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암시에 걸린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카트린느를 상대로 디아나에 대한 내 마음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예상하긴 했었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
디아나에 대한 것을 잊으라는 그녀의 암시에 발작 비스무리한 것을 해보이니까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길래 당장은 그쪽에 손을 대는 걸 포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아예 마주칠 일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시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방 안에 가둬버리다니..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로 갇힌 건 아니었다.
문도 멀쩡하게 열려있었고, 창문도 열고자 하면 얼마든지 열 수 있었으니까.
몸도 묶인 곳 하나 없이 자유로웠고 말이다.
그럼에도 감금당했다고 말한 것은 레이시아가 내게 붙여놓은 이들 때문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요청하라는 식으로 그녀는 내게 시녀 한 명과 기사 한 명을 붙여주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여러모로 혼란스러울 날 배려해서 내 편의를 봐준 것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내게 붙여진 이들의 태도였다.
"어디 가십니까?"
"어.. 목이 좀 말라서요."
"그러셨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체 레이시아로부터 뭐라고 언질을 받은 것인지 내가 뭘 하려고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들이 나서서 처리해버리는 탓에 이곳에서 지낸지 벌써 3일째인데 방밖으로 나가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방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죽겠다는 식의 어필을 해가면서 산책이라도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레이시아에게 허락을 받고 돌아온 기사와 함께 건물 주변을 몇 바퀴 돈 게 전부였고 말이다.
그렇게 내가 반쯤 갇혀지내는 것하고는 상관없이 앨리스와 레이시아, 그리고 카트린느는 서로 번갈아가며 날 찾아왔다.
앨리스는 내 안부도 확인할겸 기사부의 근황을 전해준다는 핑계였고, 레이시아는 손님인 내가 불편한 점 없이 잘 지내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였으며, 카트린느는 내 치료를 위해 내 상태를 체크한다는 이유였다.
웃긴 건 셋이 합의라도 본 것인지 셋이 각자 날 찾아오는 시간대가 늘 똑같다는 점이었다.
티가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그 로테이션 체제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지를.
아마도 '부작용'이 발현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였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얌전하게 지내는 척 하면서 속으로 열심히 탈출각을 재고 있는 것은.
'무력만 쓸 수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었을텐데.
상황상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기억 상실로 인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인 놈이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탈출한다?
누군가는 분명 그 사실에 위화감을 느낄 터.
그렇기에 무력을 쓰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고 한 번에 말이다.
만에 하나 섣부르게 시도했다가 탈출에 실패하기라도 하는 순간 지금처럼 헐겁기 그지없는 감시망같은 건 더는 기대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실패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진짜로 갇힐 수도..'
그것도 팔다리까지 꽁꽁 묶인 채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기억을 잃은 이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하겠냐만은 그게 현실이 될 가능성을 섣불리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진짜 생각치도 못한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르곤 하니까.
특히나 그게 치정에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고.
아무튼 이렇게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처음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것이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간다는 점이었다.
이게 다 3일이라는 시간동안 고분고분하게 지내는 척 하며 열심히 정보를 쓸어담은 덕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써먹어줘야겠지.
얼른 써먹지 않으면 이 정보들의 따끈따끈함이 순식간에 식어버릴테니까.
그래서였다.
당장 오늘 밤을 결행일로 정한 것은.
"이안."
"아, 오셨어요..?"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끝마치고 날 찾아온 레이시아를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기대어 앉아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그녀가 이내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하면서 지냈느냐."
"그냥.. 산책 좀 하고.. 책도 좀 읽고.."
"책?"
"네, 혹시.. 뭐라도 보면 기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레이시아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옆에 내려놓았던 것을 집어들어서 보여주니 내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내면서 혹시 뭐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나 불편한 일같은 건 없었고?"
"네, 다들 잘해주시는데요."
"그래도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거라. 그대는.. 내 손님이니까."
뭐 하나라도 놓칠세랴 세세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도 고분고분하게 답을 해주었다.
그러고 있으니..
"혹시 뭐.. 기억이 났다던가 그런 건.."
레이시아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어제도 받은 적 있는 질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쓰게 웃으면서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자기가 다 안타깝다는 것처럼 입술을 슬쩍 깨물고 있던 그녀가..
"몸은? 괜찮은 것이냐? 불편한 곳은 없고? 혹시 갑자기 열이 난다던지.."
마침내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게 그리도 궁금했던 것일까.
질문을 던진 레이시아가 뭐라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뚫어져라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을 훑는 시선이 어찌나 강렬한지 살짝 집요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네? 아뇨. 딱히..?"
그래서일까.
금시초문이라는 식으로 맞받아치니 레이시아는 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얼굴에 티가 다 날 정도로 아쉬워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지워버리긴 했지만.
"그래.. 알겠다. 그럼 편히 쉬도록."
혹시 모르니 맘 같아서는 이곳에서 더 뭉개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그또한 아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마 걸음을 옮기질 못하는 그녀를 친히 문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렇게 레이시아를 떠나보내고 나서..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로 이불을 어깨까지 푹 덮어쓰니 레이시아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쭉 벽을 지키고 있었던 내 담당 시녀가 침대 쪽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딸린 서랍 안에서 향초 하나를 꺼내 접시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그곳에 불을 붙인 뒤..
"그럼, 편히 주무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일단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진짜로 중요한 건 역시 이 다음부터지만.
계획한대로 방 안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지만 바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해서 시간이나 때울 겸 파악해놓은 탈출 루트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일단 방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건..'
역시 무리겠지.
어제하고 그제 새벽에 잠깐 짬을 내서 확인해본 결과 기사들이 특정 시간대마다 교대를 하며 그곳을 지키는 듯 헀으니까.
뭐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밤새도록 두 눈 부릅뜨고 있지는 않겠지만..
설사 꾸벅꾸벅 졸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잠에서 깨어날 터.
노리고 일부러 여기로 배치한 건지 아니면 우연찮게 얻어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에 딸려있는 문은 죄다 낡아빠진 것들뿐이라서 열 때마다 소음이 장난아니니 말이다.
그나마 화장실과 연결되어 있는 게 상태가 괜찮긴 했지만, 그것도 열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뭣보다..'
어찌어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기사를 깨우지 않고 그 앞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고 치더라도 사저를 빠져나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기에 문은 탈출루트로 써먹기에는 빵점이었다.
그래서 당장 생각하고 있는 곳은 역시 창문이었다.
'일단 저쪽은 창문 하나만 넘으면 바로 밖이니까.'
물론, 창문 쪽도 방에 딸려있는 건 써먹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창문 쪽이라고 해서 지키는 이가 없는 건 아니니까.
각도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아마 지금쯤 기사 한 명이 창문하고 창문 사이에 존재하는 벽에 기댄 채 그곳을 지키고 있을 거다.
하지만 화장실 겸 욕실에 딸려있는 자그마한 창문이라면?
경우가 좀 달랐다.
거긴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심지어 위치도 좋았다.
창문 쪽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가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는 한 빠져나가는 동안 시선을 잡아끌만한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을 터.
그래서 이렇게 뜬 눈으로 향초 냄새를 맡아가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창문 쪽을 지키고 있는 기사의 신경줄이 조금이라도 더 느슨해지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생각하고 있는 타이밍은 역시 교대 직전이었다.
그때만큼은 그 누구라도 경계심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뭐, 이렇게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짜로 기억상실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일찍 나가봐야 디아나와 마주칠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할텐데 굳이 그런 생고생을 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였다.
가만히 드러누워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던 것은.
혹시라도 깜빡 잠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바스락-
살짝 열어둔 창문 쪽에서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창문을 통해 방 안을 한 번 쓱 들여다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갑자기 급한 볼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살짝 어색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자리를 뜬다고?
빠졌네. 빠졌어.
그렇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또 아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지키고 있는 게 고귀하신 왕녀님이 아니라 일개 평민 생도따리니 어디 의욕이나 나겠는가.
'뭐, 나야 땡큐지만.'
안 그래도 엄한 사람한테 덤터기 씌우게 될 것 같아서 그 부분이 살짝이지만 마음에 걸렸는데 저렇게 서슴없이 근무 중 근무지 이탈이라는 대죄를 저질러주면 나도 더는 신경 쓸 이유가 없지.
덕분에 화장실에 딸려있는 작은 창문으로 낑낑대면서 빠져나갈 필요 없이 그냥 창문을 열고 빠져나가도 될 것 같았다.
'자, 그러면은..'
움직여볼까.
급한 볼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기사가 충분히 멀어질 수 있도록 속으로 타이밍을 재다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이불을 돌돌 말아 또다른 이불 속으로 밀어넣어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꾸며준 뒤..
그대로 창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문단속을 철저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탈출 사실을 바로 들켜서 이 새벽에 추격전을 찍게 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몸 위에 걸친 거라고는 셔츠 한 장에 얇은 면 바지 한 장 뿐이라서 그런 걸까.
새벽 특유의 냄새를 품고 있는 공기가 제법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딱 좋았다.
이 정도면 디아나의 저택에 도착할 때쯤이면 몸이 딱 알맞게 식어있을테니까.
꼭 마치 오랫동안 바깥을 헤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신발이랍시고 신고 있는 게 실내용 슬리퍼라서 살짝 불편하긴 했지만 밑창이 다 떨어진 걸 신발이랍시고 신고 대초원을 걸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임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그렇게 레이시아의 사저를 빠져나와 후문 쪽으로 향했다.
함부로 밖을 나돌아다닐만한 시간대가 아닌지라 주변에는 오가는 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학원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쓸데없이 남들의 눈에 띄는 일 없이 디아나의 저택 앞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디아나하고 어떤 식으로 마주치냐는 건데..
왕도라고 하면 역시 저택 정문 앞에 쪼그리고 있다가 학원으로 가기 위해 저택을 빠져나오는 그녀와 마주치는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법은 써먹기 힘들 것 같았다.
기억상실이라는 이 편리하면서도 유용한 컨셉을 더 이어나가려면 한치의 의구심도 남겨두어선 안 되니까.
학원에서의 기억을 홀라당 잃어버린 놈이 디아나의 저택을 찾아간다?
그 부분만 기억이 났다는 식으로 퉁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 명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디아나가 거리를 헤매고 있는 나를 '우연찮게' 발견하게 되는 식이라면 어떨까.
'..괜찮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고.
디아나의 저택을 빙 돌아 연무장이 있는 후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담장 뒤에 쪼그려앉은 채로 기다렸다.
연무장과 연결되어있는 문을 통해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요즘 머릿속이 평소같지 않을테니 어쩌면 늘 하던 아침 운동을 건너뛸 수도 있었지만..
'나올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은 보통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의도적으로 다른 데 몰두하곤 하니까.
그건 디아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터.
그래서 기다렸다.
새벽 공기에 차게 식은 몸이 제멋대로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서.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을 가려주고 있던 수풀 너머로 보이던 자그마한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들어 제대로 잠을 못 잔 걸까.
3일 전에 봤을 때도 충분히 초췌해보였던 그녀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퀭하게 변해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지익- 지이익-
신고 있던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애타게 찾기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