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체 얼마나 기절해있었던 것일까.
깊숙한 늪같은 곳에 잠겨있던 것 같은 의식이 갑자기 확 부상하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차린 순간, 가장 먼저 날 반긴 것은 통증이었다.
살짝 까슬까슬한 것에 감싸인 곳이 욱씬거렸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통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더니만 그 대가를 뒤늦게 치루는 것일까.
덕분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게 느껴지는 정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내게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를.
그렇게 깨어나자마자 찾아와서 날 괴롭히기 시작한 욱씬거림 뒤로 따라붙은 건 어지러움이었다.
기절할 때까지 피를 쏟아낸 탓일까.
아니면 그저 오랫동안 누워있었기 때문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런 식으로 한 놈이 물러가면 다른 한 놈이 덮쳐오는 식으로 욱씬거림과 어질어질함의 시간차 공격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마 눈을 뜰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눈을 꼭 감은 채로 끙끙대면서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스윽-
서늘한 손길이 이마를 훑는 게 느껴졌다.
내게는 그게 꼭 마치 가뭄의 단비 같았다.
그 서늘함 덕분에 통증하고 어질거림에게 집단린치를 당하면서 제멋대로 후끈후끈하게 변한 머리가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것같았으니까.
해서 나도 모르게 일그러뜨리고 있던 인상을 풀고 그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지금 날 쓰다듬고 있는 사람의 정체가.
기절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풍경을 떠올려보면 역시 레이시아일까.
감고 있는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느낌이 너무 편안해서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고 싶었으니까.
해서 굳이 눈을 뜨는 대신 꼬옥하고 감은 채로 이마를 스치는 손길을 만끽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질적인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그런 냄새였다.
어디서 맡아봤더라.
의문과 함께 기억을 뒤적이기 시작한 순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냄새를 어디서 맡아봤는지를.
그리고 그게 왜 이리 익숙하게 느껴졌는지도.
그야 익숙할 수밖에.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3일에서 4일 간격으로 맡았던 냄새니까.
식물의 줄기를 꺾어서 그 부분에 코를 가져다대면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냄새, 이건 분명 카트린느의 향초가 풍기는 냄새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의구심이 확 치솟았다.
지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게 레이시아라면 여전히 내 코밑을 맴돌고 있는 향초 특유의 향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혹시 뭐,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병문안을 온 카트린느가 두고 가기라도 한 걸까.
피워놓으면 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지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레이시아가 아닌 카트린느거나.
그렇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모처럼 날 온전히 독점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만한 기회를 레이시아가 순순히 다른 이에게 넘겼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역시 눈을 떠서 확인해봐야하나?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카트린느의 목소리로 된 허밍이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멜로디가 살짝 서정적이면서도 잔잔한 것이 딱 자장가였다.
그렇게 콧노래에 가까운 것을 흥얼흥얼거리면서 카트린느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피어나는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꼭 마치 예전에 몇 번이나 겪어본 것처럼 말이다.
이안이 어릴 때 돌봐줬다고 하더니만 그때도 이렇게 자장가를 불러줬던 걸까.
그럼 지금 느껴지는 이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은 이건 몸 속에 내재된 기억이고?
잘은 모르겠지만 딱 하나 확실한게 있다면 지금 몸을 끌어안고 있는 분위기가 굉장히 안락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다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발끝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편안함이 조금씩 몸을 잠식해가는 걸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이안.."
살짝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어왔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깨어있다는 사실을 들킨 줄 알았으니까.
그런 데 그게 아니었다.
"힘들면.. 다 잊어버려도 괜찮아.."
자신이 다 안타깝다는 것처럼 붕대 위를 스치는 손길과 함께 걱정이 그득하게 담긴 목소리가 넋두리처럼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렇게라도 내가 괜찮아질 수 있다면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 말을 들은 순간 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디아나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생각했던 것하고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꼬여버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하나 그게 고민이었는데..
'나쁘지 않을지도..'
그래서였다.
"응.. 누나.."
카트린느의 넋두리에 반응한 것처럼 목소리를 냈던 것은.
어디까지나 넋두리에 불과했던 말에 내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못했던 걸까.
붕대와 맞닿아있던 손가락이 흠칫하고 떨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이, 이안..?"
"누나.."
"저, 정신이 들어?"
"응.."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격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기절해있었다는 걸.
그래서일까?
카트린느는 방금 제가 넋두리처럼 무슨 말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누, 눈 좀 떠봐."
대신 내 안위를 확인하는데 급급했다.
지금 이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카트린느로부터 비롯된 소란은 순식간에 외부로까지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란을 접한 이들이 내가 있는 방쪽에 관심을 보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관심을 카트린느도 느낀 것일까.
내게 말을 붙이던 카트린느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피워놓고 있던 향초를 끄고 창문을 열어 방 안을 환기시키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향초의 효능을 다른 이들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걸 용케 잊지 않은 모양.
그런 식으로 카트린느가 제가 벌여놓은 것들을 수습한다고 부산을 떠는 사이 일부러 흐릿하게 뜨고 있던 눈을 굴려 빠르게 주변부터 살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레이시아가 사용하는 사저에 딸려있는 방 중에 하나라는 것을.
레이시아가 기절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날 케어하기 위해 카트린느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일까.
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보니 추측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장소파악을 끝내고 살짝 멍을 때리고 있으니..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레이시아가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전개였다.
이곳이 레이시아의 사저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 그녀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카트린느가 벌인 소란을 접하자마자 다 제쳐두고 바로 뛰어온 것일까.
방 안으로 뛰쳐들어온 레이시아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뭔가가 굉장히 간절해보이는 얼굴을 한채 방 안으로 뛰쳐들어온 그녀는 가장 먼저 나부터 찾았다.
그에 맞춰 푸른색 눈동자가 다급하게 방 안을 훑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가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을 때처럼 반응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이, 이안.."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대체 내가 얼마동안 기절해 있었길래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를 저렇게 벌벌 떠는 걸까.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절박함의 향기가 너무 짙어서 맘같아서는 그 부름에 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 그것을 무르는 것도 좀 그랬으니까.
해서 레이시아의 부름에 답을 하는 대신 카트린느의 부름에 응해 눈을 떴을 때처럼 멍한 눈을 한채 앉아만 있으니..
"이, 이안..?"
그런 내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날 부르는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로 울려퍼졌다.
전보다 걱정의 색이 한층 더 짙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마저도 답을 하지 않고 싹 무시하니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던 레이시아가 이내 카트린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카트린느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그에 대한 카트린느의 대답은..
"이제 막 정신 차려서 그런 걸거야. 조금 기다리면.."
바로 그것이었다.
제가 벌려놓은 걸 어떻게 수습할 생각인가 했더니만 설마 저런 식으로 둘러댈 줄이야.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적으로 나도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서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줄이야.
누가봐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전문가적인 포스를 뿜뿜 뿜어내며 그리 말하는 카트린느의 능청스러움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 발 늦게 내 소식을 접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외인 건 그렇게 도착한 이들 중에 디아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내게 한 짓이 있으니 양심에 찔려서라도 얼굴을 내비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대체 내가 기절해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속으로 그런 의문을 느끼고 있는 사이, 방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온 앨리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꼭 마치 자신한테는 그걸 넘을 자격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살짝 발만 뻗으면 넘을 수 있는 것을 앞에 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살짝 안쓰럽게 느껴져서..
"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척 일부러 힘없이 뜨고 있던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부르르 털었다.
"이, 이안..!"
"정신이 좀 들어?"
어지러움이라도 호소하는 것처럼 행동했더니 사방에서 걱정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옆에 서 있는 이에게 지기 싫다는 듯 앞다투어 날 향해 날아드는 목소리들.
그 안에 디아나의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은 날 걱정할 자격따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하고 치켜들어 내쪽을 한 번 쳐다본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대로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아무튼 그렇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걱정어린 목소리들을 들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 부분을 손으로 감싸쥐었다.
"윽.."
그 상태로 앓는 소리를 한 번 흘려주니 사방에서 쏟아지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신 이번에는 걱정어린 시선들이 푹푹 날아와꽂히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전에 봤던 광경을 참고해가며 연기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이, 이안.. 혹시 불편한 곳이 있는 거라면.."
치밀어오르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레이시아가 여성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문제라도 있느냐.
그렇다면 말을 해라.
어떻게든 해결해줄테니까.
걱정이 그득하게 담긴 목소리로 그리 말하면서 날 향해 살짝 몸을 들이미는 레이시아의 행동에 반응한 것처럼 주춤하며 몸을 살짝 뒤로 물리니 날 향해 들이밀어지던 레이시아의 몸이 우뚝하고 정지했다.
그에 맞춰서 입을 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할 때나 내보일 법한 조심스러운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린 건 덤이었다.
"그.."
말을 꺼내들기 전에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런 말을 내뱉어도 되는 건지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그런 내 기색을 느낀 것일까.
내 반응이 많이 예상 외였는지 살짝 당황에 젖어있던 레이시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얼굴을 싹 바꿔보였다.
그에 약간이나마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죄, 죄송한데.. 누구.. 신가요..?"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입밖으로 꺼내들었다.
그 순간 방 안으로 내려앉은 건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천둥소리처럼 들릴 것같은 묵직한 침묵이었다.
별로 길지도 않는 한 마디가 선사한 침묵이 그토록 무거웠던 것일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같이 당황에 젖은 얼굴들.
웃긴 건 이 사태를 촉발시킨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카트린느의 반응이었다.
이제서야 제가 막 의식을 회복한 날 상대로 어떤 암시를 속삭였는지를 기억해낸 것일까.
표정만 보면 그녀는 디아나보다도 더 경악한 듯 했다.
딱 보니 내가 아니면 그걸 깨뜨릴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제, 제가 왜 여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려가며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겠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을테니까.
당장은 믿기도 힘들테고 말이다.
"여, 여긴 어디인가요? 저는 학원에 입학하러.. 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왜.. 여기에.."
나는 학원으로 입학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런 내 말에 좀 정신이 든 것일까.
그 다음부터 이어진 건 살짝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추궁이었다.
그렇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들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적당히 답을 해주다가 불안해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니 보다 못한 카트린느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누, 누나? 정말 카트린느 누나야?"
그래서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녀가 내밀어온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카트린느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좀 안심한 것처럼 그녀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좀 보여주니 워낙 생각치도 못했던 상황이라 긴가민가해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심각하게 변하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게속해서 카트린느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녀야말로 내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굳게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내 모습에서 위기감이라도 느낀 걸까.
레이시아를 필두로 한 이들이 곧바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물론, 디아나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다.
꼭 마치 자신이 한 짓을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끼는 것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대충 그런 얼굴을 한채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디아나를 신경쓰는 것처럼 이따금씩 그녀 쪽을 힐끔거렸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면서도 내쪽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시선을 한 번 줄 때마다 디아나의 몸에 그에 반응하듯 흠칫흠칫거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디아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논의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안건은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저런 상태인 나를 누가 돌볼 것이냐는 것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제법 치열했다.
레이시아가 날 돌본다는 입장을 내어놓지 않으려고 하면?
카트린느와 앨리스가 편을 이루어 그녀를 압박했다.
그렇다고 카트린느가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가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목소리를 키우면?
언제 편을 먹었냐는 듯 즉시 레이시아 쪽으로 갈아탄 앨리스가 레이시아와 발을 맞추어 카트린느를 압박했다.
특히나 레이시아의 발언이 압권이었다.
"..그대는 남보다는 일단 자신부터 돌봐야할 것 같은데."
"윽.."
자기도 못 챙기는게 남을 돌볼 수나 있겠느냐.
꼭 그리 말하는 듯한 레이시아의 발언에 카트린느가 침음성을 삼켰다.
자기가 생각해도 반박할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던 모양.
그런 식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대체 저걸 가지고 언제까지 떠들 생각인 걸까.
다들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걸 가지고 밤새도록 떠들어댈 기세였다.
그리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본인한테 정하게 하는 건 어때요?"
카트린느가 대뜸 내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뭔가 믿고 있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그 발언에 나머지 둘이 흠칫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편을 이루어 그런 카트린느의 주장에 맞서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쉽지 않은 듯 했다.
그만큼 카트린느가 내세운 논리는 찌르고 들어갈만한 틈이 거의 없었으니까.
거기에 카트린느는 무적의 논리까지 내세웠다.
"결국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이안 본인일 거에요."
그러니 어디서 지낼지 본인이 선택하게 해야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느냐.
날 위해서라도 자신의 주장대로 해야한다는 카트린느의 발언에 나머지 둘이 침음성을 흘리는 것으로 그 논의는 사실상 끝이 났다.
카트린느의 승리로 말이다.
그리고 카트린느는 승자로서의 권리를 거리낌없이 휘둘렀다.
"들었지? 그래서 말인데 네가 직접 선택했으면 좋겠어. 어디서 지낼지."
나머지 둘에게 어필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내 선택을 밀어붙이는 식으로 말이다.
어차피 그런 걸 해봐야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틀림없이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실소가 새어나오려 했다.
뭘 믿고 저러는 건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였으니까.
"내, 내가..? 어.."
그래서였다.
당황한 척 슬쩍 말끝을 흐리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말이다.
그런 내 행동이 자신에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 것일까.
안 그래도 자신감이 철철 흐르던 카트린느의 어깨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렇게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앞까지 도달한 순간..
그대로 카트린느의 옆을 지나쳤다.
그에 카트린느와 나머지 둘의 반응이 엇갈렸다.
'어?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과 '혹시..?'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던 나머지 둘 마저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는 시선을 푹 내리깐채 벽쪽에 틀어박혀 있던 디아나의 앞으로 가서 섰다.
디아나가 내 접근을 알아차린 건 내가 그녀의 앞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제가 선택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고 귀를 닫고 있었던 것일까.
내 그림자가 제 위로 드리워지고 나서야 내 접근을 알아차린 그녀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괜찮으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다는 것처럼 목소리에 걱정을 한 가득 담아서.
그 한 마디에 마주하고 있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까부터.. 슬퍼보이셔서.."
그걸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꼭 마치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것처럼.
"차, 참견이었으면 죄송해요.."
"..."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리 내뱉은 순간 디아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왈칵 터뜨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