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방을 빠져나가려던 디아나를 붙잡은 건 그녀하고 관계를 맺기 위함이 아니었다.
뭐,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긴 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왜 이러는지 다른 이들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분하고 디아나가 날 상대로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잘만 건드린다면 그녀와 관계를 맺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테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식으로 나와 관계를 맺고 나면?
디아나는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거다.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럴테지.
그 사실이 지금쯤 트라우마 비슷한 것으로 변해버렸을 기억을 정면으로 자극할테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도망을 택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 디아나가 날 상대로 느끼고 있는 죄책감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 부분은 지금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고로 지금 자극해야할 건 죄책감보다는 역시..
'동정심이지.'
디아나가 내게 연민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날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였다.
가지 말라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가려던 그녀의 손을 붙잡았던 건 말이다.
"하,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같은 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지만 그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그렇겠지.
그 말을 완성하려면 제가 나한테 한 짓들까지 낱낱히 밝혀야할텐데 그걸 생각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을테니까.
그리고 디아나의 얼굴 위로 드러난 망설임은 내게 있어서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부, 부탁드릴게요. 불안해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있던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꿏은 입술만 꽉 깨물고 있던 디아나를 자리에 눌러앉히는 데에는.
그렇게 내 옆에 앉은 디아나의 손을 소중한 것을 움켜쥐듯 꼬옥하고 움켜쥔 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마주잡고 있던 손이 내 것인지 디아나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살짝 촉촉하게 변했을 때..
꼭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면서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기는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이 살짝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왜 웃는 거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그냥.. 신기해서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매번 이럴 때마다 엄청 불안했는데.. 이렇게 디아나 님 손을 잡고 있으니까.."
신기할 정도로 안심이 된다고 중얼거리니 마주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살짝이지만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디아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표정을 한채 날 바라보고 있었을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러움을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꽤나 동요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 증거로 아까 내가 말을 내뱉은 순간 실렸던 힘이 여전히 그녀의 손에 깃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더 흔들어줘야겠지.
"..디아나 님."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뭔가를 억지로 참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일그러져 있는 디아나의 얼굴이었다.
"..그래."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려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놀고 있던 손을 뻗어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왜.."
왜 당신은 항상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거냐고.
왜 그렇게 매번 슬퍼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론, 대답같은 건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신 걸 볼 때마다.."
디아나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떼어내어 이불에 덮여있던 가슴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그곳을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여기가 너무 아파서.."
그러면서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동시에 말했다.
이 정체모를 느낌이 너무 신경쓰인다고.
이렇게 몰래 학원을 빠져나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고.
그럼에도 디아나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보다 조금 더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뿐.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목표한 것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말을 이었다.
"디아나님 저희는.. 어떤 관계였나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로 이미 한 번 던진 적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서 던졌다.
하지만 아까하고는 달랐다.
아까는 그녀의 눈치를 보듯 그 질문을 던졌다면 방금은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눈에 바짝 힘을 준채 그 질문을 던졌으니까.
힘이 잔뜩 실려있는 내 시선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것일까.
디아나는 거칠게 눈동자를 흔들면서도 차마 내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로 마주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내 가슴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슴팍에 대고 눌렀다.
내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 상태로..
"혹시.."
물었다.
"..연인 관계였나요?"
네가 날 볼 때마다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는 것도, 네가 아까처럼 슬퍼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토록 신경이 쓰이는 것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 질문이지 사실상 이미 답을 정해놓고 던진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디아나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를.
그래서 기다렸다.
그녀가 대답을 내놓기만을.
그러고 있으니..
꽉 다물어진채 부르르 경련하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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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시점****
꼭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그 감각이 많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뛰면서 온힘을 다해 기쁨을 표했다.
몽실몽실한 것이 가슴 속으로 차오르는 감각이,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라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어느 순간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쁨이, 이 달콤하기 그지없는 감각에 유통기한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걸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금 몸에 차오르는 감각이 너무나도 기꺼웠으니까.
해서 오히려 더 탐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만끽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또 느낄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뭐라뭐라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양심같은 것에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있는 힘껏 그것을 들이마셨다.
꼭 마치 바닷물을 들이켜 목을 축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계속 들이키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지금 당장은 만족스럽더라도 그 끝에는 결국 파멸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흘러들어오는 걸 막지 않고 받아들였다.
갈증이 났다.
갈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미 진작에 포기하고 체념했던 것이 살려달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발버둥을 치는 게 느껴졌다.
그 사실이 못내 혐오스러웠다.
자기가 저지른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우연찮게 내밀어진 달콤함에 젖어 거기서 희망을 찾는 자신의 모습이 더없을 정도로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막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을 발로 꾹꾹 즈려밟기 시작했다.
어차피 꽃을 피우지도 못할 것들이었으니까.
그렇게 단념하려고 했는데..
"그냥.. 신기해서요.."
포기하려고 헀는데..
"매번 이럴 때마다 불안했는데.. 이렇게 디아나 님 손을 잡고 있으니까.."
네가 날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지마.
날 흔들지마.
제발..
맘같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냐고.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다 끝날텐데.
다 끝나버릴텐데.
귓가로 울려퍼지는 말들에 기대감을 느끼고 희망을 품는 자신이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알고 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왜 희망을 품는 거야?
포기하겠다고 했잖아.
그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도, 상처를 받고서도 부족했던 거야?
그리 되뇌이던 와중이었다.
"왜.."
왜 당신은 항상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냐.
그러한 질문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래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마치 숨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신 걸 볼 때마다.. 여기가 너무 아파서.."
그랬구나.
나는 또 너를 아프게 하고 있었구나.
나는 널 아프게만 하는구나.
숨이 막혔다.
누군가 목을 틀어쥐고 조금씩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느끼고 있자니..
"디아나님 저희는.. 어떤 관계였나요?"
이미 한 번 받은 적 있는 질문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하지만 아까하고는 파급력 자체가 달랐다.
이번에는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힘이 잔뜩 실린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해서 애꿏은 입술만 꽉 깨물고 있자니 이성이 속삭였다.
이렇게 계속 끙끙 앓을 거라면 차라리 속시원하게 말해버리라고.
그러면 편해질 거라고.
이성인지 뭔지 모를 것이 달콤하게 속삭여왔다.
그렇지만 입을 열지 않았던 건..
아까도 그랬듯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밝힌 순간, 지금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저 시선이 경멸과 증오로 물들기 시작한다면..
자신은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스웠다.
이안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받아들이겠다고 해놓고서는 그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결국 자신은 이런 년이었다.
이것밖에 안 되는 년이었다.
그렇게 자기혐오라는 늪속으로 천천히 빨려들어가며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혹시.. 연인 관계였나요?"
귓가로 울려퍼진 한 마디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들려온 한 마디가 늪속으로 끌려들어가던 몸을 단번에 건져올렸다.
꼭 마치 낭떠러지 끝에 매달려있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온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쿵쿵하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자신만 그렇게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엄습해온 탓이었다.
이안은 그런 의도로 내뱉은 게 아니었는데 자신이 곡해해서 들은 거라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망이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들리도록 만들어버린 거라면?
그래서였다.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던 것은.
물론, 그 말을 한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확인한다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이안을 향해 시선을 던진 순간 눈으로 박혀들어온 모습에..
다시 한 번 숨이 턱하고 막혔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간절함과 긴장을 품은 시선이 그로부터 날아와꽂히고 있었으니까.
면죄부가 되어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이안이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는 것이라면..
자신은 그걸 들어줘야만 하는 것 아닐까.
설령 그렇게 시작된 관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예정된 파멸뿐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래야만하는 것 아닐까.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느릿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혹시 또 모르잖아? 그러다가..'
그 뒤로 따라붙은 것은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는..
"..그래."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의 얼굴이 확 밝아지더니..
살짝 터서 거칠게 변한 것이 입술을 꾸욱하고 눌러왔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몸을 휘감고 있는 열기 때문일까.
충동스럽기 그지없는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달콤했다.
그게 너무나도 달콤해서 눈물이 나왔다.
나중에 끝이 찾아왔을 때 이 달콤함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퍼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