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89)화 (89/366)



〈 8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슬슬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았다.


분위기에 취해서 기분을 너무 내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덤으로 이런 세계라도 히로인들은 히로인들이라는 것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부다처가 이 세계에서는 평범한 일이라는  깨닫고는 눈에 띄는 히로인 후보들마다 싹다 차지하기로 결정했을 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그 한국산 카사노바 놈하고는 다르게 나는 이런 쪽으로는 정통하질 못하니까.

그렇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이러다가 진짜 큰일날 수도 있겠는데..'

바로 그거였다.


좆됐음을 알리는 냄새가 풀풀 풍긴달까.

물론, 그 냄새를 풍기는 건 다름아닌 내 주변을 둘러싼 여성진들이었다.

"이안, 혹시 시간 괜찮다면 나와 저녁이나 함께하지 않겠나? 그.. 집사가 그대를 보고 싶어해서 말이야."

"그.."


"그러고보니 저번에 나한테 괜찮은 식당 좀 소개시켜달라고 하지 않았어? 오늘이라면 얼추 시간이 괜찮을 것 같은데.."


"어.."

그래, 이쯤되니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히로인들이 지닌 '독점욕'이라는 욕망에 대해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내 저녁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일  노려보고 있는 디아나와 앨리스를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런 광경을 보는 게 오늘만해도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그랬다.

최근 들어 여성들이 내게 독점욕을 드러내는 일이 굉장히 빈번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지금 내 눈앞에서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세계판 유사 화이트데이에 있었던 일이 계기가 됐던 걸까.

레이시아도 그렇고, 카트린느도 그렇고 날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상태였다.


전보다 둘의 얼굴을 훨씬 더 자주 얼굴을 마주치게 된 게 그 증거라 할 수 있었고.

레이시아는 남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찾아오고, 카트린느는 몸에 좋은 거라면서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출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날 찾아오는 레이시아의 행동은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했다.

그에 비해 카트린느는 뭐랄까..


'그쪽이 제일 불안해.'

솔직히 그랬다.

처음에는 그녀가 건네주는 것들을 별 생각없이 받는 족족 받아마셨었다.


몸에 좋은 거라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대체 뭘로 만든 건지 궁금할 정도로 효과가 빼어난 편이기도 했고.


그런데 카트린느가 제가 건네준 약을 들이키는 내 모습을 묘한 눈으로 힐끔댄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부터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흐뭇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위험한 눈빛이었으니까.

이전처럼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셨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의식을 잃고 지하실같은데서 깨어나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모습까지 이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니 인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분위기에 취해서 너무나도 많은 업보를 쌓아버렸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그게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한다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과연 그게 언제까지 갈까.


차마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업보라는 이름의 칼날이 내쪽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해야할까.

그게 최근들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되었을 때 잘못된 대처를 해버린다면 여태껏 쌓아온 것들을 싸그리 날려버리는 건 물론 업보까지 고스란히 돌려받게될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서 한창 그걸 가지고 고민중이었는데..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거였다.

아무리 대책을 쥐어짜내려고 해봐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는  말이다.


도움이 될만한 뭔가를 찾기 위해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며칠이고 뒤져보기도 해봤다.

특히나 그 한국산 카사노바놈하고 같이 돌아다녔던 시절의 기억을 중점적으로 뒤져봤지만..


암만 뒤져봐도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반복해왔는지만 확실하게 알게 되었달까.

그렇기에 더더욱 고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통하고 안 통하고를 떠나서 뭐라도 대책을 세워놓을 필요성을 최근 들어 여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처해있던 내게..

"남부요?"


남부와 관련된 소식은 희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가운 소식 정도는 되었다.


"그래."


"남부라면 그.. 야만족들이 판친다던.."

"그래, 거기가 맞다."


남부로의 파견.


그게 두 번째 파견근무를 코앞에 두게 된 내앞으로 들이밀어진 선택지였다.

물론, 방금 교수의 발언으로 알 수 있듯 수도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저번처럼 강제적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부는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지나가다 주워들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잘한 전투가 벌어진다던데 그 정도면 사실상 이 왕국 최대의 격전지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곳에 당첨된 거였고.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처사다.


성적과는 별개로 아직 정식으로 임관하지도 않은 1년차에 불과한 생도를, 그것도 남자를 그런 곳으로 밀어넣는다?

'가서 뒤지라는 소리지 뭐.'

원래 나였다면?

저 말을 들은 즉시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격렬하게 거절의 의사부터 밝혔을 것이다.

굳이 그 멀리까지 간다는 귀찮음을 무릅쓰지 않더라도 지명권 쯤이야 이제 얼마든지 따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건..

'나쁘지 않을  같긴 한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최근들어  향한 여성들의 독점욕이 제철을 맞이한 생선마냥 부쩍 물이 오른 상황이라서 그게 걱정이었는데  타이밍에 파견근무를 핑계로 서로 떨어지게 된다면?


학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계속 부대낀 탓에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것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가능성이라도 있는  어딘가 싶었고.

'그리고 뭣보다..'


주인공 놈은 이미 남부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날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 들어 부쩍 좋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놈은 아직 하아아아안참 허약했다.


어디 놀라갔다가 꽥하고 뒈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런데 그런 놈을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곳으로 혼자만 덜렁 보내버린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사건을 불러들이는 주인공이라는 놈들의 종특을 생각하면 다른 데서 순찰같은  돌고 있는 와중에 실패를 알리는 메시지가 갑자기 눈앞으로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많이 귀찮더라도 놈의 옆에 붙어서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순간  머릿속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거기에 주인공 놈 이름 바로 아래에 앨리스의 이름이 같이 적혀있었던 것도 살짝 마음에 걸렸고.

그토록 상대하기 껄끄러워하던 디아나를 상대로 당당히 나설 정도로 이미 내게 빠져버린 앨리스가 고작 2주만에 주인공 놈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주인공이라는 놈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놈들인지 옆에서 지켜봐온 입장에서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어떻게 할 거냐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교수의 눈빛에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알겠습니다. 남부로 가겠습니다."

"..한 번 결정하면 바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얼른 결정하라고 눈빛으로 압박을 주더니 이제는 또  마음을 돌려보겠다는 걸까.


정말 괜찮겠냐는 투로 던져진 교수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그런다고 해서  결정이 바뀌거나 그러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뜻으로.

그렇게 남부로의 도피를 택한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내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이 다들 하나같이 끗발 좀 날리는 이들이었다는 것 정도?


"소식.. 들었다."

내 소식을 전해듣고는 가장 먼저 날 찾아온 건 놀랍게도 레이시아였다.

그렇기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나마나 디아나가 첫 번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기사부에 사람이라도 심어놓은 걸까.

그게 아니고서는  속도는 말이  되는데..

파견지도 결정되었겠다 미리 가져갈 짐이나  챙겨둘 생각으로 기숙사에서 짐을 꾸리고 있다가 졸지에 그녀를 손님으로 맞게된 나는 다짜고짜 던져진 그녀의 말에 일단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그제서야 제가 좀 많이 급했다는 걸 깨달은 걸까.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오르더니 큼하고 헛기침을  번  그녀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남부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고."


"아, 네. 그런데 그건 어떻게.."


그게 진심으로 궁금해서 슬쩍 말끝을 흐리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냐는 시선을 던져봤지만 레이시아는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슬쩍 시선을 피하기만 했을 뿐.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그걸 알아낸 방식이 남들에게 알려줄 정도로 떳떳한  아니라는 걸.

아무래도 제가 손에 거머쥐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서 어떻게 한  같은데..

이런 권력남용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귀엽네 귀여워.'

속으로 피식하고 웃으면서도 방 안에 비치되어있는 의자를 끌어와 그녀 쪽으로 대령했다.


"아, 일단 앉으시죠."


그리고 레이시아는 그런 내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흠하는 소리를 내며 내가 대령한 의자에 앉은 그녀가 이내 고개를 살짝살짝 돌려가며 내 방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새삼 남자의 방이라는 장소가 신기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그녀의 귀여운 행동을 모르는 척 하며 다른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맘같아서는 차라도 한 잔 내어주고 싶은데..


"흠, 손님이 왔는데  한 잔도 내어주지 않는 건가?"


없는 걸 어떻게 내어준단 말인가.

그래서 차대신 그녀가 기뻐할만한 멘트를 대접해주었다.

"방에 누가 찾아온 게 처음이라서요. 다음부터는 준비해놓겠습니다."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순간 나는 봤다.


이곳에 찾아온  제가 처음이라는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이는 레이시아의 귀가 쫑긋대는 모습을 말이다.

동시에 입꼬리도 묘하게 움찔대는 것이..

많이 기뻐보였다.

보는 내가 다 흡족해질 정도로.

물론, 그리고 나서 살짝 후회하긴 했다.


더는 여성들을 자극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저질러버렸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것을.


속으로 씁쓰름하게 웃고 있자니 큼하고 헛기침을 해 얼굴 위에 잔존해있던 기쁨이라는 감정을 몰아낸 레이시아가  얼굴을 힐끔힐끔 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정말 괜찮겠나?"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정말 남부라도 괜찮겠냐고.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내가 여기서 안 괜찮다고 말하기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다른 곳으로 바꿔주기라도 할 기세였다.


내가 억지로 끌려가는 거였다면?


그런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허나 나는 이미 내 의지로 남부로 향하기로 결정한 상황.

그렇기에 레이시아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뭐,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야겠죠. 위에서 그렇게 결정한거니 말입니다."

그리 말하면서 아까 챙기고 있던 짐들이 놓여져있는 곳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지니 그런 날 따라 눈을 돌렸다가 싸다가 만 행낭을 발견한 레이시아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방금 그걸로 날 설득하기 어려울 거라는 걸 깨달아버린 모양.


그렇게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농담을 걸었다.

"그래도 걱정해주신 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누가 네 걱정을 했다고. 본녀는 그저 디아나가 본녀를 찾아와서 하소연하는 게 걱정됐을 뿐이다."

누구는 걱정되서 죽겠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쓸데없이 농담이나 하는 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레이시아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상태로 내 시선을 피하듯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자니..

"그래도 다치지 말고 돌아오도록. 다치기라도 하면 본녀가.. 디아나한테 많이 시달리게 될테니 말이다."

여러모로 솔직하지 못한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시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날 설득할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깔끔하게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이 참 그녀다웠다.


그렇게 레이시아를 그녀가 머무는 사저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니..

"이안.."

이번에는 디아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기숙사 입구에 몸을 기댄 채로 말이다.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 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오늘 이런 방문을 몇 번 더 받게 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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