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채찍에서 당근으로 전환한 이유는 간단하다.
리파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녀가 내 계획에 성심성의껏 협조하도록 만들 차례였다.
그 때문이었다.
나도 아쉽다, 나도 네가 처음이었다따위의 말을 속삭이며 그녀를 열심히 어르고 달랬던 건.
그렇게 꺼내든 말 중에서 제일 효과가 좋았던 건 뭐니뭐니해도 나도 당장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정말인가?"
"네."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그 한 마디가 뭐라고 되게 기뻐하더라.
뭐, 확실히 내가 리파를 달래기 위해 꺼내들었던 말 중에서는 그게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랑 하루 잡혀있는 것보다는 좀 더 오래 잡혀있는 편이 구출되었을 때 극적이지 않겠는가?
'아직 파견기간이 좀 남기도 했고.'
적어도 그 기간이 다 되기 전까지는 내 발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출되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죠?"
"그래, 네 말대로 왕국 측 숙영지에 전령을 보내지."
나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면 협조하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던 걸까.
리파는 사실상 지시에 가까운 내 말에도 거리낌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기꺼워서 전할 말까지 친히 일러주었다.
"..네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하라고?"
어째 본인은 살짝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말로만요. 실제로 그러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하고 내미길래 거기에 대고 가볍게 입술을 맞춰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몸을 사용한 설득의 효과는 확실했다.
내키지 않아하던 리파가 두 뺨을 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렇게 왕국군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만들 메시지를 지닌 전령이 왕국군이 차려놓은 숙영지를 향해 출발하고..
"우리도 움직여야 해요."
그걸 확인한 나는 다시 한 번 리파의 설득에 들어갔다.
참으로 다행히도 처음의 것하고는 다르게 이번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리파네 부족이 이렇게 국경지대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건 신물을 들고 토낀 놈을 추적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덕분에 이사를 한다고 부족 전체가 꼬박 하루동안 부산을 떨긴 했지만,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왕국군의 범위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그 사이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하러갔던 전령이 복귀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리파를 상대로 물었다.
"혹시 필요한 거 없어요? 식량이라던지.. 뭐 그런.."
"그런 거야 늘 부족하다만.."
"그 중에서도 간절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내 말에 내 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리파가 이내 눈을 번쩍 떴다.
"굳이 따지자면 소금 정도겠지."
"그럼 날 풀어주는 대가로 그거나 좀 챙겨달라고 해요. 겸사겸사 더 필요한 게 있으면 그것도 달라 하고."
그래도 나름 왕국 소속인데 내 입으로 내 안위를 인질로 왕국한테 삥을 뜯으라고 속살거리자니 아주 살짝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했다.
이렇게 성심성의껏 협력해주니 뭐라도 챙겨줘야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싫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리파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초원에서 소금이 귀한 건 사실이지만 이안 그대보다 귀하진 않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입술을 삐죽하고 내민 채 그리 툴툴거리는 리파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리파.."
"자, 잠깐..!"
그녀의 목에 목덜미를 묻으며 숨을 흠뻑 들이켰다.
그런 내 숨결이 간지러웠던 것일까.
좁은 욕조를 공유하기 위해 나와 몸을 겹치고 있던 그녀가 몸을 살짝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요 며칠동안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된 점은 그녀가 평소에는 위풍당당해도 은근 여리고 응석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마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부족을 이끌게 되면서 자연스레 약한 모습을 남에게 내보일 수가 없게된 것이겠지.
그래서일까.
그녀는 나와 둘이 있을 때면 은근히 응석을 부려오곤 했다.
내 몸에 머리를 조심스레 비벼댄다거나 내 무릎 위에 걸터앉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 이렇게 그녀의 천막 안에서 같이 씻고 있는 것도 그녀의 요청 때문이었다.
처음 관계를 맺었던 날 자신의 몸을 닦아주던 내 손길이 그렇게 좋았다나.
아무튼 토라진 그녀가 귀여워서 쪽쪽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니 어깨를 살짝 움츠린채 몸을 움찔움찔 떨어대던 그녀가 제 허벅지 사이로 빠져나와있는 내 물건을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걸까.
"이안.."
내 물건을 조심스레 잡고 흔들며 달큰한 목소리로 날 부르는 리파의 행동에 살짝씩 허리를 흔들어 보조를 맞춰주었다.
동시에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그깟 소금보다 내가 자신의 옆에 남아주는 것이 더 좋다고 온몸으로 주장을 해오는 그녀의 목덜미에 아까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입을 맞추었다.
아까의 입맞춤이 장난스러운 느낌이 다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더 진득했다.
그렇게 리파의 목덜미에 입을 맞출 때마다 붉은 색의 열꽃이 한송이씩 피어났다.
그것을 천천히 혀로 훑으니..
"흣.."
그 느낌이 이상했는지 작게 헛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리파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와 함께 욕조 전체로 퍼져나간 파문이 나무로된 욕조 벽에 부딪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정 마음에 걸리면.. 혼수라고 생각해요."
"..혼수?"
"말했잖아요. 나 리파가 처음이었다고."
그리 말한 순간 몸을 움찔거렸던 걸 보면..
"..안 믿었구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믿지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만 진실은 진실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처음이 맞았으니까.
그래서 살짝 토라진 척을 하니..
"그, 그런 게 아니다!"
내 품 안에 갇혀있던 리파가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으으.."
"사람을 이렇게 야한 일에 눈뜨게 만들어놓고서는.."
그리 말하면서 리파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넣어 온수의 열기에 딱 좋게 달아오른 그녀의 속살을 손가락으로 헤집어대니..
"흐으으.."
지은 죄가 있어 차마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리파가 살짝 몸을 움츠린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몸을 움찔댈 때마다 찰랑찰랑하고 물결치는 소리가 천막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그녀의 속살을 헤집었다.
그에 맞춰 점점 움츠러드는 그녀의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다가..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손을 딱 멈추었다.
"..에?"
곧 닥쳐올 가벼운 절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뭔가를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 지그시 감겨져있던 리파의 눈이 뜨인 것도 바로 그때였다.
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꼭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어주었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동시에 그리 물으니 탕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절정을 향해 내달리다가 멈춰버린 쾌감 때문인지 몽롱하게 풀려있던 리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더니..
"..했.."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보다 자그마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차마 곧이곧대로 사과의 말을 내뱉기에는 좀 민망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뭐라구요?"
해서 못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하니..
"자, 잘못했다. 그러니.. 더 만져다오.."
슬쩍 몸을 틀어 내 볼에 사과의 입맞춤을 한 리파가 나름 간절한 목소리로 요구해왔다.
"그럼 저번에 부탁했던 것도 들어주는 거죠?"
"그,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안 돼요?"
"..알겠다. 그렇게 하마."
그에 씩 웃으며 다시금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넣으니 그런 내 손을 맞이하듯 리파의 허벅지가 좌우로 벌어졌다.
그렇게 리파의 속살을 손으로 헤집으면서..
"리파도 만져줘요."
"그, 그래.."
그녀의 대딸을 즐겼다.
딱 알맞게 따뜻한 온수에 몸을 푹 담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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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안이 리파가 제 계획에 협조하도록 만들기 위해 온몸을 써서 그녀를 설득하고 있던 바로 그때.
한 발 늦게 그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와, 왕녀님..! 남부에서 긴급을 요하는 서한이..!"
다름아닌 레이시아의 앞이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원의 학생회장임과 동시에 제 1왕녀로서 뒤로 물러난 왕을 대신해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업무를 행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리고 남부라는 단어와 긴급이라는 단어의 콜라보는 한창 회의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녀의 신경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잠시."
짤막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로 바로 조금 전까지 발언하고 있던 재정부 소속 관료의 입을 막아버린 그녀가 막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시녀를 향해 작게 손짓했다.
물론, 시녀를 향한 시선이 좋을 리 없었다.
흐름이 끊기는 걸 좋아하는 이는 없으니까.
그렇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못마땅함이 그득그득하게 담긴 눈총 사이를 가로지른 시녀가 마침내 레이시아의 앞에 도달했다.
그때까지도 사실 그녀는 별 생각 없었다.
남부라고 하니 그곳으로 파견을 나간 이안의 얼굴이 잠시 떠오르긴 했지만, 그와 관련된 소식일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이안의 실력이 빼어나긴 해도 그는 아직 정식으로 서임도 받지 못한 생도에 불과헀으니까.
하물며 남자 생도이니만큼 왕국 최대 격전지인 남부로 파견을 갔다 한들 그가 전선에 설 일은 없었다.
남부의 야만족들이 갑자기 단체로 홰까닥 돌아서 대규모로 쳐들어오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이 실제로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기에 시녀를 통해 남부에서 왔다는 서한을 건네받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얼굴에서 이안에 대한 걱정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대체 무슨 소식일까하는 의아함만이 가득했을 뿐.
단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의아함이 경악으로 뒤바뀌는데에는 말이다.
『수도 학원 기사부 소속 이안 데일 현재 생사불명. 추적을 맡았던 현지 부대에서는 야만족에게 납치된 것으로 추정 중.』
서한의 맨 윗부분에는 그런 문구가 떡하니 박혀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뛰어남을 저주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뛰어났다면 저 문구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만큼 충격도 늦게 찾아왔을 테니까.
가슴 안쪽에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놓았던 것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아니, 거긴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 아래에 바닥이 있었으니까.
발밑이 무너져내리며 끝이 보이질 않는 아득한 곳으로 추락하는 것만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뛰었다.
희한한 건 느리게 뛰는지 빠르게 뛰는 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없이 느리게 뛰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것처럼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끝이 없는 수렁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끝을 모르고 어딘가를 향해 빨려들어가던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건..
"그.. 왕녀님? 대체 어떤 소식이기에.."
평소에 쓸모없다고 욕하던 행정대신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정신을 차린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몸부터 일으켰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종료입니다."
의아해하는 반응, 납득하지 못하는 반응이 뒤따랐지만 거기까지 돌봐줄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군부대신."
"예, 에?"
"군부로 갈 겁니다. 따르세요."
말을 들었으면 바로바로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분노가 확 치밀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분노였다.
그래서였다.
그걸 차마 겉으로 티내지 못했던 것은.
"대저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혹시 뭐 전쟁이라도.."
"지금 한창 파견근무 기간인 건 알고 계시겠지요."
모른다고 말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아, 네.."
"남부로 파견을 나간 생도 하나가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입니다. 추적을 맡았던 현지부대에서는 야만족에게 피랍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요."
"그, 그렇군요.."
그게 끝이냐고 묻는 저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따지고보면 군부대신의 반응이 조금 더 정상에 가까웠으니까.
생도들이 단체로 피랍된 것도 아니고 그래봐야 생도 한 명이다.
남성임을 고려하면 조금 더 사안이 심각해지긴 하겠지만 그뿐이었다.
고작 생도 한 명을 가지고 왕국의 수뇌부가 이렇게까지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 사실을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데도 왜..
자신은 이토록 진정이 되질 않는 것일까.
'이안..'
이제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이의 이름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그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