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가만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 들어봐도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놈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 십수 명.
심지어 어중이떠중이 같지도 않았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찌릿찌릿한 감각이 피부를 콕콕 찔러왔으니까.
선임이라고 거들먹대던 년들이 입이 닳도록 떠들어대던 족장 친위대라는 놈들이라도 되는 걸까.
숲 저편에서부터 날아와 꽂히는 사납기 그지없는 살기들을 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다.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문제는 역시..'
저 새끼인데.
사람이 뒤지는 걸 코앞에서, 라이브로 직관하는 게 처음인 걸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말랑말랑한 멘탈의 소유자였는지 주인공 놈은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걸까.
딱봐도 그런 것 같았다.
저런 놈을 달고 도망이라..
가능할까?
몸에 걸친 거라고는 단촐하기 그지없는 작업용 가죽 옷에 무장도 검 한자루 뿐인데?
그 생각이 든 순간 깨달았다.
'둘'이 함께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절대로 무리라는 걸.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오른 '해결법'에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확실히 내가 그동안 열심히 조연 짓을 해대긴 했나 보다.
해결법이랍시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하필이면 이딴 거라니.
기분이 더러웠다.
스스로가 결국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는 조연밖에 되질 못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버린 것만 같아서.
그래서 곧장 그걸 폐기처분하려고 했는데..
'아니지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썩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 말고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법으로는 말이다.
그래서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여전히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있는 주인공 놈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던 건.
고민하고 있던 그 잠깐동안 소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 상황.
그렇기에 구구절절하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을 여유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퍼억-!
"아악..!"
그대로 놈의 등을 걷아찼다.
이만 정신차리라는 뜻을 듬뿍 담아서.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일까.
뒤에서 걷어차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던 놈이 날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왔다.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쓸데없이 사람을 걷어차냐고 항의라도 하는 것일까.
째릿하고 날 노려보는 놈의 멱살을 움켜쥐어 강제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놈을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소리 들리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우리 지금 좆됐다고.
다행히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귀에 담을 이성 정도는 남아있었던 것일까.
금세 얼굴이 핼쑥하게 변한 놈을 상대로 일러주었다.
신호하면 뒤 돌아보지 말고 숙영지까지 일직선으로 냅다 튀라고.
"너, 너는.."
"어쩌겠어. 둘다 도망치기에는 무린데. 둘 다 뒤질 수는 없잖아."
그러니 그나마 시간을 끌 수 있는 놈이 남아서 시간을 끌어야하지 않겠냐고 덧붙이니 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눈치챈 거겠지.
내가 자기를 위해 시간을 벌려고 한다는 것을.
어쩌면 같이 가자거나 제가 남겠다고 쓸데없이 징징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새끼 봐라?'
의외로 이 놈은 주인공치고는 꽤 현실적인 놈이었던 모양이다.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말이다.
"좋아. 알아들은 것 같네."
그 사이 소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 상황.
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팔꿈치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놈의 몸을 슬며시 떠밀었다.
"뭐해? 당장 안 뛰고."
그래, 이게 조연이지.
암 그렇고 말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니 입술을 꽈악하고 깨문 놈이 파르르 경련하는 제 허벅지를 손으로 내리쳤다.
퍽-! 퍼억-!
그런 소리가 두어번 정도 울려퍼지고, 다리에 깃든 떨림이 가신 순간 놈이 그대로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놈이 나무 사이로 쏘옥하고 자취를 감춘 순간이었을 것이다.
파스스슥하고 여태껏 들려왔던 소리들 중에 가장 큰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며 풀숲을 뚫고 시커먼 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몸매를 지닌 '여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우야..'
인상적인 건 그녀들의 복장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동물의 가죽하고 털을 엮어서 만든, 노출도가 상당한 옷들을 몸에 걸치고 있는데..
다들 하나같이 매끈하고 탄탄한 복부가 훤히 드러나 있어서 어디다가 눈을 두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니..
여성들의 대표격으로 보이는 인물이 내 발밑에 깔려있는 시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뭐라는 거야 시발.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사납기 그지없는 걸 보면 이쪽을 협박내지 위협하는 느낌인데..
더이상 제 동포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라는 걸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험삼아 검끝으로 시체를 쿡 찔러봤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 조금 전과 같은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소린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몸을 숙여 뒤져 나자빠진 놈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퍽-
퍼퍽-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수풀 뒤하고 나무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대로 시체에 박혀들었다.
'역시나..'
아까 들려온 소리에 비해 모습을 드러낸 년들의 수가 적다 싶더라니만.
활쟁이까지 있다라.
난이도가 떡상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는 느낌이었다.
변변찮은 방패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고인한테는 참 미안하지만 조금 더 신세를 지는 수밖에.
그래서였다.
목에 자그마한 손도끼를 대롱대롱 매단 채 뒤져버린 놈을 방패 삼아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던 건.
함부로 공격을 시도했다가 방금처럼 제 동포의 시신만 욕보이고 끝나게 될까봐 우려가 되었던 걸까.
날 둘러싼 년들은 쉽사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아니지 이제 보니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묘하게 히죽히죽 웃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날 가지고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 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렇다면?
함부로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 건 상처없이 이쪽을 사로잡기 위함이겠지.
그래야 최대한 오랫동안 이쪽을 씹고 뜯고 맛보고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째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히죽히죽 거리면서 보란듯이 입술을 핥짝이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니 꼴린다기 보다는 좀.. 소름끼쳤다.
'시발..'
정조의 위협이라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내가 이런 걸 느끼게 될 줄이야.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확실히..'
직접 느껴보니까 지금 내가 처한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여기사들이 '큿, 죽여라..!'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대로라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될 것같다는 불안감이 피부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몸이 제멋대로 경직되면서 괜히 초조한 마음이 울컥울컥 솟아오르는데..
"큿, 죽여라..!"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봤다.
솔직히 직접 내뱉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긴 했으니까.
이런 멘트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어차피 피차 말도 안 통하는 상황이라서 이쪽이 뭐라 씨부리던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내뱉고 봤던 것인데..
"죽이라니? 그럴 순 없지."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다만 아까 전부터 전면으로 나서던 대장 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 년의 목소리가 클레어의 것마냥 허스키하다면 지금 들려온 건 그런 기색따위는 하나도 없이 청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목소리에 힘이 있었고.
그 목소리와 함께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년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멀리서봐도 눈에 확 띌 것 같은 흰색의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웨이브치는 갈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장신의 여성이었다.
170cm쯤 될까.
그래서인지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더 길어보이는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제 부하들 사이를 가로지른 그녀가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렇게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미쳤네..'
그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몸매였다.
극한의 슬랜더라고 해야할까.
길게 뻗은 다리에 기마민족답게 화가 잔뜩 나 있는 엉덩이,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잘록하면서도 탄탄한 허리까지.
거기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두 개의 언덕이었다.
레이시아의 것처럼 크지는 않았다.
손으로 움켜쥐면 손에 꽉 들어찰 것 같은 적당한 사이즈였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잘 어울렸다.
여기서 조금 더 작았거나 조금 더 컸다면 이토록 조화롭게 느껴지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신이 공을 들여 빚어낸 듯한 몸매의 소유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제 몸매가 다른 이들에 비해 몇 배는 더 아름답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걸까.
그녀의 복장은 주변에 있는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과감했다.
무슨 치파오 드레스마냥 다리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 흰색의 천 양옆로 탄탄해보이는 허벅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슬쩍슬쩍 움직일 때마다 치골이 조금씩 드러나는 게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쪽에 시선이 갔다.
후하고 가볍게 웃은 그녀가 내게 보란듯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스윽하고 쓸어내렸다.
그와 함께 매끈하게 다듬은 겨드랑이가 수줍게 인사를 건네오길래 그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으니..
"그대는 부족의 은인이자 내 은인이니 말이야."
그렇게 내 시선을 제게로 끌어당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부족의 은인이자 자신의 은인이라니?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제 동포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걸까.
방심하게 만들고 기습하려는 수작일지도 몰라서 긴장을 풀지 않고 잽싸게 주변을 스캔해봤지만 눈앞에 서 있는 년도 그렇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년들도 그렇고 움직일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대가 경계심을 풀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까닥 잘못하면 험한 꼴을 당할 뻔 했으니 말이야."
그러는 와중에도 갈색머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해해주기 바라. 그대같은 빼어난 수컷을 앞에 두고 스스로 자제하기엔 내 부하들이 많이 굶주린 상태라서 말이야."
되게 묘한 목소리였다.
계속 듣고 있으면 그대로 홀라당 설득되어버릴 것만 같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라고 해야할까.
심지어 몸매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이 말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은인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대의 손에 들려있는 그 놈, 그대가 죽인 거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역시 은인이 맞군."
"이 놈이 뭐 그쪽 부족의 배신자라도 되나 보죠?"
"맞아. 감히 부족의 신물을 들고 도망쳤지."
대체 그 신물이라는 게 뭐길래 이미 죽인 사람을 저렇게 죽일 듯 노려보는 걸까.
심히 궁금했지만 일단 닥치고 있었다.
왠지 일이 생각치도 못한 방식으로 잘 풀릴 것 같은데 괜히 관심을 보였다가 이쪽이 신물인지 뭔지를 탐낸다고 오해를 사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혹시 이만한 크기의 푸른 구슬을 보지 못했나?"
"어.."
주먹만한 크기의 푸른 구슬이라니.
그런 건 본적 없었다.
애초에 그만한 크기면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을텐데 말이다.
혹시 이 놈을 여기까지 끌고오는 동안 떨어뜨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랬다면 날 여기까지 몰고 온 년들이 주워서 제 대장한테 낼름 가져다 바쳤을테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안 믿어주겠지?
그도 그럴 것이 보물도 아니고 신물이라고 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더라도 내가 그걸 욕심내고 몰래 숨겼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대답을 해야하긴 했기에..
"그런 건 보지 못했습니다만."
내 딴에는 최대한 결백한 목소리로 그리 내뱉어봤다.
"흠, 그래?"
효과가 있었던 걸까.
마주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연분홍빛 입술이 씩하고 말려올라가며 갈색머리의 얼굴 위로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가 배어들었다.
"그대의 결백이 증명될 때까지 그대의 신병은 이쪽에서 맡도록 하지."
처억하고 갈색머리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허튼 저항은 하지 않길 바라. 그대같이 아름다운 수컷을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그와 함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가 살짝 흔들리며 그 사이에서 일단의 여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의 손에는..
끼이이익-
팽팽하게 당겨진 활이 쥐어져있었다.
금방이라도 이쪽을 향해 날아들 것처럼 날 향해 겨눠진 화살촉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살벌한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렇게 빛나는 게 총 아홉 개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항복."
망설임 없이 검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