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96)화 (96/366)



〈 9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안 그래도 상태가 좋다고는 말할  없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려 반나절을 더 침상 위에서 보낸 여파는 컸다.


통증을 무디게 만들어주고 대신 쾌감을 한없이 증폭시켜주던 약기운이 가시고 나니 자리에서 쉬이 일어나질 못하더라.

다리 사이가 얼얼하다나.

그래서였다.

지금 내가 이렇게 리파의 수발을 들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내 수발을 리파는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계속 끈적끈적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리파가 차고 있던 신물을 이용해 쥐어짜낸 물로 천을 적셔서 천천히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게 간지러웠던 걸까.

내가 무슨 의지라도 되는 것마냥 내게 등을 기댄 채 흐응하고 콧소리를 내며 내 손길을 만끽하던 리파가 어느 순간 작게 몸을 움츠렸다.


"가만히 좀 있어봐요."

"가, 간지럽다."


그리 말하면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대길래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팔로 허리를 꽉 끌어안아 고정시켰다.

그랬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잠잠해지더라.


그 모습이 또 묘하게 귀여워서 몸을 닦아주겠다는 핑계로 그녀의 민감한 곳을 툭툭 건드려댔다.


지금은 노골적인 자극보다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내게 등을 기대고 있던 리파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서  올려다보다가..

쪽-

기습적으로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시달려놓고서는 또 자극해대는  대체 무슨 심보였던 걸까.

아까는 다리 사이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또 날 살살살살 자극해대는 리파의 행동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툭툭 두들겼다.

"다리 뻗어봐요."


그런 내 말에 리파가 동동 구르고 있던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이야..'


정말  번을 봐도 감탄밖에 안 나오는 다리였다.


맘같아서는 어디서 롱부츠 같은 걸 구해와서 신겨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도 그냥 롱부츠가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롱부츠로다가.


그렇게 리파의 몸을 닦아주면서 속으로 조심스럽게 타이밍을 쟀다.

맘같아서는 계속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이제 슬슬 현실을 알려줘야할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고 했더니..

"그.."


"응? 왜?"

꼬르르륵-

리파의 배가 산통을 깨뜨렸다.


우렁차게 울려퍼진 뱃고동 소리.

그에 내가 낸 목소리에 반응해서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던 리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소리가 그토록 부끄러웠던 것일까.

그대로 굳은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리파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래 뭐..'

진실을 알려주는 건 식사 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허기 때문에 예민해진 상태에서 진실을 듣는 것보다 배가 불러 신경줄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진실을 듣는 것이 그녀에게도 내게도  나을지도 모르고.


"배고팠어요?"


"이, 이건 그러니까.."

해서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 놀리기 모드로 들어갔더니 리파가 답지 않게 어버버 거렸다.


새빨갛게 변한 귀를 수줍게 드러낸 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풀어 잘록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배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이상하다.. 분명 잔뜩 채워줬던 것 같은데.."

그리고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으며 그리 말하니 '읏..'하고 헛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리파의 고개가 조금 더 밑을 향했다.


"그, 그 배랑은 다른 배다.."

 상태로 그녀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요? 그럼 그것도 채워야겠네요."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괸채로 그리 속살거리니 리파의 몸이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내 품에 쏘옥하고 안겨있던 리파가 정신을 차린 건 예의 그 뱃고동소리가 다시  번 울려퍼지고 난 후였다.


한 번 자각하고 나니 허기가 확 몰려오기라도  것일까.


천막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호출한 리파가 먹을 걸 내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런 그녀의 명령을 받잡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음식들이 여성들의 손에 들린  천막 안으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족장으로서 위엄을 챙기고 싶었던 것일까.

내 품안에 안겨 몸을 움츠리고 있던 리파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쫙 핀채 당당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물론, 그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음식을 나르는 이들이 날 힐끔거리기 시작하니 언제 위엄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듯 대번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니까.


"거기 두고 나가."

신경질적인 표정과 그것만큼이나 신경질적인 몸짓.

그 두 개만으로도 충분했다.


음식들을 세팅하는 척 테이블에 매달려 은근히 이쪽을 힐끔대던 여성들이 '앗, 뜨거라!'하며 천막 밖으로 호다닥 달려나가게 만드는 데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막을 빠져나가는 여성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채 끝까지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리파의 모습이 꽤 귀여워서..

"질투한 거에요?"

그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물음에 리파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했다.

아마 다리 사이만 멀쩡했어도 분명 그랬겠지.


"지, 질투라니!  그저 주제넘게 제 분수에 맞지 않은 것을 탐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주었을 뿐이다."

"세간에서는 보통 그런 걸 질투라고 부르던데.."

"그, 그런 게 아니다!"

그래, 뭐.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까.


믿어줘야지.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렇게 쳐주겠다는 느낌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리파를 바라보니 그녀가 황급히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그, 그나저나 식겠군. 얼른 들지."


그리 말하면서 테이블로 다가가기 위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리파가 '윽..'하고 고통에 찬 신음성과 함께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제가 어떤 상태인지를 망각해버린 모양.


 허벅지에 엉덩이를 찧은  아프다고 낑낑대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자, 잠깐! 내려놓아라..!"


한숨과 함께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게 못내 수치스럽기라도 했던 걸까.


 품안에 안겨있던 리파가 발을 버둥거렸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시금 다리 사이의 고통이 재발했는지 읏하고 숨을 들이키며 움직임을 멈추었으니까.

그렇게 잠잠해진 그녀를 안아든채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빈 의자에 그녀부터 내려놓았다.


"진짜 손이 많이 가시네."

"으윽.."

"그래서 감사인사는요?"


그렇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자마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리파를 상대로 감사인사를 요구했다.

그러자 돌아온 건..

"애, 애초에 네가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더듬더듬대는 목소리로  것치고는 제법 그럴 듯한 반격이었다.

확실히  말대로였기에 아무말 못하고 침묵하고 있자니 리파가 언제 쪼그라들었냐는 듯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그 상태로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면서 그곳을 권하길래 쓰게 웃으면서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아-"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 향해 입을 벌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순간적으로 내가 어미새고 리파가 아기새가  것만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하자는 플레이일까.


아주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게 먹여주기를 요구하는 리파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얼른 먹여달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꼬옥하고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뜬 리파가 그런  표정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몸을 늘어뜨렸다.

"으으.. 누가 힘들다는 나를 억지로 깔아뭉갠채 잔뜩 괴롭혀댄 탓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군.."


그리고는 나로 하여금 들으라는 듯이 저런 말을 지껄여대는데..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그 모습이 귀여워서라도 그런 그녀의 억지 응석에 어울러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가 먹고 싶은데요."

그녀를 바라보며 그리 물으니 '음..'하고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테이블 위에 깔린 음식들을 살피던 리파가 이내 향신료를 잔뜩 발라 구운 고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작은 역시 고기인가.


하긴, 야채를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니까.

 와중에 문제가 있다면 이곳은 딱히 식기라도 부를만한 게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제도 음식하고 같이 나온 물로 손을 헹군 다음에 손으로 주워먹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인듯 했고.


포크같은 걸 써도 충분히 낯간지러운 일을 이제는 맨손으로 해야한다니.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음식하고 같이 배달된 물에 깨끗하게 손을 헹군 뒤 방금 전에 리파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고기 한 조각을 집어들어 그녀를 향해서 들이밀었다.

받아먹기 편하도록 일부러 끄트머리만 잡고 그랬는데..


그런 내 노림수는 리파의 행동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을 순간적으로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벌린 그녀가 그대로 내가 내민 것을 덥썩 베어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 손가락 끝에 묻은 육즙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그것을 혀로 휘감고는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대기 시작한 것.


'아니, 이 여자가 진짜..'

아파서 죽을 것 같다면서 또 이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다니.


앙큼하다고 해야할지 어리석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요구에 따라 먹여주기를 계속했다.


혹시 이게 뭐 평소에 꿈꿔오는 일같은 거라도 됐던 걸까.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행동임에도 리파는 과할 정도로 기뻐보였다.

그래서였다.

슬슬 말을 꺼내 진실을 들려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그래..'

식사가 끝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자.

저렇게 기뻐하는데 그걸 망치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기다렸다.


간절하게 허기를 호소하던 그녀의 배가 만족스러움을 표할 때까지.


그리고 언제나 늘 그렇듯 운명의 순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식사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리파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진실을 들려줘야할 시간이라고.

"그.."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

그것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진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내가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듣지 않겠어."


물론, 당연히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설득을 시도했다.

어찌보면 이건 그녀나 나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이끄는 부족원들의 안위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진심이 먹혀든 것일까.

처음만 하더라도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귀를 닫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던 그녀가 조금씩 내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당신을 따르는 부족원들을 전부 불구덩이에 던져넣을 셈입니까?"


아마도 그 말이 결정적이었던  같다.

"꼭.. 돌아가야겠어? 네가 여기 남겠다는 뜻을 밝히면.."


그쪽도 포기하지 않겠냐고 역으로 날 설득하려 드는 리파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딴 방법이 먹힐 리가 없었으니까.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질 못하는 걸 보니 충격요법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초원은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리파가 나한테 말했었죠."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듣고자 내뱉은 말도 아니었지만.

"리파하고 리파의 부족은 약해요."


군사를 대량으로 동원할 필요도 없이 남부군 중 일부만 동원하더라도?


리파가 이끄는 부족은 쓸려나갈 거다.

그리고 레이시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디아나만 되어도 얼마든지 그걸 가능케할 힘이 있었고.

네가 억지를 쓰더라도 결국에는 그렇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라는 말을 차분하게 풀어서 들려주니 리파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납득할 수 없다는 것처럼.


"초원의 부족들은 외부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아."


왜 그런가 했더니 그걸 믿고 있었던 걸까.

확실히 선임이라는 년들한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평소에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지들끼리 치고박기 바쁜 놈들이 외부 세력이 초원을 침범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같이 손을 잡고 득달같이 들고 일어서서 쓸어버리고 싶어도 그러기가 힘들다나?


아무래도 그걸 믿고 있는 모양인데..

"목표가 초원을 차지하는 거라면 그랬겠죠."


간단하게 논파가 가능한 주장이었다.


왕국 쪽에서 내가 잡혀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날 잡아간 리파의 부족만이 목표라고 콕 찝어서 주변 부족에게 알리면서 겸사겸사 선물도 좀 쥐어주고 하면 리파가 기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테니까.

'뭐, 그것도 실제로 해봐야 아는 거지만..'


당장 내 말에서 반박할 구석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리파는 반박대신 침묵을 택했다.


날 빼앗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라도 했던 걸까.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론, 지금 당장 돌아가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 말을 시작으로 조심스레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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