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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92)화 (92/366)



〈 9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설마 내가 뭐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그럴 거라 예상했던 걸까.

갈색머리의 얼굴 위로 일순간 헛웃음에 가까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건 잠시 뿐이었다.

씨익하고 웃은 그녀가 옆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 부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앞으로 나선 건 아까  주도적으로 이쪽을 향해 몰아가던 그 대장년이었다.


제 상관의 명령을 받은 그녀가 즉시 허리춤에서 끈 하나를 끌러내어 갈색머리의 손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척봐도 엄청나게 질길 것 같은 흰색의 가죽끈이었다.

그것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갈색머리가 날 향해 성큼 다가왔다.

"아, 그것도 이만 내려놓는 게 어때? 많이 무거워보이는데."


그것도 잠시 여전히 내게 멱살이 잡혀있는 시신을 가리키면서 그리 말하길래 순순히 그 요구에 따라주었다.

안 그래도 슬슬 팔이 좀 아프던 참이었으니까.


쿠웅-

제법 묵직한 소리가 숲속으로 울려퍼지며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시체의 목덜미에 꽂혀있던 작업용 손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꿀럭꿀럭 새어나온 핏줄기가 천천히 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의미모를 표정으로 그것을 잠시간 바라보던 갈색머리가 다시금  부하들을 향해서 손짓했다.

아마 이번  대충 시체 치우라는 뜻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포위를 굳히고 있던 여성들 중  명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오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의 발목을 잡고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지이익하고 시체가 바닥에 끌리며 바닥에 레드 카펫이 생겨버렸지만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신경쓰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배신자의 시체가 회수되는 사이 흰색의 가죽끈을 팽팽하게 당기며  앞으로 다가온 갈색머리가 날 향해 싱긋하고 웃었다.


내게는 그게  '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양팔을 내밀어봤다.


묶기 좋도록 양손목을 딱 붙여서 내미니 그런 내 행동이 어이가 없었던 걸까.

보기 좋게 도톰하게 부풀어올라 있던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순순하군."


"손님으로 대접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한 부족의 지도자쯤 되시는 분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 것 뿐입니다."


"흠."

"어차피 저항해봤자.. 의미도 없어보이고 말이죠."

내가 무장을 완전히 해제했지만, 아홉 개의 화살은 여전히 예의  살벌한 빛을 흩뿌렸다.


만약 내가 여기서 허튼 짓, 이를테면 아까보다 훨씬  나와 가까워진 갈색머리를 향해 공격을 시도한다던지 하는 일을 벌이면 저게 모조리 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겠지.


'그리고 뭣보다..'

공격을 시도한다고 한들 순순히 당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현명하군. 더 마음에 들어."

그런 내 말에 잠시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갈색머리가 이내 분홍빛 입술을 슬며시 말아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모습이 기가 세 보이는 그녀의 인상과 너무나도  어우러져서..

'오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쿵쿵하고 뛰었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저 정도로 미인이 호쾌하게 미소를 짓는 데 어떻게 반응을 안 하냐고.

"아무튼 묶을 거면 얼른 묶기나 하시죠. 괜히 사람 무안하게 만들지 마시고."


그러고 있자니 괜히 민망해져서 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더니 날 바라보는 갈색머리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러더니..

"류 부족의 류-리파다. 리파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지."


갑자기 통성명을 시도하더라.

포박하기 전에 이름 정도는 알려주겠다는 걸까.


"..이안 데일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이름을 밝힌 시점에서 가만히  꾹 닫고 있는 것도  그래서 적당히 대꾸해줬더니..


"그렇군. 이안 데일이란 말이지.."


갈색머리, 아니 리파가 내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걸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통성명을 끝마치니  다음으로 이어진 건..


"그대가 날 신뢰해준만큼 나도 마땅히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지."


"..."


"그대가 부족에 체류하는 동안 그대를 부족의 손님이자 내 손님으로 대우할 것을 나 류-리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날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손을 묶더라.


"그쪽 부족은 손님을 대접할 때 손목부터 묶고 시작하나 봅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그대의 결백이 증명되면 바로 풀어주도록 하겠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그 결백을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걸까.

난 분명 그런 푸른 구슬같은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막말로 저 놈이 자기만 아는 곳에 몰래 숨겨놓기라도 해서  신물이라는 걸 영영 찾지 못하게 된다면?


평생 이렇게 묶어놓겠다는 걸까.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하나가 있었다.


주인공 놈이 발견했던 누군가 숨기다가 말았던 것 같은 시체 한 구.

혹시 몰라 그것에 대해 언급하니 내 손목을 묶은 끈을 살짝씩 잡아당기며 제대로 묶였는지를 확인하던 리파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부하들 중  명을 뽑아서 그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뭐, 보나마나 그것도 회수해오라는 뜻이겠지.


그렇게 숲에서의 볼일을 모두 끝마친 그녀가  옆에 섰다.

그리고는..

"그럼 가지."

날 향해 싱긋 웃으며 자신을 따라 걸음을 옮길 것을 종용했다.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없이 방금 보낸 이들이 돌아오면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빠이빠이해도  텐데 굳이 자리를 옮기겠다는  보면..

'암만봐도 그냥 납치하려는 것 같은데..'


왠지 그런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살짝 입술을 깨무는 척 하며 순순히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쪽도 원하는 바였으니까.


그렇게 나와 리파를 호위하듯 주변을 둘러싼 여성들의 인도에 따라  뒷편으로 빠져나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휘이익-

내 옆에서 걷던 리파의 입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터져나왔다.

뭘 하는 걸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한 찰나 저 멀리서부터 흙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웬 거대한 흑마가 이끄는 야생마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정정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야생마는 아니었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말들이 우리 앞에 도착한 순간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여성들이 익숙하게 자신의 애마를 맞이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리파의 애마는..

푸르르릉-


아까  놈이었다.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면서 무리를 선도하던 시커먼 놈 말이다.


다른 말들의 거의 두 배는  것 같은 거대한 체구.

명백히 말이라는 생물의 규격을 초월한 듯한 생물체를 리파는 너무나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예쁘면 뭐든 다 용서된다고 하던가?

리파가  그랬다.

그렇게 제 애마와 딱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그림이 되었으니까.

"어때? 멋지지 않나?"

내게 제 애마의 우수함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제 자동차를 자랑하는 느낌이라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확실히 멋있긴 했지만.

"내 자매같은 아이지."


뭐야, 암컷이었어?


저 덩치로?


속으로 헛웃음을 흘린 순간.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흑마가 푸르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리파의 손에 제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애교에 가까운 그 반응이 기껍다는 듯 애마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리파가 이내 가볍게 뛰어올라 말 위에 올라탔다.

'허.'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역시 괜히 족장이 아니라는 걸까.

속으로 살짝 감탄하고 있자니..

"자."


리파가 날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설마 지금 저 가는 팔로 날 말 위로 끌어올리겠다는  그런 걸까.

"..가능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보여서 그리 말하니 갈색의 눈썹이 꿈틀하고 떨렸다.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모양.


그것도 잠시, 피식하고 웃은 그녀가 날 향해 내민 손을 살짝 흔들어댔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아니, 굳이 해보지 않아도  것 같은데..


그렇지만  몸의 신병을 틀어쥐신 양반께서 하고 싶다니 어쩌겠는가.

어울려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

놀랍게도 되더라.

아니 손을 올려놓은 순간 몸이 무슨 쑤욱하고 딸려올라가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바로 뒤에 올라타 있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거 잘못하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뭘 잡을 수도 없었다.


손을 어찌나 꽁꽁 묶어놨는지 손가락을 피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런 내 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리파는 예의  야만족 언어로 주변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뭐라뭐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였다.


"그.."


조심스레 그녀의 옷깃을 잡고 그녀를 불렀던 건 말이다.

"음? 무슨 일이지?"


"아니, 이대로 출발하면.. 떨어질 것 같은데요."

손을   있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대로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진다면 백이면  뒤통수가 바닥하고 찐한 딥키스를 나누게 되겠지.


그리고  바닥에 돌같은 거라도 튀어나와 있다면 그대로 세상과 빠이빠이하게 될 테고 말이다.


그래서 뭐라도 조치를 취해달라고 어필을 해봤는데..


"흠, 확실히 이대로면 위험하긴 하겠군."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고 혹시 손목을 묶고 있는 걸 조금이라도 헐겁게 해주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고 있으니..

"잠시 팔을 들어보지 않겠나?"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겨있던 리파가 이내 그런 요구를 해왔다.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해봤더니..

"어때? 이럼  안심이 되겠나?"

그걸 그대로 잡고 내려서 내 팔 사이로 제 몸을 쏙 통과시키더라.


덕분에 자세가 굉장히 야릇해졌다.


내가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듯한 모양새라고 해야할까.

내 손이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로맨틱하게 보였을텐데 말이다.


손이 묶여있다 보니 놀이기구에 달린 안전바가 된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자꾸 빼어난 수컷이니 아름다운 수컷이니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까긴 했지만 설마 기회가 생기자마자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제 허리를 둘러싼  팔뚝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대던 리파가 대뜸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하-!"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에 우렁창 울음소리를 터뜨린 흑마가 그대로 앞으로 확 튀어나갔다.

그에 맞춰 몸이 앞으로 확 쏠리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리파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콧속으로 파고들어온 그녀의 체향은.. 숲에서 나던 냄새하고  닮아있었다.


상쾌한 향이라고 해야할까.


맡으면 맡을수록 중독되는 느낌이라 반사적으로 그걸 들이키고 있자니, 돌아온 반응이 또 가관이었다.

"자꾸 그러면 간지러운데."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신경쓰이긴 했는지 내쪽을 힐끔하고 돌아본 리파의 얼굴에서 부끄러워하는 기색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뭐랄까..


살짝 이쪽을 도발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미소가 얼굴 위에 보란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뜻밖의 여정은..

"윽.."


상당히 힘겨웠다.


엉덩이도 엉덩이였지만 다른 부분이 너무 아파서 죽을  같았으니까.


 굳이 날 자기 뒤에 태우나 했더니만..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말의 움직임에 맞춰 앞에 타 있는 리파의 몸이 자연스레 위아래로 흔들렸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말을 타는 데 몸이 안 흔들리는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까.

문제는 우리 둘의 자세였다.

바짝 밀착해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니..

리파와   차이 때문에 얇은 가죽에 덮여있던 그녀의 엉덩이가 자연스레 내 하복부 위를 왕복하기 시작했다.

아니, 자연스럽게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분명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건이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이고 나서부터는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비벼오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이다.

이게 초원의 마인드라는 것일까.

덕분에 농담 아니라 진짜로 죽을  같았다.

우렁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리파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얇은 가죽 한 장에 덮인 리파의 엉덩이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바짝 힘이 들어간 물건을 자극해대는데..


가죽이 어찌나 얇은 지 그 아래 자리한 엉덩이의 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물건에 힘이 들어갔고.

그렇게 한참동안 이어지던 생각치도 못했던 방식의 대딸은..

"도착했군."

꾸역꾸역 사정감을 참아내던 내가 초주검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지평선 끝에서부터 뿅하고 솟아오른 수많은 천막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시발..'

그래도 말 위에서 싸는 것만큼은 피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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