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라도 알 것이다.
농담이었다고,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얼버무린 그 말이 실은 이안의 진심이라는 것쯤은.
그러니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말이야 말로 이안의 진심이겠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머릿속을 덮어왔다.
평생 쫓기고 살 생각이 아니고서야 남자가 학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었으니까.
학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누군가와 맺어지면 된다.
애초에 그걸 위한 장소니까.
그리고 이안이 염두에 두고 있을 그 누군가는 아마도..
디아나겠지.
그래서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건.
지금 여기서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내든 이안에게는 상처밖에 되지않을 것 같았으니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그걸 이만 여기서 대화를 끝내자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인지 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눈동자를 채찍질해 그의 얼굴을 쫓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알고 싶었으니까.
방금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 내뱉어진 것이었는지를.
그렇게 시선을 그에게 맞춘 순간, 기분 탓인지 흐릿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인사.. 꼭 드리고 싶었거든요."
왜?
차마 내뱉지 못한 물음이 목에서 턱하고 걸렸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왜?
왜 꼭 오늘이었어야만 했는데?
감사인사야 언제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어야만 했던 걸까.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차마 입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그 말에 대한 이안의 반응을 확인한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마 그 물음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뭐가?
시선을 들어올려 다시 한 번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움찔하는 기색과 함께 파리한 얼굴 위로 번져나가는 감정의 편린을.
"..아니에요. 방금 건.. 잊어주세요."
단숨에 증발해버린 그건 대저 무엇이었을까.
"그나저나 좀.. 죄송하네요. 피곤하실텐데 저 하나 편하자고 억지 부린 것 같아서.."
왜?
왜 자꾸 사과를 하는 걸까.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가 미안할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럼.."
이만 들어가보겠다는 듯 그가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제 정말 다 할 말이 끝난 걸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움찔-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제멋대로 옷깃을 노리고 뻗어져나가던 그것을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망설임이었다.
그 망설임이라는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디아나겠지.
자박-
망설이는 사이에 한 걸음만큼 거리가 멀어졌다.
자박-
멈칫한 사이에 한 걸음 더 네가 멀어졌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걸어간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역시 무리하고 있었던 걸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은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차마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같은 이름의 망설임이 손목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걸 드러내선 안 된다.
자신은 그저 둘 사이에 긴 불순물일 뿐이니까.
이걸 드러낸다면?
안 그래도 힘들 그를 더 힘들게 할 뿐이겠지.
그래서 참았다.
참을 생각이었는데..
"으윽.."
귓가로 울려퍼진 소리를 들은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사실상 한계였던 걸까.
나지막한 신음성과 함께 이안이 얼마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걸 본 순간 이미 두 다리는 그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숨이라도 막히는 걸까.
가슴께를 부여잡고 몸을 파르르 떨어대는 그에 대한 걱정을 한웅큼 씹어삼키며 성큼 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오, 오지 마.."
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 것일까.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뻗었던 손이 날카롭게 내쳐졌다.
그와 함께 손등 쪽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거기에 관심을 줄 겨를같은 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으므로.
"으윽.. 큭.."
고통을 삼키는 듯한 신음성과 함께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이안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이안의 눈빛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초점없이 흐릿해진 눈동자 속에서 이성의 빛은 단 한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흐릿하게 물든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꼭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이나 보여줄 법한 그런 모습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도 두려운 것일까.
바로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얼굴이 지금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그런 모습을 한채로 이안은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뭔가를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태를 확인하기만 하면 뭐라도 대책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대책이 생각나기는 커녕 오히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하면 좋을까.
뭘 하면 널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려 해도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그저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만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어찌할바를 모르고 초조함에 입술만 짓씹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허윽.."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살짝이지만 열기가 배어있는 신음소리, 그것을 들은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이안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봤었던 보고서에 적혀있던 문구였다.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그 보고서에는 분명..
『납치되어 있는 동안 쭉 강제로 미약을 섭취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로인한 부작용이 우려됨.』
그래,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 보고서에서 언급했던 부작용이라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나타나고 있는 거라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이안이 순식간에 이성을 잃어버린 것도,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은 그에게 있어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순간의 기억과 이어져있는 도화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니까.
그리고 만약 그런 거라면 이안을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어쩔 수 없이 '그걸' 상상하게 되었던 것은.
그 상상 뒤로 따라붙은 건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강렬한 죄책감이었다.
이안은 저렇게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런 그를 앞에두고 지금의 상황을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따위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혐오라는 이름의 늪이 몸을 빨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차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스스로가 혐오스러웠으니까.
그렇게 늪 속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에..
"으으윽.."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아까보다 고통도 열기도 조금 더 짙어진 듯한 그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깨달았다.
추측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정신을 차린 즉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맞닿은 곳에서 흠칫하고 접촉을 꺼리는 기색이 돌아와 가슴이 철렁했지만 입술을 꾹 깨무는 것으로 무시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리고는 여전히 착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쉽지는 않았다.
약을 먹고 어려졌던 때하고는 차원이 다른 묵직함과 딱딱함이 몸을 덮쳐왔으니까.
어찌나 무겁고 딱딱한지 그와 맞닿아있는 곳들이 제멋대로 흠칫거렸다.
그랬지만 이를 악물고 그의 몸을 잡아끌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붙겠다고 말하던 호위를 그냥 데리고 올 것을.
아예 떼놓고 오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르게 했다면 이안을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안전한 곳까지 데려갈 수 있었을텐데.
왜 자신은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괜히 분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순간.
"저, 전하. 이게 무슨.."
수풀 쪽에서 이안의 쪽지를 가져다주었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었던 걸까 기사의 얼굴은 당황으로 젖어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즉시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는 이안을 넘겼다.
솔직히 그러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래야 한시라도 빠르게 이안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줄 수 있을테니까.
맘같아서는 옆에서 부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평소에 하는 운동이라고는 서류에 사인을 하면서 하는 손목 운동 정도가 전부인 이 몸으로 거들어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할 터.
그래서 아쉬운대로 옆에서 걸으며 호위기사의 등에 업힌 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얼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 한층 더 수척하게 보이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져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었다.
"으윽.."
많이 괴로운 걸까.
하얗게 질린 입술이 살짝 눌린 채로 파르르 떨리는 그 모습이 그토록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혹여라도 이안의 상태가 여기서 더 나빠지지는 않을지 꼼꼼하게 살피며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그.. 전하..? 어디로 가면.."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재촉에 못 이겨 걸음을 재촉하던 기사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기숙사로 이어지는 길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기로 가야한다고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저로 갈 겁니다."
그렇지만 무시했다.
기숙사로 가봐야 제대로 된 처치도 받지 못하고 밤새 끙끙 앓을 게 뻔하니까.
어쩌면 기사의 등에 업혀있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될 수도 있었고.
그에 비해 자신의 사저라면?
의사를 불러 제대로 된 처치를 받는 것도 가능했고, 시녀들하고 기사들 입단속만 제대로 한다면 소문이 퍼져나갈 가능성도 극히 적었다.
"하, 하오나 전하.."
그래서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간곡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기사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몸을 사저로 통하는 길쪽으로 떠밀었던 것은.
내켜하지 않는 기사의 등을 떠밀어 사저에 도착한 순간, 이안을 침실에 내려놓게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뉘일만한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주인없는 침대라고 해봐야 시녀들을 위해 가져다놓은 것뿐인데 그건 너무 작았다.
그렇게 이안을 침대 위에 뉘인 순간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안이 저토록 고통스러워 이유를.
움직이기 편하도록 살짝 넉넉하게 재단된 제복 바지를 팽팽하게 바꿔놓은 뭔가가 바지 위로 그 흉악하기 그지없는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 순간 누군가 꼴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순간 기분이 뭐라 이루말할 수 없이 확 나빠져서..
"..나가세요."
"하, 하오나.."
"어서."
기사를 문밖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문을 걸어잠군 순간.
철컥-
울려퍼지는 쇳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순간 귓가로 울려퍼진 건..
"흐으.."
아까보다 조금 더 뜨겁게 변한 이안의 목소리였다.
그에 반응한 고개가 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바지가 답답한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많이 괴로운 걸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뒤척거림을 멈추지 않는 이안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이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그렇기에 더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걸 정말 행동으로 옮겨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문을 등진 채로 오도카니 서 있으니..
"윽.."
더는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침대보를 꽉 움켜쥐고 있던 이안의 손이 스스로의 품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 안을 거침없이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투둑-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졌다.
그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이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앨리스.. 선배.."
생경하기 그지없는 이름이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달콤함을 잔뜩 머금은 채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
뚜둑하는 소리를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