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14)화 (114/366)



〈 11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하늘에 맹세컨데 지금 이 상황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아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여자  꼬셔보겠다고 자기 뚝배기까지 터뜨리는 인간이 세상천지에 어디있단 말인가.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그렇기에 디아나한테 떠밀려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철렁했다.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없을텐데 그대로 넘어지면 책상이든 바닥이든 세게 부딪혀서 크게 다칠 것 같아서 잡아줬던 것인데..

설마 누가 알았겠냐고.

디아나가 그런 식으로 내 몸을 팍 떠밀거라는  말이다.

아마 제 딴에는 살짝 떠민다고 떠밀었던 것 같은데 다리에서 빠져나간 힘이 모조리 팔에 몰리기라도 했는지 순간적으로 팍하고 떠미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거기에 나도 아찔할 정도로 기분 좋게 싸지른 탓에 다리에 힘이 살짝 빠진 상태기도 했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디아나에게 밀려서 뒤로 넘어가던 순간, 침대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끝부분이 뾰족하게 서 있는 철제 기둥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말 그대로 천운이었다.


그걸 떠올리는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기둥의 존재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즉시 몸을 비틀면서 쓰러지는 방향을 옆으로 틀지 않았다면?

분명 이 정도로, 그러니까 머리가 살짝 찢어지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사람의 머리가 아무리 단단해도 철보다는 못하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신기한 건 흘러내리는 피의 양을 보면 제법 찢어진  같은데 통증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진짜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라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이 잠시 통증을 망각해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슬슬..'

뭐라도 해줘야 할  같은데.


당장 통증같은 건 없었지만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느껴져서 위기감이라는 놈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살짝 실눈을 떠서 확인한 디아나에게서 움직일 기미같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옇게 질린 채 크게 뜬 눈만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을 뿐.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일까.


이대로 가면 진짜로 위험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 척하며 몸을 일으켜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꽤 크게.


누군가 문을 걷어차서 열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자뭇 살벌한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건..

"후으, 후우우..!"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것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레이시아였다.

내가 디아나한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뛰어온 걸까.

분노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날카롭게 갈린 눈을 한채  안으로 들어서던 그녀가 그대로 멈칫했다.


피냄새같은 거라도 났던 걸까.


그녀가 하얗게 질린 채로 굳어있는 디아나와 바닥에 엎어져있는 날 발견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녀에게도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던 걸까.


아니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있는 나 때문일까.


뛰어온 탓에 살짝 상기되어 있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그녀와 디아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디아나하고는 다르게 가해자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디아나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말이다.

일단 내 머리에서부터 쏟아지는 것부터 어떻게 해야한다고 판단한 걸까.

슬슬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시야 속에서 레이시아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안에 받쳐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벗어서 손에 쥐더니 그것을 이용해 내 머리에 난 상처를 꾸욱하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다음부터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눈을 쓸 수가 없었다.

셔츠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흐려지는 의식을 꼬옥하고 움켜쥔채 들려오는 소리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으니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손이 조금 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짜악-!

뭔가를 거칠게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레이시아가 디아나의 뺨을 후려갈기기라도  것일까.

이제 정말 여기까지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가 점점 더 먹먹해지는 걸 느끼면서 최대한 그것을 활짝 열어젖혔다.

뭐라도 하나 더 들어두기 위함이었다.

그런 내 귀로 들려온 건..

땡그랑-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소리 하나와..

"..제.. 불만.. 업..? 안은.. 내가.. 려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는 듯한 레이시아의 목소리였다.

딱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귓가로 울려퍼진 레이시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가물가물거리던 시야가 그대로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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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 시점****

디아나가 이안을 데려갔다는 걸 알게된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하다가 잠깐 바람이나 쐴 겸 집무실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 것인지 신이 잔뜩  목소리로 이안이 디아나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을 열심히 떠들어대던 두 년들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듣게 된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안이 디아나에게 끝을 고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었다.

그저 디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면서 학원을 빠져나갔던 그가 물에 젖은 생쥐마냥 처량하기 그지없는 꼴을 한채 돌아온 걸 보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뿐.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도 며칠내내 어디 아픈 사람마냥 시름에 잠겨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 살짝 짜증나기도 했었다.


끝냈다면 깔끔하게 털어낼 것이지 이미 끝나버린 것에 뭐 저리 집착하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신경 쓸 바에 차라리 이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고.

그렇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런 이안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는 힘들어하는 그를 다독였다.


어차피 디아나가 떨어져나간 이상 결국 그를 갖게 되는 건 자신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안이 그 앨리스라는 년과 간간히 만남을 갖는다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묵인했다.

어차피 그런 년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까.


그러기 힘들어서가 문제지 디아나가 상대더라도 진심만 다한다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년 하나쯤이야 뭐..

지금이야 이안이 자신이 심적으로 힘들 때 도와줬다는 사실 때문에  년한테 심적인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섣불리 손대지 않는 것뿐이지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게 옅어지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뒷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진 거라고는 일신의 재능 하나뿐인 평민 출신 기사를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니까.


직접 손을  필요도 없이 군부에 넌지시 일러준다면?

알아서 멀리 보내버릴테지.


그렇기에 결국 이안의 곁에 남는 건, 그를 갖게되는 건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확신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빨리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모양이다.


'안일했어.'


다시 한 번  사실을 인정한 순간 둘과 관련된 소식을 비료로 삼아 가슴 속에서 싹을 틔웠던 초조함이라는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감히 그 크기를 짐작키 어려운 초조함이 몸을 휘감았다.


초조했다.


더없을 정도로 초조했다.

초조해서 입술이 제멋대로 파들파들 떨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없는 불길한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오늘 일을 계기로 디아나가 이안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로인해 끊어졌던 둘의 관계가 다시금 이어지게 된다면?


자신이 설 곳은 사라져버리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디아나에게 돌아가겠지.


원래부터 이랬어야 한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서 그게 곧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과거의 자신에게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과거의 자신은 무슨 근거로 디아나가 그대로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생각해보면 근성하나만큼은 상당한 게 바로 디아나인데...

당연히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대책을 세워놨었어야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전해듣고 이렇게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헐레벌떡 뛰어가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떨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붙으려고 하는 둘의 관계를 보고 있자니 하늘이 정해놓은 운명이라는  있다면 둘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이미 패배를 염두에 두고 그딴 말도 안되는 변명이나 되뇌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끝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

그딴 게 대체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설령 둘이 정말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갈라놓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가야만했다.


다행히 둘의 행방을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어찌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디아나가 대놓고 일을 벌여준 덕분에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둘을 추적하는 건 길을 따라 늘어서있는 목격자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목격자라는 년놈들이 뒤늦게 등장한 자신을 보고 흠칫흠칫대다가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런 것들보다는 한시라도 빠르게 둘에게 닿는  더 중요했다.


저딴  신경써서 주춤주춤대는 사이에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흘러가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자신에게 있어 디아나가 복수의 장소로 이안의 기숙사방을 선택한 건 그야말로 천운이라  수 있었다.


덕분에 그리 멀리갈 필요도 없이 둘에게 닿을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둘이 들어가있는 방 앞에 도착한 순간,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와꽂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이쪽을 보며 소문이 사실이었다면서 수군대는 소리까지도.

그렇지만 그런 것들따위는 하등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으레 들려와야할 소리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한 문쪽이  신경쓰였다.


설마 이미 늦어버린 걸까.


이토록 서둘렀는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문이 꼭 네가 끼어들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굳게 닫혀있는 그 문을 열어버리게 되면 추측이 사실로 바뀌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 때문이었다.


그저 손만 뻗으면 되는 것을 앞에 두고 그토록 망설였던 것은.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도 이쪽을 향해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내오는 이들의 수는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게 못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그.. 전하.."

뒤에 서 있던 호위기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러지말고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걸까.

조심스럽게 귓가로 들이밀어진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로소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저 문을 열 결심을.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금속 특유의 서늘함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그게 꼭 곧 확인하게될 현실처럼 느껴졌다.

느껴졌지만..


움켜쥐고 있던 문고리를 놓지 않고 그대로 옆으로 돌렸다.

어쩌면 잠겨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문은 열려있었다.

급한 나머지 깜빡한 걸까.

혹시라도 따라들어올세랴 발로 문 아래쪽을 걷어차서 틈을 벌린 다음에 그 안으로 황급히 몸을 구겨넣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방 안에 발을 들인 순간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피 특유의 비릿한 냄새였다.

시작부터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조용한 것도 그랬다.


둘이 한창 뭔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면 갑자기  안으로 들어선 자신을 보고 뭐라도 반응을 보였을텐데 그런 것따위는 하나도 없이 그저 조용했다.

 침묵이 왠지 모르게  벼려진 칼끝마냥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불길했고.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한 불길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냄새가 풍겨져나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순간, 눈으로 박혀들어온 건..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이안은 잠이라도 든 것처럼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에서는 새빨간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리고 그를 그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장본인은 창백하게 질린 채로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순간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를.


분명 의도한  아니었겠지.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있는 것일 거고.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차린 순간..


쿵- 쿵- 쿵- 쿵-


심장이 아까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박동 속에 깃들어있는 감정은..

환희였다.

그것도 역겨울 정도로 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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