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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103)화 (103/366)



〈 10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무리 레이시아와 친한 그녀라도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특혜를 허락받지 못했던 것일까.

디아나는 치안대에서 나온 병사들로 만들어진 벽 너머에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을 들은 순간, 그리하여 뭔가 절박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그만큼 타이밍이 좋지 않았으니까.


상황도.


그렇지만 디아나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마 내가 그녀였다고 하더라도 저랬을 것이다.

그만큼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한시라도 빨리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을테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다.


디아나의 외침에 반응해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주친 시선을 내리깔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외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기 직전에 디아나의 얼굴에 충격이 번져나가는 게 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차마 거기까지 신경 써줄 겨를은 없었다.

아까부터 날 따라 움직이던 치안대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처럼 생긴 기사가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면서 날 재촉했으니까.


그래서였다.


디아나를 뒤로한채 역을 빠져나왔던 것은 말이다.


"저기에 타시면 됩니다."

레이시아는 무려 마차까지 준비해주었다.

덕분에 마차를 빌린다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사히 학원으로 복귀할  있었다.

마차가 날 내려준 곳은 다름아닌 학원의 후문이었다.

어쩌면 학원으로 통하는 입구에도 사람이 득실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잠잠하더라.

학원 측에서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일까.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무사히 기숙사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날 거기까지 바래다 준 앨리스에게 잠시 작별을 고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럼.. 쉬어."


내가 걱정되는 걸까.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휴식을 방해핮 않겠다는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한창 수업이 진행될 시간이라서 그런 걸까.

기숙사 안은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 없이  비어있었다.

덕분에 안쓰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사감의 눈빛 한 번만 받고 무사히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온 순간..


나는 그대로 그곳에 틀어박혔다.

방으로 들어간 놈이 시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을 하질 않으니 걱정이 됐던 걸까.

틀어박혀있는 동안에 사람이 몇 번이나 왔다 갔었다.

그렇게 찾아온 이들 중에는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린 사감도 있었고, 앨리스도 있었으며, 카트린느와..


"이, 이안.."

"..죄송해요. 선배님."


디아나도 있었다.

내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내게 식사를 전해주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생존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며 그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을 돌려세우는 데에는 제발 돌아가달라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렇게 열차 안에서 몰래 챙긴 간식거리를 소모해가면서 버텼다.


솔직히 못할 짓이긴 했다.

매 끼니마다 문앞으로 배달되는 음식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문틈 사이로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겨대는데..

오죽하면 누군가 냄새를 이용해  방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부채질같은 걸 하고 있는  아닐지 의심까지  정도였다.

그렇게 방 안에서 농성하는 걸 택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농성한다면?


닫혀있는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억지로라도 날 방 안에서 끌어낼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앨리스가 위험했다.


아까 찾아왔을  찰칵찰칵하고 열쇠구멍에서 요상한 소리가 났으니까.

눈치껏 반대쪽에서 열지 못하도록 미리미리 틀어막아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뚫렸겠지.

'그러니까..'

딱 오늘까지가 한계였다.

방 안에서 버틸  있는 건 말이다.

마침 얼굴도 딱 알맞게 초췌해진 상황.


그렇기에 방을 빠져나갈 결심을 굳힐  있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겨둔 쿠키를 입 안으로 밀어넣는 것으로 움직이는데 쓸 열량을 보충한 나는 살짝 어질어질한 몸을 이끌고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사감이 순찰을 도는 시간대쯤이야 이미 파악해놓은 상태였기에 들키지 않고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기숙사를 빠져나와서..


기숙사와 동떨어져있는 레이시아의 사저로 향했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임에도 아직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잠을 이루질 못하고 있는 걸까.


제법 넓직한 사저 중에서도 유독 집무실만이 환하게 밝혀져있었다.


살짝 어질어질한 머리 탓인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불빛에 의존하여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거기 멈추도록."

서슬퍼런 목소리가 귀를 꿰뚫었다.

그와 함께 들이밀어진 것은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었다.


그렇게 날 향해 검을 겨눈 상대방은 명백히 날 경계하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지금 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한 케이프를 푹 눌러쓰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아래에 학원의 제복을 받쳐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경고조차 없이 바로 실력행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한 걸음을 더 내딛어도 그렇게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였다.


 안에서 챙겨온 쪽지를 손에서 떨어뜨리며 그곳에서 돌아섰던 것은.

그렇게 레이시아가 머무는 사저 앞을 떠나 쪽지에 적어놓았던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벤치 위에 걸터앉아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부스럭-


잘 마른 풀잎이 누군가의 발에 밟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기다렸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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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 시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쯤 괜찮아질까.


언제쯤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할 수가 있을까.

무엇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 와중에 딱 하나 확실한 건 이안이 괜찮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자신또한 괜찮아지지 않을  같다는 점이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제멋대로 활활 타오르는 것이 분노같기도 했고, 어떨 때는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죄책감 같기도 했다.

자꾸만 가슴 안쪽이 답답해졌다.

이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게 되면 좀 나아질까.

아니, 하다못해 그가 방에서 빠져나왔다는 소식이라도 듣는다면..

그런 생각이 제멋대로 이어지고 있던 가운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욕지기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마음같아서는 자신도 이안을 찾아가고 싶었다.


그를 찾아가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그가 그것을 떨쳐낼 수 있도록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간절했음에도 차마 그러지 못했던 것은 스스로의 지위와 입장 때문이었다.

 때부터 왕녀였기에 그녀는 그 지위에 올라있는 이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이안을 찾게 된다면?

이제서야 간신히  가라앉기 시작한 그와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들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 터.

그래서 차마 이안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편해지겠다고 그의 상처를 들쑤실 수는 없었으니까.

그랬다.


최근 들어 레이시아는 왕녀라는 지위에 부쩍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왕국을 위해 밤을 불태워가며 일하면 뭐하겠는가?


그에게 도움이 간절할 때 막상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 것을.

당장 구출대를 급파하라 명령해도 모자랄 시간에 군부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야만족 측의 요구에 응해선 안 된다고 거품을 무는 대신들을 설득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던 자신이 그나마 이안에게 내밀 수 있었던 도움의 손길은 치안대를 파견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통제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빌어먹을 왕녀라는 지위 때문에 그를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이런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져서..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력한 시간이 이어질수록 불길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며칠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다가 정말 잘못되는 건 아닐까.


식사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렇게 오늘도 조금씩 부정적인 생각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찰나였을 것이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순간 그럴 리 없다는  알면서도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안의 얼굴이었다.


혹시 그가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도 근거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생각이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제멋대로 일으켜세웠다.

"..들어와."


혹시..하는 기대감.

그것이 실망으로 뒤바뀌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실망은 곧 불안감이라는 이름의 탈을 뒤집어썼다.

'설마..'

어쩐지 평소보다 살짝 굳어있는 듯한 호위기사의 얼굴에 심장이 쿵쿵쿵쿵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그걸 애써 억누르며 그리 물은 순간, 말을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답지 않게 입술을 오물거리는 기사의 행동이 불안감을 배가시켰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텐데요."

 마저도 최선을 다해 억눌렀다.

그리고는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내심 이안과 관련된 소식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런 자신이 선사하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한 걸까.


"그.. 한 생도가 이것을 놓고 갔습니다. 외양을 보니 아무래도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 생도인  하여.."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사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있는 자그마한 쪽지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으니까.


"가져오세요."

"하오나 전하.."

대체 뭐가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 걸까.


입구 쪽에 못 박히듯 서 있는 호위기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쪽지를 넘겨받는 데에는 말이다.

그래서였다.

지금 이렇게 로브를 푹 눌러 쓴채 길을 따라 내달리고 있는 것은.


쪽지에 적혀있던 장소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의미모를 떨림을 내뱉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떨림이 무엇으로 인한 떨림인지 도저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떨림의 끝에는..

그가 있었다.


이안은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내리쬐는 산책로 한쪽에 놓인 벤치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오도카니 앉아서 고개만 살짝 들어올린 채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습이 눈속으로 박혀든 순간 이상하게 그쪽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몇 주 전에 봤던 사람하고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부쩍 초췌해진 모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으니까.

다가가는 순간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신기루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뒤따라야할 반가움대신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확 솟아올랐다.

쿵- 쿵- 쿵-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멋대로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못 박히듯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으니..

"아, 오셨어요..?"

자신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하늘에 걸린 달에 못박혀있던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맑고 청명한 시선과 너무 평온해서 초연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까지.

그런 것들 때문에 더욱 불안하게 느껴진 건 과연 기분 탓일까.

"다행히 쪽지가  전해졌나 보네요."

덕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면서 힘없이 웃어보이는 그 모습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앉아서 이야기 할까요? 아니면.."

"앉지."


얼핏 본 이안의 모습은 오래 걸어도 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잽싸게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음.. 저는  걷고 싶은데.."

"방금까지 일하다가 와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해해달라는 뜻으로 내뱉었던 말인데  말 어디가 그토록 우스웠던 걸까.


"그럴까요. 그럼."


이안의 얼굴 위로 부스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와 나란히 앉게 되었건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꺼내들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해놨던 말들?


이미 백지가 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자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철렁하고 있는 사이에도 이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장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에.."

별다른 방해 없이 빠르게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하는 이안의 말을 들은 순간, 뭐라 답을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고작 그것밖에 해주지 못했는데 이안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 간극 때문일까?


"사실은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회장님께 폐가 될 것 같아서.."


뒷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분명 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리가 그걸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렇게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지던 찰나였을 것이다.

"회장님."

"..."

"..우리 도망갈까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물음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까지 도망쳐서.."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회장님은 지금처럼 힘들게 일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지내고 저도.."


그가 무슨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농담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시선을 들어올려 확인해보니 이안의 얼굴에는 어느새 누가봐도 말을 얼버무리고 있다는  알 수 있는 표정이 맺혀있었으니까.

이미 늦었다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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