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날이 코앞까지 도래했다.
그래서였다.
이렇게 아침부터 일어나서 부산을 떨고 있는 건 말이다.
"더 허름한 건 없어요?"
"여기서 더 허름한 거라고 해도.."
내 말에 리파가 팔자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라는 것처럼.
하긴 그렇겠지.
여기서 더 허름해지면 그건 옷이라기 보다는 천쪼가리나 넝마라 불러야 맞을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 정도는 몸에 걸쳐줘야 딱 보자마자 '아 얘가 포로로 잡혀서 정말 별 짓을 다 당했구나.'하는 느낌이 팍 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리파한테 조금 더 허름한 걸 요구한 것이었는데 어째 그녀는 썩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 여기서 더 허름한 건.. 드러나는 부분이 너무 많지 않나.."
그렇단다.
내 몸을 다른 년들이 보는 게 싫다나.
제가 생각해도 좀 부끄러운 이유기는 했는지 리파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꿍얼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으이구."
살짝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게 기습을 당한 리파가 움찔하고 몸을 떨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 그래도 안 .."
이 의견만큼은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으면서도 연신 내쪽을 힐끔대는 걸 보면 방금하고 똑같은 걸 몇 번 더 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지만..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이번만큼은 그녀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사실 지금 걸치고 있는 것도 충분히 허름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가는 길에 구멍 좀 내주고 흙도 좀 묻혀주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귀엽기 그지없는 반응이 돌아왔다.
설마 내가 이렇게 순순히 뜻을 꺾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어?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내게 뽀뽀를 몇 번 더 받고 싶으셨던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입술이 뭔가를 마중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모르는 척 하며 그녀에게 부탁했었던 또다른 물건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일단 준비는 해놨는데.."
내가 리파한테 부탁했던 것.
그건 바로 그녀의 부족이 몸을 치장할 때 쓰는 검은색의 도료였다.
물론, 그냥 평범한 도료는 아니었다.
듣자하니 물로는 안 지워진다고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평생 지울 수 없는 건 아니고 특수한 용액을 쓰거나 며칠 내버려두면 조금씩 흐릿해지다가 알아서 사라진단다.
그래서였다.
내가 리파에게 그걸 요구했던 건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것만큼 메시지를 남기기에 딱 좋은 수단이 또 없었으니까.
리파는 아직 그 용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말이다.
"그 정도면 대충 얼마나 가요?"
"음, 이 정도면.. 4일에서 5일 정도?"
4일에서 5일이라.
그 정도면 아슬아슬할 것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하다가 입고 있던 누더기를 조심스레 걷어올리며 리파를 향해 요구했다.
"발라주세요."
그걸 내 몸 위에다가 발라달라고.
내 말 어디가 그토록 자극적으로 들렸던 걸까.
"무, 뭣.."
그런 소리를 내며 리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부끄러워서 굳어버린 리파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미 볼 장 다 봐놓고서는 고작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다니.
진짜 귀엽다니까.
그렇지만 그 모습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서..
"힘드시면 제가 할까요?"
라고 물어봤더니 리파가 손에 들고 있던 도료가 담긴 그릇을 잽싸게 제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는 어떤 식으로 발라주면 되겠냐고 묻는 그녀를 상대로 친히 가르쳐주었다.
'이럴 때는 역시 바를 정(正)자가 국룰이지.'
한자는 커녕 비스무리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니만큼 그런 걸 몸에 새겨놔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차릴거다.
그게 어떠한 '횟수'를 나타내기 위한 표식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런 표식을 내 몸에 남기는 역할을 맡게된 리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당장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그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도료를 찍어서 내가 위치에 내가 알려준 대로 표식을 새기는데..
느낌이 굉장히 묘했다.
뾰족한 손톱이 피부를 살살 긁으면서 지나가는데 살짝 오싹오싹하면서도 기분 좋다고 해야할까.
기묘한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딱히 별 생각 없어보였던 리파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이 들어있었다.
호흡도 한층 거칠어져 있었고.
"이, 이러면 돼?"
그래서일까?
마지막 다섯 번째 획을 긋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살짝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낸 그녀나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날 올려다보며 그리 물었다.
그에 조심스레 시선을 밑으로 내려다보니..
'음..'
치골께에 새겨진 바를 정(正)자가 내게 기묘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살짝 자괴감이 들면서도 또 마냥 그런 것 같지는 않은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그 복잡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느끼며 침묵하고 있자니 제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착각한 건지 리파가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잘하셨어요."
"그, 그래?"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도 달래줄 겸 살짝 칭찬을 해주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표정이 활짝 피어났다.
뭐, 확실히 빈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걸 새기는 와중에 살짝 흥분해버린 탓에 선이 일자로 곧게 그어진 게 아니라 살짝 흔들려서 마치 뭔가를 하다가 대충 쓱 그은 듯한 비쥬얼이 완성되었으니까.
딱 내가 원하던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그렇지만..'
역시 하나만 덜렁 새겨놓는 건 좀 부족하겠지.
그래서 생각해봤다.
내가 여기와서 리파와 총 몇 번이나 관계를 맺었는지를.
그래서 그 숫자대로 표시를 새겨넣을 생각이었는데..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한 숫자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시도때도 없이 해댔으니까.
그래서..
"그, 리파."
"응?"
알만한 사람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내게 들은 칭찬이 퍽 기꺼웠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내 몸에 새겨놓은 표식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를 상대로 그딴 걸 물어보자니 솔직히 좀 양심에 켕기긴 했다.
그렇지만 물어봐야만 했다.
뭐니뭐니해도 이런 건 디테일이 중요한 법이니까.
"그.. 우리 둘이 몇 번이나 했는지 혹시 기억해요?"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물었더니..
내 부름에 답을 하기 위해 별생각없이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동공과 입이 살짝 벌어졌다.
누가봐도 당황해서 굳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을 한채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부끄러움이 단숨에 치사량까지 치솟아서 차마 내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걸까.
고개를 내리깐채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고 있자니 딱 감이 왔다.
대답 듣긴 틀렸다고.
그래서 내가 떠올린 긴가민가한 횟수로 해야하나하고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을 것이다.
"..7번."
"네?"
"여, 열.. 일곱 번.. 이야."
놀랍게도 리파가 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왠지 굉장히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대답을.
'아니 그걸..'
일일히 세고 있었다고?
감탄을 해야할지 소름을 느껴야할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속으로 쓴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숫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내 기준으로는 그것보다 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대체 뭘 기준으로 삼았길래 저런 숫자가 나온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리파를 상대로 부탁했다.
그녀가 말한 숫자만큼 획을 새겨달라고.
그제서야 자기가 내 몸에 새긴 게 그런 뜻(?)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리파의 입이 슬며시 벌어지더니 그녀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상태로 입만 벙긋벙긋 거리는 게 꼭 금붕어 같았다.
진실을 알게 되고 나서 컬쳐쇼크같은 거라도 느낀 걸까.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것 같아서..
"리파."
"어, 어.."
리파의 귀에 대고 그녀의 몸이 움직이는데 쓰일 연료가 되어줄 수 있는 말을 속살거렸다.
날 약해서 뺏기는 게 분하지도 않느냐.
이렇게라도 보란듯이 표식을 남겨서 날 앗아가는 이들에게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몇 배는 진한 분노를 느끼게 만들고 싶지 않느냐.
쉬지 않고 속삭인 그 말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걸까.
리파의 눈꼬리가 조금씩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가 손가락에 도료를 푹 찍어서 내 몸에 표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녀가 느낀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표식이 고스란히 남겨져있었다.
내가 원하던대로 대충 휘갈긴 듯한 난잡하기 그지없는 형태로 말이다.
이렇게 겉치장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황.
이제 남은 건 저기 따로 방치되어 있는 걸 듬뿍 들이키고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뭔가를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문 채 쪼그려앉아있는 리파의 어깨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세웠던 건 말이다.
그렇게 비슷한 눈높이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리파가 꺼내든 말은..
"이안, 이러지 말고 나와 같이.."
도망치자는 말이었다.
초원 깊숙한 곳까지 도망치면 왕국군이라고 한들 어쩌겠냐고 횡설수설 내 설득을 시도하는 그녀를 상대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 내 태도가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이를 악문 듯한 음성이 리파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그 상태로 날 노려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벌어져있던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리파에게는 꼭 작별의 인사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어느새 위로 올라온 그녀의 팔이 내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대체 저 가느다란 몸 어디에서 이만한 힘이 나오는 건지.
팔뚝에서 꽈아아악하고 느껴지는 압박감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니 그때부터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날의 밤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폭급하기 그지없는 입맞춤.
어찌나 강렬한지 꼭 그녀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그런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반사적으로 내뱉은 소리도, 목구멍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결 한줌도 그녀는 모조리 제 입 안으로 집어삼켰다.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느새 얼굴 쪽으로 올라온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단단히 틀어쥐어 고정시켰다.
도망치는 건 용납치 않겠다는 걸까.
어느새 입술이 살짝 아려오기 시작했지만 묵묵히 그런 리파의 행동을 받아주었다.
그러고 있으니..
맞닿아있던 입술을 통해 가는 떨림이 전해져왔다.
그에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니..
"흐윽.."
리파는 울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걸까.
첫날 봤던 그 위풍당당한 여전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응석꾸러기만 남아버린 그녀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같이 지낸 시간은 고작 며칠뿐이지만 그 며칠동안 꽤 정이 들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어떻게든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아보려는 것처럼 히끅히끅대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들겨주었던 것은.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정말 꼭.."
웅얼대는 목소리가 귓가로 전해져왔다.
"..가지 마."
물론, 답은 하지 않았다.
그 말에 대답이랍시고 내놓을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것이고.
"워,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들어줄게..!"
"리파."
"시, 신물이 탐나지 않아? 응? 이거 줄테니까.."
대체 얼마나 거칠게 끊어낸 걸까.
내가 풀려고 했을 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흰색의 가죽끈이 찌직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그렇게 뜯어낸 것을 리파는 내 손에 억지로라도 쥐어주려 했다.
내가 그걸 받으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물론, 상대가 받지 않겠다고 작정한 상황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지 않았고, 그 탓에 아주 잠깐 내 손 안에 들어왔던 푸른색의 구슬은 툭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렇지만 나도, 리파도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왜..!"
"리파."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 정도는 했었다.
내 간곡한 설득 끝에 날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이해'했었던 그녀지만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성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그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있고 싶어요?"
미리 준비했던 물음을 꺼내든 것은.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서 꺼내든 말도 아니었으니까.
"날 가지고 싶어요?"
그리 말하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리파의 귀를 향해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속삭여주었다.
"그럼, 강해져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날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그럼 기꺼이 당신의 것이 되어줄게요."
그게 사실상 내 마지막 인사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파에게서 떨어져나왔지만 그녀는 날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천막 한 가운데에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를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맨 마지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따로 빼놓았던 것을 챙겨 천막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