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마치 갓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을 보는 것 같았다.
물방울의 형태를 한 것들이 디아나의 눈에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꾹꾹 억누르고 있던 것이 한 번 터지니 겉잡을 수 없었던 걸까.
디아나는 쉬지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 흔한 흐느낌 한 번 없이 그저 눈물만 쏟아내는 디아나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덕분에 번거롭게 연기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우, 울지 마세요.."
살짝 목소리를 떨면서 투명한 눈물을 주륵주륵 쏟아내는 디아나의 눈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새 뜨끈하게 변한 눈시울과 맞닿은 손가락을 타고 살짝 식어서 뜨뜻미지근하게 변한 것이 조심스레 뻗은 손가락 사이로 휘감기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 느낌에 감정이 더욱 복받친 것일까.
디아나의 두 눈에서 왈칵하고 터져나온 액체가 손가락 끝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런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면서 얼굴 위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띄워올렸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울지마세요.."
두서없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 가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처럼 횡설수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있으니..
등 뒤에서 날아와 꽂히던 시선들이 조금씩 따끔하게 변해가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그녀들 입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 여겼던 이가 자충수까지 둬가면서 알아서 나가떨어져 준 덕분에 내심 안도감과 승리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을텐데 이렇게 된 것이니까.
방금 그걸로 가라앉았던 경계심이 다시금 확 치솟았을 터.
그래서일까.
"이안."
뒤쪽에서 들려온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자뭇 서늘했다.
"이리오도록."
"네? 그, 그렇지만 이 분이.."
사람이 이렇게 서글프게 울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있겠느냐.
그런 뉘앙스로 명령에 가까운 투로 내뱉어진 그녀의 발언을 맞받아쳤다.
동시에 그녀를 향해 은근히 경계심을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을 하냐는 것처럼 말이다.
꼭 그리 말하는 듯한 내 시선을 받은 순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본 걸까.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시선을 한채 내쪽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아가 카트린느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이 교차한 순간 둘이 눈짓으로 뭔가를 열심히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트린느도 당장 나머지 둘보다는 디아나쪽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안."
바톤터치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카트린느쪽에서 날 불렀다.
"이리와."
거부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듯 제법 단호함이 느껴지는 손짓까지 해가면서.
"하, 하지만 누나.."
"그 사람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거든."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치고는 꽤나 신랄한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복받치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아보려는 것처럼 입술을 꽈악하고 깨물고 있던 디아나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렇겠지.
정곡이었을테니까.
그런 디아나와 카트린느 사이에 서서 둘을 번갈아서 힐끔거렸다.
카트린느의 말에 따르자니 디아나 쪽이 못내 신경쓰여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그.."
동시에 우물쭈물하면서 말끝을 흐리니..
"이안."
제 말에 따르지 않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디아나 쪽을 신경쓰는 듯한 내 모습 때문에 머릿속에 경고음같은 것이라도 울려퍼진 것일까.
아까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그에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카트린느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있었다.
"누나 말 들어야지?"
"아, 알겠어."
카트린느가 선사하는 압박감을 배겨내지 못한 척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디아나 쪽을 힐끔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는 나와 디아나를 한 공간에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세 명의 머리를 동시에 관통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디아나 앨런."
레이시아의 입이 열리며 그 안에서 디아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그러더니 레이시아가 그대로 디아나를 끌고 나가 버렸다.
레이시아에게 협력하려는 듯 은근히 나와 카트린느 쪽을 힐끔거리던 앨리스도 둘을 따라 방을 빠져나갔고 말이다.
그렇게 카트린느와 방 안에 둘이 남겨진 순간.
디아나가 빠져나간 곳만을 바라보고 있던 내 손을 잡아 침대 쪽으로 이끈 그녀가 날 침대 위에 앉혔다.
"이안."
"응?"
"방금 그 여자가 신경쓰여?"
머리에 감겨있는 붕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과 함께 내던져진 질문에 곧바로 답을 하는 대신 내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카트린느의 눈치를 살피는 척을 했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내 기색을 카트린느도 느낀 것일까.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길을 천천히 밑으로 내린 그녀가 무릎 위에 얹어져있던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것이 꼭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만큼은 믿어도 된다고 속삭이는 듯 했다.
"사실대로 이야기 해도 괜찮아.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그와 함께 내뱉어진 그녀의 발언에 힘을 얻은 것처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 조금.."
"왜?"
그러자 돌아온 건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빚어낸 질문이었다.
쟤가 신경쓰이는 이유가 뭐냐.
꼭 그리 묻는 듯한 카트린느의 발언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어. 그냥.. 자꾸 신경쓰여. 그리고.."
"그리고?"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자꾸 여기가 아파."
그리 말하면서 가슴께를 꼬옥하고 움켜쥐니 카트린느의 눈썹이 이지러졌다.
대체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척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누나."
"..응?"
"누나가.. 알려주면 안 돼?"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카트린느의 눈썹이 꿈틀하고 요동치게 만드는 데에는.
내가 무엇을 요구하려 하는 지 내 말을 듣자마자 알아차린 것일까.
"그건 안 돼."
질문을 입밖으로 꺼내들기도 전에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대답이랍시고 돌아왔다.
"어, 어째서.."
"널 위해서야."
그리 말하는 카트린느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분명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그 감정에 압도된 것처럼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러고 있으니..
"많이 혼란스럽지?"
걱정어린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지금은 깨어난지 얼마 안 되서 그런 걸거야."
그 뒤로 이어진 건 날 안심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다분하게 느껴지는 속삭임이었다.
일단은 내 관심을 디아나가 아닌 다른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판단한 걸까.
"그런 걸까.."
그에 스스로도 확신이 잘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가던 그녀의 손가락이 이내 내 어깨를 꼬옥하고 움켜쥐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응, 틀림없어.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더 쉬자."
귓가로 울려퍼지던 카트린느의 목소리가 슬며시 늘어지며 내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내 몸을 뒤로 떠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날 다시 재우려는 생각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날 침대에 눕힌 그녀가 침대 옆에 붙어있던 서랍장에서 예의 그 향초를 꺼내들었다.
"그건.."
해서 그건 또 뭐냐는 식으로 조심스레 그쪽에 관심을 표하니 카트린느가 살포시 웃으며 그런 내 질문에 답했다.
"이거?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초야."
"아.."
"피워놓고 있으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좀 도움이 될 거야."
암요.
그러시겠죠.
머릿속을 정리하다 못해 아주 깔끔하게 비워버릴 생각이시겠지.
내가 기억까지 잃었음에도 디아나한테 관심을 보인 것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무래도 카트린느는 향초의 힘을 이용해 그걸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인 듯 했다.
'괜찮으려나..'
나로서는 그런 그녀의 선택이 솔직히 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시아나 앨리스가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까 내가 막 깨어난 척을 했을 때처럼 수습할 수 있을만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모를까 한창 일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들이닥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텐데 말이다.
내가 자길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흐트러져 있던 이불까지 끌어올려서 손수 내 몸 위에 덮어준 카트린느가 접시 위에 담겨있던 반쯤 녹은 초를 옆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 새로 꺼내는 초를 놓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불을 붙인 뒤..
내 옆에 걸터앉아 이불에 덮여있는 내 가슴팍을 조심스레 토닥이기 시작했다.
꼭 마치 아이를 재우는 것같은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왜?"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옛날 생각?"
"응, 누나 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시도때도 없이 누나네 집으로 놀러갔었잖아."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듯 눈을 감은 채로 피식피식 웃고 있으니 잠시 침묵하고 있던 카트린느에게서도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와는 다르게 살짝 억지로 웃은 느낌이 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거야."
"응.."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손길에 안심한 척 눈을 꼬옥 감고 잠을 청하는 척을 했다.
그럼에도 내 가슴팍을 토닥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약효가 돌 때까지 이대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생각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누나.."
눈을 감은 채로 그녀를 불러보았다.
조금씩 잠기운에 먹혀들어가는 사람처럼 잠꼬대를 하는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누나가 있어서.."
그래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는 투로 중얼거리니 규칙적인 리듬으로 내 가슴팍을 토닥거리던 카트린느의 손길이 우뚝하고 정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잠결에 중얼거린 것처럼 내뱉은 말이 양심을 향해 날아가 그곳에 푸욱 꽂히기라도 한 것일까.
가슴팍을 슬며시 짓누르고 있던 카트린느의 손이 살짝 떨렸다.
어쩌면 그로인해 제가 하려는 걸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안, 자..?"
아무래도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이미 결심을 굳힌 그녀를 막아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대충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향초의 향에 취한 것처럼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으니 혹시나 내가 깨어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뱉어진 카트린느의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물론, 답하지 않았다.
그에 내가 완전히 향초의 향에 취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안."
아까보다 조금 더 확신이 깃든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응.."
그런 그녀의 부름에 답을 한 순간부터였다.
카트린느가 본격적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주된 화제는 말할 것도 없이 디아나에 관한 것이었다.
그 여자가 왜 신경이 쓰이는 것이냐, 신경쓰인다면 어떤 식으로 신경쓰이는 것이냐.
이미 한 번 던진 적 있는 질문을 또다시 던져오는 그녀의 행동에 아까 내놓았던 대답들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러고 있으니..
"그렇게 가슴이 아프면.."
뭔가 주저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카트린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건 어때?"
그렇게 내뱉어진 것이 잊으라는 명령이 아닌 제안에 가까운 형태였던 것은 그녀 최후의 양심같은 것이었던 걸까.
"잊어..?"
"응, 그럼 더이상 아프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이만 잊어버려라.
카트린느는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는 것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런 그녀의 제안에 나는..
흐물흐물하게 힘을 풀고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격한 반응에 놀란 것일까.
가슴팍에 올려져있던 카트린느의 손이 흠칫하고 떨리며 동요를 내비췄다.
얇은 이불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떨림을 느끼면서..
"싫..어..!"
발작하듯 몸을 들썩이며 외쳤다.
그대로 눈을 뜨기라도 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