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지나가다 귓가로 들려온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딘가 살짝 엇나간채 삐걱거리던 정신이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것은 헛웃음이었다.
말 그대로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어째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것마냥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들이 하나같이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들 뿐이었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스승님이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이안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검밖에 모르셔서 하루종일 연무장에 틀어박혀서 사시는 분이?
왕녀 전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이안을 상대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지 뻔히 알고 계실텐데 그런 짓을 하실 리 없었다.
살짝 짖궃은 구석이 있으시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선한 분이니까.
앨리스하고 구관으로 들어갔다는 건..
그 부분에서만큼은 살짝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제멋대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머릿속으로 피워올렸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가 이안을 찾기 위해 남부에 잔류하기를 자처했었다는 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에..'
그걸 근거로 삼아서 자꾸만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이 머릿속으로 피어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다고 되뇌이면서.
그래, 저 소문은 아마도.. 월말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한창 구관을 드나들 때 누군가 그 모습을 우연찮게 목격했던 게 와전된 것일 거다.
과장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니 말이다.
두 손 꼭 잡고 구관으로 들어갔느니 뭐니 하는 말은 분명 소문을 더욱 자극적으로 바꾸기 위해 제멋대로 첨가한 조미료일 터.
맘같아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마냥 열심히 입을 털어대고 있는 년들의 앞으로 뛰쳐나가 개소리 좀 그만 지껄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본심은 그랬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그래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부류들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신도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자신이 스승님의 선택을 받고 그 분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저런 부류들은 빽을 썼느니 뭐니 하는 식으로 근거도 뭣도 없는 소리를 열심히 떠들어대곤 했었다.
오로지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말 그대로 개소리였으니까.
그랬었는데 자꾸만 떠들어대는 게 거슬려서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으로 그런 말을 떠들어대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대련까지 해가며 친히 알려주었다.
왜 네가 제자로 뽑히지 않았던 건지를.
그랬더니 그걸 두고 또 소문이 돌았었고.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저런 부류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은 관심도 먹이가 될만한 것도 주지 않는 것이라는 걸.
그랬지만..
자꾸만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람 심리상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확인해보자.'
그리 결심했던 것은.
이안을 의심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다.
그를 믿는다.
그렇지만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이 두 눈으로 그의 결백함을 확인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더라도 지금처럼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이안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또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버린 걸까.
그럴 지도 몰랐다.
그 때 자신의 앞에서 말을 전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아파보였으니까.
어쩌면 지금쯤 자신이 그러했듯 방 안에 틀어박혀서 끙끙 앓고 있을 지도 모르지.
침대 위에 쓰러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니 초조함이라는 것이 가슴 속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당장이라도 그의 방으로 달려가 그의 안위를 확인하라 외쳤지만 있는 힘껏 내리눌렀다.
그건 정말 자신만 생각하는 행동이었으니까.
자신으로 인해 아픈 이안에게 그런 짓을 해버린다면 그를 더 아프게할 뿐이다.
멍청한 짓은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안 그래?
그래서 참았다.
참고 기다렸다.
이안이 괜찮아져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기숙사 앞으로 출퇴근을 반복했다.
덕분에 몇 번이나 훈련을 빠지게 되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딴 건 지금 하등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마냥 서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그건 또 이안에게 상처가 될테니까.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몸을 숨긴 채로 이안이 괜찮아지는 것만을 기다렸다.
누군가 그 노력을 알아주었던 것일까.
마침내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만에 보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결 더 초췌하게 변해있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걸까.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걸까?
저렇게 불안정한 몸상태로 말이다.
혹시 훈련에 출석하러 가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이미 충분히 많이 빠진 상황이니까.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라 교수님들도 다들 이해하실테지만, 성실한 이안으로서는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겠지.
그렇지만 저런 몸상태로는 무리일텐데..
그래서였다.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뒤로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던 것은.
혹시라도 중간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지켜보고 있다가 위험해보이면 바로 달려가 도울 생각이었다.
이안이 쓰러지는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살짝 거리를 둔채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익숙한 붉은 색이 시야 끝에서 일렁거렸다.
잊을 래야 잊을 수가 없는 색깔.
그것을 발견한 순간 뭔가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뭔가가 쿵하고 떨어져내렸다.
동시에 심장이 불안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한층 격렬해진 건..
앨리스를 향해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어보이는 이안의 모습을 목도하고 나서부터였다.
"왜..?"
왜 웃어주는 거야?
나한테는 그런 미소나 지어놓고.
왜 저년한테는 반갑다는 것처럼 그렇게 웃어보이는 건데?
응?
둘은 꼭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같았다.
반가운 미소로 앨리스를 맞이하는 이안과 그런 이안의 미소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스리슬쩍 다가가 그의 팔뚝을 부여잡고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 앨리스의 모습은 말이다.
그렇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동시에 더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둘 사이로 흐르는 묘한 분위기는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살짝 긴장되면서도 어딘가 풋풋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분위기.
그건 분명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과 이안의 사이에서 흐르던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이안과 앨리스 사이에 내려앉은 채 자신을 상대로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여기에 네가 끼어들 자리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와 함께 머릿속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년들이 열심히 떠들어대던 이야기였다.
누군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려퍼지는 그 말들에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었으니까.
응, 그럴 리가 없잖아?
저건 그냥.. 그래, 은인을 상대하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이안은 착하니까.
자신을 찾기 위해 남부에 남기를 자처했던 저 년의 노력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거겠지.
이안도 참, 쓸데없이 착해서 문제라니까.
그런 건 그냥 고맙다는 말 한 마디로 퉁치면 될텐데 몸도 안 좋으면서 굳이 여기까지 걸어나오기는.
그나저나 저 년은 대체 언제까지 이안의 몸을 만지고 있을 생각인 걸까?
부담스러워하는 건 눈에 안 보이나?
예전부터 은근슬쩍 자신과 이안 사이에 끼어들 때부터 느낀 것이긴 하지만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년이었다.
지금의 만남도 분명 은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이안을 은근히 압박한 끝에 성사된 만남이겠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도와줘야 할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나서려고 하니 눈앞으로 닥쳐온 건 현실이었다.
자신이 대저 무엇이기에?
무슨 명분으로 그를 돕는단 말인가?
이제 자신과 이안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을.
아니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니 그럴 리 없었다.
암, 그렇고 말고.
이안이 자신의 옆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건 자신에게 폐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런 것따위 신경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안이 자신의 곁을 떠날 이유도 없었다.
그 사실을 이안은 아직 모를테니 그에게도 이런 자신의 마음을 전해줘야겠지.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최대한 진중한 어조로 다시 한 번 전한다면?
이안도 분명 이런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리라.
그리 생각하면서 둘을 향해 나서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채 이안의 여기저기를 살피던 도둑고양이 년이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힘없이 웃으며 도둑고양이 년의 행동을 받아주고 있던 이안이 비슷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앞을 향해 내뻗어지던 다리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우뚝하고 정지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뭔가가 삐걱삐걱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파열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멈춰서있으니..
도둑고양이 년이 이안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이끌기 시작했다.
대체 어딜가는 걸까?
응?
어딜 가는 건데?
구관에는 왜 가?
이렇게 대낮부터?
모이기로 한 시간은 저녁이었잖아?
그런데 왜 벌써부터 거길 가는 건데?
주변은 또 왜 살피는 거야?
왜 남들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뭘 할 생각이길래?
쿵-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던 둘이 들어간 강의실의 문은 아주 살짝이긴 하지만 열려있었다.
그렇기에 얼굴을 가져다대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너머의 풍경을 말이다.
그렇지만 차마 그곳에 얼굴을 가져다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츕-
문틈 사이로 새어나와 귓가로 울려퍼지는 소리 때문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뭔가가 서로 얽히며 나는 질척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울컥하고 배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훅 치밀어올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이대로 눈을 뜬다면 저택의 익숙한 천장이 자신을 반겨주겠지.
그 옆에는 이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채 자신의 손을 꼬옥하고 잡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럼 그런 그를 상대로 말하는 거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꿨노라고.
그리 말하면 이안은 피식하고 웃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줄테지.
그러니까 꿈에서 깨기만 하면 된다.
깨기만 하면 되는데..
'왜..?'
왜 깨질 않는 거야?
이미 충분히 끔찍하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꿈 속인 건데?
응?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으윽.. 서, 선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온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열기가 잔뜩 배어 살짝 허스키하게 변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깨달아버렸다.
여긴 꿈같은 깨고 나면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세계따위가 아니라는 걸.
현실을 깨달은 순간 찾아온 건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끔찍함이었다.
그만큼 끔찍했다.
믿음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은 말이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도저히 그걸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안이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그렇게 도망쳤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다시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망치질 한 번에 산산조각나버린 믿음이긴 하지만 그렇게 조각조각 나버린 것이라도 건지기 위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이안의 뒤를 쫓았다.
그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회, 회장님.. 자, 잠시만요.."
"구, 굳이 참지 않아도 된다. 본녀는 준비 됐으니까."
더 가혹한 현실이었다.
손이 찔리는 것까지 감수해가면서 꼬옥하고 간절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날카로운 파편들이 가루로 변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제멋대로 손을 빠져나가버리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다시 손 안에 담아보려 했지만 내뻗은 손은 애꿏은 허공만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이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시커멓고 질척질척한 감정이었다.
분노가.
원망이.
확 치밀어올랐다.
이걸 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였다.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소리로부터 귀를 틀어막고 몸을 돌렸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