츠 위로 전해져오기 시작한 뜨끈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디아나."
그녀의 귀에 대고 그리 속삭여봤다. 그동안 내심 답답했던 부분이 확 뚫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계속 선배선배하는 게 묘하게 낯간지러웠었는데 말이다. 다이렉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반응?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디아나의 귀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속삭인 순간, 내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꼬옥하고 힘이 들어가며 셔츠 위로 전해져오던 뜨끈뜨끈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한층 더 진해졌으니까.
"으.."
귓가로 울려퍼지는 작게 앓는 소리에는 듣는 이를 흡족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불러봤다.
"디아나.."
아까보다 목소리를 살짝 깔아서.
그랬더니 이번에는 깍지를 끼고 있던 손쪽에 힘이 들어가더라.
그런 식으로 디아나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
"호, 혹시.. 싫으신 거면은.."
그녀의 눈치를 보는 척을 했다. 그녀가 내 부름에 답을 하지 않는 걸 신경쓰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꽤나 격렬했다.
"그, 그런 게 아니다!"
내 품안에 갇혀있는 상태만 아니었다면 제자리에서 펄쩍하고 뛰어올랐을 기세였다. 그래서일까 당혹스러움으로 물든 목소리가 살짝이지만 튀었다. 그게 또 쪽팔렸던 걸까. 아니면 급하게 외치다가 혀라도 씹은 걸까. '으..'하고 작게 침음성을 흘린 디아나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작게나마 귓가로 울려퍼졌다.
뭐라고 하는 걸까.
소리가 너무 작아서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그러면은.. 디아나라고 부를게요."
상관하지 않고 새롭게 정리한 호칭을 확정지었다.
"디아나."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러봤다. 결정된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디아나-"
"으, 응.."
대답을 안 하면 내가 계속 부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물론, 정답이었다. 안타깝게도 백점짜리는 아니었지만.
"그게 아니죠."
"그, 그럼.."
"제가 디아나라고 부르면 디아나도 절 이름으로 불러줘야죠."
그리 말하고는 한 번 해보라는 뜻으로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러줬더니..
"이, 이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런 그녀의 부름에 기쁘다는 듯 답을 하니 날 올려다보고 있던 하늘색 눈동자가 잘게 경련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언젠가는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기라도 한 걸까.
내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디아나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그저 기쁘다는 듯 그녀의 몸을 꼬옥하고 끌어안으면서..
"디아나."
"-그래."
"혹시.. 제가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까요?"
본론을 꺼내들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내 품안에 갇혀있던 디아나의 몸이 흠칫하고 크게 경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