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90)화 (90/366)



〈 9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날 설득하는데 실패한 디아나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채로 돌아가고, 그 다음으로 날 찾아온 건 다름아닌 카트린느였다.

의외였던 건 앞서 찾아온 두 명과는 다르게 그녀는 날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챙겨가면 어떤 식으로든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면서 직접 만든 구급약들을 한가득 챙겨주었을 뿐.


그렇게 다들 시무룩해진 가운데 유일하게 신이 난 이가 있다면 다름아닌 앨리스였다.


아, 그렇다고 그녀가 날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도  걱정하긴 했다.


내 생각을 돌리기 위해 날 설득해보려고도 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설득할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즐기는 자 모드로 돌아서버렸지만.


앨리스가 태세를 전환하니 약이 올라 죽어나는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자긴 또 따로 떨어져있게 생겼는데 앨리스는 나와 계속 붙어있게  상황.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디아나는 어떻게든 제가 배정받은 근무지를 바꿔보고자 동분서주했지만..


부장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

그렇게 디아나가 약올라서 죽으려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남부로 떠나는 날이 도래했다.


아, 저번 파견 때는 동부로 떠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출발했었다면 이번에는 남부로 파견가는 이들이  빠따였다.


다른 곳을 배정받은 이들은  다음이고.


그 덕분이었다.

지금 이렇게 디아나의 배웅을 받을 수 있는 건 말이다.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모르지 않을텐데도 그녀는  향해 걱정을 내비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합법적으로 손을 잡을  있는 이 기회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쯤하시죠? 이제 저희 슬슬 출발해야 하는데."

뒤에서 승리자의 얼굴을 한채 팔짱을 끼고 있던 앨리스가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딴지를 걸어왔다.

 행복한 시간을 앗아간 앨리스가 못내 원망스러웠던 걸까.


째릿하고 그쪽을 한  노려본 디아나가 내 손을 놓고는 그 대신 아까 제 뒷쪽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통같은 걸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안 그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대체 뭘 챙겨온 것일까.

"그건.."


의아하다는 투로 그리 내뱉으며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디아나가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 것일까.

"선배..?"

의아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녀를 부르니 후하후하하고 작게 심호흡을 반복하던 디아나가 꼬옥하고 끌어안고 있던 것을 날 향해 불쑥 내밀었다.


"받, 받아다오."

대체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러는 걸까.

설마 저번에 내가 도시락을 챙겨줬던 것처럼 그녀도 도시락을 챙겨온 것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날 향해 들이밀어진 것을 받아든 순간 깨달았다.


이건 절대 도시락 따위가 아니라는 걸.


음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게감이 묵직하게 내 손을 짓눌러왔다.

안에 든 게 대체 뭐길래 이렇게 무거운 걸까.

궁금한 마음에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져봤지만 그녀는 답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니,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부끄러워서 땅으로 파고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그.. 나,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열어보거라."

그렇게 은밀하게 확인해야하는 선물이라니.


점점  궁금해졌다.

덤으로 불과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밴드가 그녀의 손가락 위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도.


"알겠습니다."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을 꾹꾹 내리누르면서 디아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잠잠했던 기차가 뿌우뿌우하고 세찬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보니 이제 정말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했으니까.

그렇게 디아나한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고 하니..


"이안..! 그.."


그녀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아왔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기라도  것처럼.

"..네?"

그에 승리자의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앨리스의 눈빛 속으로 경계심이 어리기 시작하는 걸 눈에 담으며 다시 디아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의아한 목소리를 내봤지만..


"..아니다."


대체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디아나는 기껏 용기를 냈던  무색할 정도로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했다.

"조, 조심해라."

대신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을 뿐.

그런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건네주었던 커다란 통을 꽉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그럼, 가자."

뒤쪽에서 움찔움찔대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앨리스가 많이 봐준 거였으니까.

여기서  질질 끌게 되면?


출발하기도 전에 피곤함부터 한가득 떠안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다들 열차에 올라타기 시작한 걸 보면 이제 정말 출발할 시간인 것 같았고.

그래서 디아나를 뒤로 한채 천천히 열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앞으로 배정된 좌석은 다름아닌 주인공 놈의 맞은 편이었다.

그래도 둘뿐인 남자라고 남부까지 가는동안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학원 측에서 배려를 해준 것일까.


대체 언제 올라탄 것인지 주인공 놈은 제 자리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한참 걸릴테니 체력이나 비축해놓겠다는 걸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놈을 향해 다가가니 그런 내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놈이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다.

"먼저  있었네?"


"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가운 척을 해봤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쪽을 향해 고개를 한 번 까딱하더니 그걸 그대로 옆으로 홱하고 돌려버리더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출발한다고 생각하니 긴장한 걸까.


턱에 살짝 힘이 들어가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아는 척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보이는 얼굴을 한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말이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잘 다녀오겠다는 뜻을 담아 그녀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녀가 건네주었던 통을 가져와 흔들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봐야 2주 뿐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못 볼테니 나름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쯤 억지로 지은 티가 나서 많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렇게 창문 너머로 디아나와 시선을 주고 받고 있자니..

"..사귀는 거야? 저 선배님이랑?"

맞은 편에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으음.."

그에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볼을 긁적이니 생각해보니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건지 주인공 놈이 살짝 뜨고 있던 눈을 다시금 스르륵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뿌우우우우-


우렁찬 소리와 함께 멈춰있던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차가 역을 떠날 때까지도 디아나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어색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로.

목적지인 아벨 요새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기차로 하루하고도 반나절, 그리고 도보로 반나절해서 그렇게 총 이틀이었다.


덕분에 목적지인 요새에 도착할 때쯔음에는 다들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물론, 나도 지친 건 마찬가지였고.

"하악.. 흐어헉.."


그래도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주인공 놈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차에서 내릴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더라니 놈은 어느새 초주검이 되어있었다.

여태껏 자빠지지 않고 계속 걸은  용하다 싶을 정도로.

"괜찮아?"


말 그대로 죽으려고 하니 그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무, 물좀.."


대답대신 돌아온 건 그런 말이었지만.

그리 말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어오길래 바라는대로 허리춤에 끼고 있던 물통을 끌러내어 그 손안에 쥐어주니 잠시 움찔했던 놈이 다급하게 그것의 뚜껑을 따 제 입쪽으로 가져갔다.

콸콸 쏟아지기 시작한 물이 놈의 입술과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게 옷을 적시건 말건 놈은 다급하게 물을 들이키기 바빴다.

그렇게 놈이 시원하게 원샷을 때리고 있는 사이, 끼리리릭하는 살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렸다.


이제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뒤에 파견근무동안 근무할 부대를 배속받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겠지.


'어디가 걸리려나..'


정찰대같은 곳만 아니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귀신같이 정찰부대로 배속되더라.

'시발..'

또다시 천막 신세를 지게 될 줄이야.

그래서일까.

밤동안 신세를 졌던 요새 생활관의 딱딱한 침대가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좀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제 3정찰대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부대로 배속받은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말해 무엇하랴.

나는 주인공 놈과 같은 부대로 배속받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제 3정찰대에서의 생활은 걱정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평범했다.

애초에 맡겨지는 일이라고는 거진 다 잡일 뿐인데다가 하루가 멀다하고 전투가 벌어진다는 악명하고는 다르게 생각외로 잠잠했으니까.


그렇다고 바쁘지 않았다는  아니고 평범하게 바빴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사건이 터지지 않는  어딘가 싶었으니까.

물론, 아무 일 없이 잠잠하다고 해서 마음을 놓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원래 사건이라는  주로 이럴 때 벌어지곤 하니까.

일단 주인공 놈이 이쪽에 있는 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확정이기도 했고.

문제는 그 사건이라는 놈이 과연 어떤 식으로 터지냐는 건데..

무엇하나 예측할  없는 상황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그게 부디 최악의 형태만은 아니길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야만족의 대규모 침입같은 거라도 벌어지면 아무리 나라도 주인공 놈을 데리고 무사히 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

"장작 주우러 가려고?"


"응, 떨어졌다고 하셔서."


그래서였다.

자꾸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귀찮음을 무릅 쓰고 주인공 놈이 어딜  때마다 그 옆에 찰싹 달라붙었던 건 말이다.

일단 옆에 있어야 무슨 일이 터지든 간에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에도 따라나섰던 건데..

'..어?'


그동안 주로 외곽만 털어댔더니 외곽에서는 더이상 주울만한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평소와는 다르게 나름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목을 휘감았다.

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라서 살짝 긴가민가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

"응?"

바닥에 쪼그려앉아 자그마한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으던 주인공 놈쪽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놈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눈으로 쫓으니..

"발..?"

볼  있었다.

무성하게 드리워진 수풀 사이로 웬  하나가 삐져나와 있는 모습을 말이다.


문제는 그게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말 그대로 맨발이었다는  정도?

그에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을 찌푸린 순간.


파사삭-

그런 소리를 내며 위에서부터 떨어진 뭔가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주인공 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벌어진 일.

그렇기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걸 뽑아들거나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였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놈을 향해 내던졌던 건.

퍼억-!


둔탁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손에 들려있던 자그마한 손도끼가 나무 위에서 등장한 괴한과 정확하게 충돌했다.

"커허억-!"


습격자 놈은 운이  좋질 못했다.

작업용 손도끼가 목에 애매하게 꽂혀버린 바람에 즉사도 못하고 바닥에서 벌레마냥 바르작대는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 피에 익사당하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놈의 안위를 신경 써줄 겨를같은 건 없었다.


파스스스슥-

놈이 내지른 비명이 신호라도 되었는지 사방에서 수풀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리고 그 소리들은..


'시발..'

하나같이 전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깨달았다.


이거 좆됀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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