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기엔 찝찝할테니 먼저 씻으라는 레이시아의 호의, 난 그런 그녀의 호의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확실히 어제 뒷처리도 안하고 그냥 자버린 탓에 몸 곳곳이 끈적끈적했으니까.
특히나 하복부 쪽이 그랬다.
누가 거기에 대고 뭔가를 왈칵 쏟아낸 탓에 끈적끈적한 수준을 넘어서 간지럽기까지 하달까.
"그럼.."
그렇게 침실에 딸려있던 욕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니..
스륵-
다른 욕실을 이용한 것인지 레이시아가 머리카락 끝을 촉촉하게 적신 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이제 막 속옷을 다 갈아입고 스타킹을 신고 있었던 것일까.
"앗.."
화장대에 딸린 자그마한 의자를 발로 꾸욱하고 즈려밟은 채 무릎 쪽에 걸쳐있던 흰색의 스타킹을 허벅지쪽으로 조심스레 잡아당기고 있던 그녀가 날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칫했다.
당황한 듯한 표정은 덤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타킹하고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속옷으로 감싸인 그녀의 육체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차마 거기서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그렇지만 억지로 억지로 눈을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척 말을 더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노린 것 같은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중간에 약간의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결국에는 둘다 멀쩡해진 모습으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고 나니?
"왕녀님-"
똑똑하고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문 너머에서 시녀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가지고 왔다는 말.
"잠시.."
그 말에 반응한 레이시아가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내 앞으로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김이 풀풀 올라오는 찻잔이 두 개 올려진 쟁반 하나가 들려있었다.
내가 욕실로 들어가서 몸을 씻는 사이에 시녀한테 미리 지시해두기라도 했던 걸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마시고 시작하자는 것처럼 그녀가 들고 온 것중에 하나를 내 앞에다가 내려놓았다.
"마시면 좀.. 마음이 편해질 거다."
일부러 진정효과가 있는 걸로 준비했다면서 조심스레 차를 권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앞까지 들이밀어진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그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열기엔 내 눈치가 보였던 걸까.
레이시아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덕분에 그렇게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살짝 긴장한듯한 시선이 레이시아로부터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걸 표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있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쉬지 않고 꼼질거렸다.
그 모습을 힐끗거리며 속으로 타이밍을 재다가..
입술을 한 번 깨물어준 다음에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올려 입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찻잔 안에 든 것을 조심스레 들이키니 긴장으로 굳어져있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퍼졌다.
살짝 과할 정도로 기뻐해서 혹시 차 안에 뭐라도 타놨나 싶었지만 이질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것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한창 경계심이 날카롭게 곧추 서 있을 내가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인 게 기쁜 거겠지.
그렇게 레이시아가 내어준 차를 홀짝홀짝대다가 그것이 주는 온기에 마음을 놓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간단히 요약하면 포로로 잡혀있을 때 억지로 마시게 된 미약의 부작용으로 이따금씩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성욕이 확확 솟아오른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것저것 따져보면 비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럼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혹시.."
그런 내 발언에 레이시아는 이제서야 이해가 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네, 언제 부작용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서.."
차마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밑으로 내리까니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안타까워 하면서도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방에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어서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방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는 것처럼 낙담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운 순간이었다.
레이시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뭘 하려는 걸까.
호기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라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고개 숙인 자세를 유지한 채 바닥에 깔린 카페트의 무늬를 헤아라고 있으니..
힘을 꽉줘서 허옇게 질려있던 내 손등 위로 레이시아의 손이 포개졌다.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말거라. 네 잘못도 아니지 않느냐."
목소리도 그렇고, 조심스럽게 손등을 토닥이는 손길도 그렇고 무엇하나 자애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내 옆자리를 꿰찬 레이시아가 날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었다면 진작에 그녀한테 뿅가고도 남았겠지.
남녀할 것 없이 모두 헤롱헤롱하게 만드는 미녀가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오구오구 해주고 있는데 반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터.
"..정말로 그런 걸까요."
그래서 거기에 넘어간 척을 하니 아까부터 귓가로 울려퍼지던 레이시아의 호흡이 일순간 거칠어졌다.
다 됐다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흥분한 것일까.
그렇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원래의 호흡으로 돌아간 그녀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혹시 그동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던져진 물음.
언젠가는 나올 거라 생각했던 그것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몸을 움찔해보였다.
그리고는..
"혹여 답하기 부담스러운 거라면.."
"아, 아닙니다. 호, 혼자서.. 혼자서 해결했습니다.."
레이시아가 한 발 물러나는 타이밍에 맞춰서 누가봐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어색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믿을 리 없었다.
간밤의 일로 이미 그녀는 눈치챈지 오래일테니까.
내가 그동안 앨리스를 통해 '처리'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흐음.. 혼자서..?"
그래서일까.
되묻는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살짝 서늘했다.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예, 조금 힘들긴 해도.. 시간을 들이면은.."
혼자서 해결 가능하다고 말끝을 얼버무리니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 가운데서 레이시아의 눈치를 살피는 척 살짝 티가 나게 그녀 쪽을 힐끔거리고 있으니..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레이시아가 현실이라는 놈을 눈앞으로 들이밀어왔다.
그 부작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데 매번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레이시아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마도 그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
아까보다 훨씬 더 진중하게 변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그와 함께 손등 위로 포개져있던 레이시아의 손이 내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너만 괜찮다면.."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귓가로 울려퍼지던 목소리가 끊어지더니 꼴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내가 도와주마."
그 뒤로 이어진 건 내가 기다려 마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 하지만.."
그렇다고 덥썩 물지는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히려 한 발 물러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랬더니..
꽈아악-
내 손을 움켜쥐고 있던 레이시아의 손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이안."
단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런 목소리로 날 부른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네가 뭘 마음에 걸려하는지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것은 신경쓰지 말고 너만 생각하라고.
"그, 그렇지만 회장님께 폐를 끼칠 수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반박을 해봤다.
해봤더니..
"그건 신경쓰지 말거라. 어차피.. 이리 되지 않았느냐?"
레이시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일이 이렇게 됐는데 어쩔 거냐는 식의 면죄부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에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망설이는 척을 하고 있으니..
"아니면은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방금까지 울려퍼지던 것에 비하면 온도가 확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아, 아뇨.. 그, 그런 건 아닌데.."
그에 다시 한 번 당황한 척을 하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이시아가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럼 사양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라도 그대를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니까."
"보은..이라고 하심은.."
"비록 한 명뿐이라고 해도 그대는 왕국민을 위해 희생한 것 아니더냐."
그리고 왕족인 자신에게는 그러한 희생에 보답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며 레이시아가 내 손등 위에 포개놓고 있던 손에 꼬옥하고 힘을 주었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세상 어느 왕족이 제 육체까지 써가면서 아랫놈에게 보답을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감격한 척을 했다.
그 사건 이후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준 건 레이시아가 처음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내 반응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일까.
흘깃하고 시선을 던져 확인한 레이시아의 입꼬리는 묘하게 움찔대고 있었다.
꼭 마치 미소를 짓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무래도 방금 내 반응으로 다 끝났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하지만 제가 옆에 있으면 왕녀님의 명성에도 누가.."
아직 우리가 넘어야할 산은 두 개나 남아있었다.
해서 그 중에 하나를 눈앞으로 들이미니..
"흥, 본녀가 앉아서 떠드는 것밖에 못하는 것들의 잡소리를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레이시아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쳐댔다.
자신은 그런 것따위 신경쓰지 않으니 너도 더는 그 따위 말들을 신경쓰지 말라는 것처럼.
그에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면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알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맞닿아있던 레이시아의 손이 움찔하고 반응을 보인 순간.
"대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조건을 덧붙였다.
그런 내 발언에 레이시아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으니 절로 관대해진 것일까.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레이시아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그.. 디아나 선배한테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역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디아나의 이름을 꺼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이 꽤 격렬했다.
내 입에서 디아나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관대함으로 물들어있던 레이시아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으니까.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 순간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간 감정은..
너무 많아서 일일히 묘사하기 힘들 정도였다.
분노부터 시작해서 그 정체를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질척질척한 것까지.
그렇게 오만가지 감정이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나갔지만, 레이시아는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왜지?"
그렇지만 그걸 완전히 정리하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내게 이유를 묻는 레이시아의 목소리 속에는 미약하게나마 그 편린이 깃들어있었다.
"선배가.. 저로인해 더 상처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미 충분히 힘들텐데 그런 사람을 더 힘들 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뉘앙스로 말을 내뱉으니 레이시아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디아나 선배는 착한 사람이니까요. 혹시라도 소식을 듣게 된다면 저나 회장님을 탓하기 보다는.. 자책하는 걸 택할 겁니다."
내 읊조림에서 뭔가를 느낀 것일까.
레이시아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혹시 디아나를.."
"네.. 정리.. 해야겠죠."
그게 디아나를 위한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처럼, 그렇기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풀었다.
이빨에 꽈악하고 짓눌려있다가 해방된 입술이 파르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던져진 물음에 힘없이 웃어보였다.
누가봐도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