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99)화 (99/366)



〈 9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리파가 미리 언질을 해두었기에 철거되는 천막 사이를 가로지르는 날 붙잡는 이는 없었다.


그저 시선을 한 번씩 흘깃하고 던졌다가 떨어뜨릴 뿐.

그렇게 리파네 부족이 머무는 곳에서 빠져나온 나는 조금씩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에 천막을 빠져나올 때 붙잡거나 그러지 않았던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은 많이 낮긴 했지만, 만에 하나 리파가 생각을 바꿔서 날 붙잡으러 온다거나 그러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도래할 수도 있었으니까.


전쟁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한 명 때문에 사태가 거기까지 치닫겠냐만은 그동안 쌓아온 업보가 있다보니 그 가능성을 쉬이 부정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침상을 같이 썼던 여자의 목이 발치를 굴러다니는 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덜렁덜렁대는 신발을 억지로 잡아끌며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물론, 리파네 부족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신발은 일부러 낡은 걸 골라 신어서 금방이라도 밑창이 떨어져나갈 것 같지, 풀들은 제초작업이 마려워질 정도로 길게 자라나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 철썩철썩 들러붙어왔으니까.


아니, 그 정도는 차라리 약과였다.


개중에서 좀 뻣뻣한 놈들은 내 피부에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들보다 내게 고달픔을 선사해준 것은 다름아닌 위에서부터 내리쬐는 태양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이라고 해도 여름은 여름.

그리고 하늘 정중앙에 떡하니 걸린 늦여름의 태양은 지나가버린 여름을 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스스로를 불사르고 있었다.

'시발.. 뭔 놈의 날씨가..'

어디 뭐, 그늘같은 거라도 있었다면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데 여긴  트인 초원이라서 잠깐 몸을 식혀줄 그늘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절절하게 후회했다.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출발하는 거였는데.

아니, 하다못해 마실 거라도  챙겨왔다면 치밀어오르는 갈증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이거라도 마셔야하나..?'

그래서 생각이 품안에 챙겨둔 것까지 미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마셔버리면 잠깐동안은 괜찮아지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가 문제겠지.


갈증이라는 놈이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모습으로 내 앞에 도래할테니까.


그리고 뭣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이것에 손댈 때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맨정신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꾹꾹 내리누르며 자꾸만 무거워지는 발을 채찍질했다.

이정표라고는 하나도 없는 광활한 초원을 걷는다는  여러모로 지난한 일이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과연 제대로 찾아가고 있긴 한 걸까라는 의심이 시도때도 없이 고개를 치켜들어 마음 속을 어지럽히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신발이라는 놈이 나보다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밑창하고 발을 하나로 묶어주던 끈이 생을 마감해버린 것.

덕분에 신발이었다가 신발이었던 것이 되어버린 것을 대충 발을 흔들어 내던지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한  빌려달라고 할 걸.

언제 어디서 왕국에서 풀었을 추적자 년들하고 마주칠지 몰라 처음부터 걷는 걸 택했던 게 이토록 후회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보니 한짝만 남아버린 신발 때문에 짝짝이가 되어버린 걸음걸이가 괜스레 불편하게 느껴져서..

그것마저도 벗어던졌다.

그렇게 맨발로 초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가로지르다가..

발에 남은 생채기 때문에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쯤 품 안에 넣어놓은 것을 꺼내 그대로 한 번에 들이켰다.


입안을 텁텁하게 만든 가루가 자그마한 병 안에 담겨있던 액체에 씻겨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몽롱해지며 발쪽에서 올라오던 통증이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결 걷기 수월해지는 걸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구출되고 나면 몇 주 동안은 제대로 못 걸어다니겠구나하고.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데?

내가 왕국이라는 집단을 너무 과대평가 했었나?

이쯤되면 슬슬 얼굴을 내비칠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리파가 내어준 것을 마셨던 것인데 이러면 곤란했다.

슬슬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였으니까.

조금씩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 같다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저기에 완전히 먹혀버린다면?


약에 취해서 초원을 칠렐레 팔렐레 걸어다니게 되겠지.

그러다가 왕국군 소유의 건물에서 눈을 뜨거나 하다못해 초원에서 눈을 뜬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최악은 역시 생판 처음 보는 야만족 부락에서 눈을 뜨는 거고.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진짜 얄짤없이 노예 12년행이니 말이다.

'..좀 늦게 마셨어야 했나?'


후회해봐야 이미 몸에 다 흡수되어버린 것을 어찌할  없다는  정도야 알고 있지만 나도 사람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정신줄을 부여잡고 있기 위해 억지로 억지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이성은 조금씩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아마  와중이었을 것이다.

귓가로 말발굽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더니..


기사용 정복을 차려입은 누군가의 모습이 시선 끝에서 아른거렸다.

 위에 올라탄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까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미 한계였으니까.


검은 머리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붉은 머리같기도 했다.

붉은 머리라.

앨리스일까.

앨리스가  소식을 전해듣고 추격조에 자원하기라도 한 걸까.


'역시..'

믿고 있었다고 젠장..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물거리던 의식이 퓨즈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툭 끊어지며 시야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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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감고 있던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나무로  모르는 천장이었다.


그래서 일단 안심할  있었다.


낯익지도 않고, 천막도 아닌  보면 아무래도 뒤지거나 다른 부족한테 잡혀온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왕국군 소속의 숙영지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초원에서 이런 건물을 짓고 생활할만한 단체는 왕국군 뿐이니까.


'옷은..'

여전히 예의  누더기였다.


누가  구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차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걸까.


그에 비해 양발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이대로 과연 신발은 신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말이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일단 확실한 건 그리 오래 기절해있던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약의 감각이 몸에 남아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끽해봐야 하루 정도가 지났다는 소린데..

자그마한 창문을 통해 얼핏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서 그대로 다시금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익-하고 낡은 문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

그와 함께 들려온 안타까움이 그득그득하게 담겨있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온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의 정체를 말이다.


'역시..'

그때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붉은색 머리칼은 앨리스의 것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그녀가 내 옆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파견근무 기간은 진작에 끝났을텐데 대체 어떤 수를 썼기에 여태껏 이곳에 남을  있었던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끼익-


나무로 된 바닥이 앨리스의 발에 짓눌리며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동시에 그녀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달큰한 체향이 콧속으로 훅 파고들어왔다.

몸이 반응을 보인 건 바로 그때였다.


쿠웅-

묵직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아니, 떨어진 게 아니었다.

떨어졌다면 방금과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질리 없으니까.


쿠웅- 쿠웅-하고 심장이 거세게 맥박쳤다.


얼굴에 피가 확 쏠리며 그곳에 겉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이러다가 펑하고 터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와 함께 찾아온 건 극심한 갈증이었다.


분명 목이 마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목이 말랐다.


그것도 미친 듯이.


그 감각을 자각한 순간 본능이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방 안 가득 달큰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는 상대를 취하라고.


그래서 좁고 뜨거울 게 분명한 그녀의 안에 정을 한가득 토해내라고.


그러면 편해질  있다고.

쉬지 않고 울려퍼지는 그 속삭임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그 때 리파가 왜 그리도 맥을 못췄던 건지를.

'이게 진짜구나.'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미칠  같았다.


초원에서 느꼈던 것?


그건 지금 느껴지는 것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마 초원에서는 반응할만한 '상대'가 없었기에 그 정도였던 거겠지.


꼭 얼굴이 심장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열기가  올라올 때마다 얼굴 전체가 쿵쿵하고 맥박쳤다.


그래서였다.

"으윽.."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던 것은.

"이, 이안..?"


방 안을 치우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그제서야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인지 당혹스러워하는 앨리스의 음성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부름이 내게 면죄부를 부여해주었다.

"선..배..?"


꼭 마치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목소리를 떨며 그녀를 부르는 것?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짜로 힘들어서 연기를 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진짜.. 선배네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그리 내뱉으니 앨리스가 들고 있던 것을 대충 내던지고는 내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덕분에 아까 전부터 날 유혹하던 그녀의 체향이 한층  진해졌다.

"저, 정신이 들어?!"

그게  더 힘들게 한다는 걸  리 없는 앨리스는 내게 바짝 몸을 들이민  내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선배.. 나.. 너무 힘들어요.."


덕분에 한층 더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가 조금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입술 사이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제멋대로 새어나왔으니까.

그런 나를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던 걸까.

"기, 기다려 금방 군의관을.."


황급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붙잡았다.

이것도 약의 힘인 걸까.


바로 조금 전까지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방을 빠져나가려던 앨리스의 옷깃을 움켜쥔 내 손가락 끝에는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이러다가 옷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튼 그렇게 멈춰선 앨리스가 날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가.. 선배가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나름 간절하게 내뱉어봤다.

"하, 하지만.."

분명 덥썩 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앨리스는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하긴..'


안 그런 것 같아도 은근 양심이 있는  앨리스니까.

누가봐도 약에 취한 걸로 보이는 날 건드리기엔 그녀의 양심이 그걸 허락치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더욱 흔들어줘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양심따위 가뿐하게 무시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였다.


"으윽.. 선배.."


내가 낼  있는 것 중에서 제일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몸을 슬며시 뒤틀었던 건 말이다.

효과는 확실했다.


양심하고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앨리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다른 여자는.. 이제 싫어.."

그리고 그게 결정적이었던  같다.

더는 날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일까.

"알.. 겠어."

잠시 망설이던 앨리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 내가 도와줄게.."

천천히 날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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