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가 이상하다.
자꾸만 날 미행하려 든달까.
아마 본인 딴에는 나름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다른 년놈들이라면 모를까 나한테까지 미행사실을 숨기는 건 무리였다.
그렇지만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래도 내가 앨리스와 밀회를 가지는 모습을 보고 저러는 모양인데 그런 거라면 섣불리 손대는 것보다는 조금 더 숙성시키는 게 나았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오늘은 꽤 바쁠 예정이었다.
가야할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기숙사 밖에 몰래 숨어있다가 은근슬쩍 내 뒤로 따라붙은 디아나의 존재를 모르는 척 하며 걸음을 옮겼던 건 말이다.
그렇게 카트린느의 오두막이 있는 숲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방에 틀어박혀있을 때 내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들렸었던 카트린느에게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도 보여줄 겸 대체 어디서 뭐하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주인공 놈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랬다.
주인공 놈이라는 놈은 고새 양심을 엿바꿔 먹기라도 한 것인지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내심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찾아올 거라고 생각헀었는데 말이다.
차마 내 얼굴을 마주할 엄두가 나질 않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 놈이 시체를 보고 얼만 안 탔어도 분명 둘이 손 꼭 잡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 사실을 놈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
아무튼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항시 시야에 넣어두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에 그놈과 사실상 운명공동체나 다름없는 내게는 놈의 행적을 파악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주인공 놈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큰 카트린느를 찾아갔던 것인데..
"..괜찮아?"
주인공 놈 이야기를 꺼내들 틈이 없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내 몸에 매달려 안부부터 물어왔으니까.
물론, 그런 카트린느의 관심을 사양할 이유는 없었기에 간신히 미소를 지은 것처럼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몸 주위를 빙빙 돌면서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기분이 살짝 이상했다.
성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내 허리춤을 간신히 넘는 꼬맹이한테 걱정을 받는다는 상황이 기묘하게 느껴졌을 뿐이니까.
지금 자기가 걸치고 있는 백의가 살짝 바닥에 끌리고 있다는 건 알고서 날 걱정하는 걸까.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여워서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꾹꾹 눌러서 참고 있으니 마침내 감별이 끝난 것인지 카트린느가 조막만한 손으로 날 이끌었다.
꽤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은 오두막 안의 풍경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개판이었다는 소리다
.
그러니 당연히 앉을만한 자리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접객용 테이블하고 소파 위에도 각종 자료들이 떡하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체 날 어디 앉힐 생각이냐고 묻는 것처럼 카트린느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자자, 여기 앉아."
조막만한 손으로 테이블과 소파에 쌓여있는 자료들을 대충 옆으로 밀어낸 카트린느가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밥은..? 좀 먹었어?"
그 말을 시작으로 카트린느가 그동안 묵혀놓았던 걱정들을 한 번에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카트린느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만큼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최대한 언급을 피했다.
밥 먹었냐라고 가볍게 안부를 묻는 듯한 느낌으로 들쑤셔도 되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까.
덕분에 대화는 중간에 끊어지는 일 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다다른 곳은..
"잠은?"
바로 그곳이었다.
어떻게 잠은 좀 잘 자고 있느냐.
그런 뉘앙스로 던져진 카트린느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여태까지 던져진 것들하고는 다르게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으니까.
말해 무엇하랴.
최근 들어 나는 제대로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좀 깊게 잠들만하면 방해꾼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비싸게 굴던 놈이 한 번 따이니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밤마다 내가 머무는 방을 찾아오는 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꼼꼼히 문단속을 하기에 그렇게 찾아온 밤손님들 중에서 아직 내 방에 발을 들여놓는데 성공한 년은 하나도 없었지만.
사실 그렇게 찾아와서 문이 잠겨있다는 걸 확인하고 그대로 돌아가는 년은 차라리 점잖은 축에 속했다.
문이 잠겨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놓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고리를 계속 잡고 흔들어대는 년도 가끔이지만 있었으니까.
꼭 마치 억지로 열어젖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뭐하는 년들인지..'
정체도 모르는 야만족한테 따였다고 하니 기사부 1위라는 타이틀이 좆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밤마다 찾아오는 년들 때문에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는 걸 반복하다보니 요즘 알게 모르게 피로감이 장난 아니었다.
자다가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그대로 밤을 쭉 새는 경우도 몇 번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자신의 사저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레이시아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제 고작 며칠이라서 참고 있는 것이지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진짜 빡돌아서 밤에 찾아오는 년들에게 칼빵을 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답을 피하니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한 카트린느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뭐 내가 포로로 잡혀있을 때 겪은 일들 때문에 쭉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본 것일까.
내가 상처입을까봐 나름대로 숨겨보려 한 것같지만 날 향한 눈빛 속에 미약하게나마 안쓰러움이 맴돌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게 틀림없었다.
명백히 그녀의 착각이었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그걸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의 착각이라면 내게 나쁠 건 없었으니까.
대신 살짝 시선을 내리깔면서 쓰게 웃어보이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줄래?"
카트린느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니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이내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자그마한 상자였다.
사이즈는 카트린느의 손을 두 개 합쳐놓은 것보다 살짝 큰 정도?
물론, 꼬맹이 버전일 때 기준이고.
그래서 대체 이게 뭘까.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그걸 잠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올려 맞은 편에 앉은 카트린느를 향해 던지니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팔랑거렸다.
한 번 직접 확인해보라는 것처럼.
'대체 뭐길래..'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올리니 쬐끄만한 사이즈 치고는 꽤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 안으로 착 감겨들었다.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쬐끄만한 놈이 이런 무게감을 내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곱게 밀봉되어 있는 입구 쪽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올리니 이내 눈으로 들어온 건..
"..초?"
상자 사이즈 만큼이나 자그마한 크기의 양초들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초같지는 않았다.
일단 냄새부터가 굉장히 묘했으니까.
식물의 줄기같은 걸 꺾으면 날 것 같은 그런 냄새라고 해야할까.
그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색깔도 흰색이 아니라 초록초록했고 말이다.
"향초야. 그.. 잘때 피워놓으면은 자는 데 좀 도움이 될 거야."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떼어내지 않고 있으니..
"그.. 진이 나한테 와서 부탁하더라. 네가 요즘 밤에 잠을 못자는 것 같다고."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주인공 놈의 근황이 튀어나왔다.
아예 재료까지 들고와서 부탁했다는 카트린느의 말에 '아..'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입밖으로 흘리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공 놈이 그새 양심을 다른 곳에 팔아먹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그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 진짜 구하기 어려운 건데 어떻게 어떻게 구해왔더라."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던 카트린느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향초가 완성되는데 들어간 주인공 놈의 노고를 어필해왔다.
혹시 내가 남부에서 겪은 일로 인해 주인공 놈을 원망하게 되었을까봐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다.
카트린느 입장에서는 나나 주인공 놈이나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귀여운 동생들일테니 말이다.
"음.. 네.."
그렇지만 주인공 놈의 입장을 대변하려 드는 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서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그, 그래서 말인데.."
다시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카트린느가 한 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지금 한 번 써볼래?"
그와 함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내게 벙찐 표정을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네..?"
이건 또 뭐하자는 걸까.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한 척 그런 대답을 돌려주니 내가 그리 나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카트린느가 곧바로 설명에 착수했다.
"그게 실은.."
요약하자면 이런 걸 만드는 건 처음이라서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신이 안 선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같은 건 딱히 없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얘는 지금 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고 있긴 한 걸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트린느를 바라보니 그런 내 시선이 제법 따끔했는지 카트린느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나, 나도 실험을 해보려고 했지이. 그런데 말했다시피 거기에 들어간 게 꽤 고급이라서.."
테스트에 쓸 분량을 따로 빼기가 힘들었단다.
"그리고 내 기준에 맞춰서 고쳐버리면 너한테는 제대로 된 효과가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
"효과가 상정했던 것보다 약하면 딱히 상관없는데 훨씬 강하게 나오기라도 하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
간단히 말해 자기가 상황을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한 지금 데이터 확보를 위해서 협조 좀 하라는 소리였다.
'어떻게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답지 않게 사족이 긴 걸 보면 살짝 불안하긴 한데 그와 별개로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주인공 놈이 구해왔다던 귀한 재료라는 놈의 효능도 살짝 신경쓰이고 말이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알겠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저, 정말?!"
내 눈치만 보고 있던 카트린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볼은 살짝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꼭 일생일대의 프로포즈라도 받은 것같은 모습이라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기뻐하나 싶었으니까.
"네, 뭐..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참이었으니까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요 며칠동안 제대로 못 잤다고.
덕분에 지금 내 어깨에는 그동안 누적된 피로감이 차곡차곡 적립되어있었다.
해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카트린느한테 점수나 따둘 겸 쌓인 피로나 좀 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트린느가 날 제 침실로 안내했다.
꼬맹이 모습이 되면서 농염함과 함께 수치심도 같이 증발해버린 것일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의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대로 침대를 향해 돌진한 카트린느가 짧은 팔을 허우적대며 흐트러진 침대보와 이불을 잡아당겼다.
자그마한 모습으로 끙끙대는 꼴이 살짝 안쓰러워서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같이 잡아당기니..
"엑..!"
침대와 벽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틈 안으로 말려들어가있던 이불이 쑥 빠져나오며 카트린느의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뒤통수를 통해 바닥하고 찐한 키스를 주고받을 기세라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고, 고마워.."
그랬더니 품에 폭 안긴 채 날 올려다보며 슬쩍 얼굴을 붉히더라.
꼬맹이 모드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원래 모습이었다면 그 압도적인 볼륨감을 느낄 수 있었을테니까.
그렇게 살짝 아쉬움을 느끼고 있으니 내 품 안에 안겨있는 게 민망했는지 호다닥 내 품을 탈출한 카트린느가 그나마 좀 가지런하게 변한 침대를 손으로 팡팡 두들겼다.
팡팡-!
"자! 여기 누워!"
그래서 시킨 대로 누웠다.
그렇게 자리에 누웠더니 어디선가 둥글넓적한 접시 하나를 가져온 카트린느가 아까 상자에서 따로 빼서 챙겨온 향초 하나를 그 위에 올렸다.
"자아, 그럼.."
입고 있는 백의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걸 보니 이제 불을 붙이려는 모양인데 정말 맡겨도 괜찮은 걸까.
외견이 꼬맹이다보니 솔직히 안심이 되질 않았다.
않았는데..
착-!
의외로 능숙하게 잘하더라.
자연스럽게 초에 불을 붙인 카트린느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 그럼.."
배를 덮고 있던 이불을 목 바로 밑까지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끼이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완전히 홀로 남겨진 순간.
아까 향초에서 나던 것보다 훨씬 더 진해진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음..'
귀한 재료를 썼다더니만 확실히 효과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초를 피운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정신이 살짝 몽롱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이대로 좀 더 있으면 어느 순간 스르륵 잠들지 않을까.
그렇게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편안함을 느끼며 살짝 몽롱한 기분에 휩싸인 채 눈을 꼭 감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체감상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끼이이익-
아까 울려퍼졌던 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로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