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 선배 오셨어요?"
클레어 옆을 지나쳐 이제 막 탈의실 쪽으로 걸어오던 참이었던 걸까.
수련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클레어가 '사용'했던 목검을 손에 쥔채 탈의실을 빠져나가니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디아나와 딱 마주쳤다.
"어, 그, 그래.."
클레어가 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보니 설마 내가 자기보다 먼저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뭔가 신경 쓰이는 점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개를 연신 갸우뚱 거리면서 탈의실 쪽을 향해 다가오던 디아나가 살짝 놀란 듯 움찔하며 멈춰섰다.
"일찍 나오셨네요?"
"그, 그러는 너도.."
아무래도 날이 날이다보니 이쪽이 의식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디아나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뒤로 모아 묶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귀엽네.'
그게 꼭 골든 리트리버 꼬리처럼 보여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맺혔다.
그래서였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유독 일찍 눈이 떠지더라구요."
그런 그녀를 상대로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도 있는 멘트를 흘렸던 것은.
살짝 희한하다는 투로 그리 말하니 대체 무엇을 상상한 것인지 디아나아의 얼굴 위로 살짝이지만 홍조가 어렸다.
그것도 잠시 내 손에 들려있는 게 평소처럼 봉이 아닌 목검이라는 걸 확인한 그녀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아, 이거요? 스승님이 혹시라도 창을 못 쓸 때를 대비해서 검 연습도 좀 해두라고 하셔서요. 그래서 안에 있는 걸로 하나 빌렸는데.. 괜찮을까요?"
그제서야 내 손에 들린 목검이 제가 평소에 수련할 때 사용하던 것 중에 하나라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나, 나야 상관없다만 그래도 이왕이면 새 것을 쓰는 편이.."
"이게 마음에 들어서요."
"그, 그래.."
그때 디아나의 어깨 너머로 얼핏 보였던 클레어의 얼굴은..
나를 향한 원망과 바로 조금 전까지 탈의실 안에서 느꼈던 열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있었다.
눈으로는 사납게 날 노려보면서도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날 올려다보던 모습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클레어 쪽을 힐끔거리고 있자니..
"그.."
디아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에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니 뭔가 굉장히 할 말이 많아보이는,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듯한 얼굴이 눈 속으로 박혀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생각하면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 지야 뻔하디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럼, 갈아입고 나오세요."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살짝 실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디아나를 탈의실 안으로 들여보낸 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클레어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미쳤어?"
그러자 귀로 날아와 꽂힌 건 상처입은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납기 그지없는 눈빛은 덤이었다.
"왜요?"
그래서 뻔뻔하게 받아쳤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올 거라고는 아무리 그녀라도 예상치 못했던 걸까.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히기라도 했는지 클레어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으.."
당황한 바람에 머리가 굳어버려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애꿏은 입술만 꾹 깨물면서 끙끙거리는 클레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스윽-
"자, 잠.. 뭐하는.."
"가만히 있어봐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아까 탈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만 아까하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전라였던 아까하고는 다르게 살짝 펑퍼짐한 수련복 바지가 그녀의 하체를 감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수련복 바지만 말이다.
말해 무엇하랴.
클레어는 지금 수련복 아래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워낙 급박하게 뛰쳐나가느라 속옷까지 챙겨입을 시간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젖었네요?"
얇은 천 너머로 그녀의 음부가 흩뿌리는 열기와 습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에 피식하고 웃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그리 속삭이니 내게 손목이 잡힌 채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대고 있던 클레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꼭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치부라도 들킨 것같은 그런 반응이었다.
"흥분됐죠? 목검 끝에 묻은 게 선배한테 들킬까봐."
"아, 아냐.. 나는.."
아무리 그녀라도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건 무리였던 것일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려고 하길래?
"흐읍..!"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 들어가있는 손을 움직여 얇은 천 위로 꿋꿋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던 그녀의 발정버튼을 꾸욱하고 짓눌렀다.
살덩이가 손가락 아래에서 짓눌리는 감각과 함께 내게 팔목이 잡혀있는 탓에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올리고 있던 클레어의 몸이 격렬하게 펄떡거렸다.
그 와중에 제자인 디아나한테 음탕하기 그지없는 암컷의 신음소리가 들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그녀가 다급하게 입술을 깨물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흐으으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지만.
"하, 하지마앗.."
"왜요?"
"디, 디아나가.."
디아나한테 들킬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물어봤다.
"그래서요?"
그게 뭐 대수냐는 것처럼.
설마 내가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클레어으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졌다.
그래서일까.
"드, 들키면은.."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그 사이로 가녀리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인 순간 나는 들었다.
그 광경을 상상이라도 한 것처럼 클레어가 흡하고 작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그것도 잠시 클레어가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듯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디아나를 아끼는 그녀이니만큼 디아나에게 상처가 될만한 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걸까.
나름 꽤 격렬하게 도리질을 쳐대길래..
"그럼 부탁해봐요."
계속해서 속삭임을 이어나갔다.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가 만족할만한 말로 부탁을 해봐라.
그러한 뉘앙스가 담겨있는 내 발언에 클레어가 콰득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것도 잠시..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노, 놓아주세요.."
한없이 가녀린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순식간에 굴복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있자니 왠지 모르게 흥미가 팍 식어서..
"뭐, 그래요."
더 농락하지 않고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차피 슬슬 디아나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걸어나올 타이밍이기도 했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클레어의 손을 놓고 그녀에게서 살짝 몸을 떨어뜨리기 무섭게 탈의실 문이 열리며 예의 그 몸에 쫙 달라붙는 타이즈 세트로 갈아입은 디아나가 그 안에서 걸어나왔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데면데면한게 기본한 클레어와 내가 아주 약간의 거리만을 남겨둔 채 붙어있으니 그게 의아하게 느껴졌던 걸까.
"스승님?"
디아나가 의아하다는 투로 클레어를 불렀다.
둘이 지금 뭐 하던 중이었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를 듣고 지레 찔리기라도 했는지 클레어가 어깨를 움찔거리길래..
"아, 나오셨어요?"
잽싸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클레어가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광고라도 할 기세였으니까.
"스승님한테 자세 좀 교정받고 있었어요. 검을 잡는 건 아무래도 오랜만이라서.."
"아."
이제서야 이해가 좀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디아나가 슬금슬금 나와 클레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제, 제가 봐줘도 될까요?"
수줍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클레어를 향해 그리 물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게서 떨어질 기회만 엿보고 있던 클레어는 제 앞으로 던져진 그 기회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든 말든 자긴 딱히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렇지만 난 봤다.
황급히 몸을 돌려 멀어지는 클레어의 새카만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인 귀가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걸 말이다.
그런 제 스승의 상태도 알지 못한 채 디아나는 합법적으로 나와 붙어있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게 그저 기쁘다는 듯 자꾸만 솟아오르려고 하는 입꼬리를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다.
"큼, 그럼 스승님도 허락하셨으니까 오늘만 특별히 내가 봐주도록 할게."
그렇게 선심쓰듯 말할 거면 자꾸만 움찔대는 입꼬리부터 어떻게 좀 하고 말을 하던가.
입꼬리는 물론 뒤로 모아묶은 금빛의 머리카락까지 팔랑팔랑 흔들어대는데 누가봐도 기뻐서 죽으려고 하는 눈치였다.
"몸은.."
"아직이요."
"그럼, 몸부터 풀자."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행해지는 몸풀기 운동.
디아나는 이 시간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가 가르쳐준 자세들이 아직 어색하다는 핑계로 나와 합법적으로 스킨십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아직 좀 어색하시네요."
"으음, 적응이 안 되서.."
"잠시만요. 도와드릴게요."
일자로 쫘악하고 벌어진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채 그곳을 꾸욱하고 누르면서 앞으로 살짝 굽혀져있는 디아나의 등에 몸을 기대니 품 안에 갇힌 가녀리면서도 탄탄한 육체가 움찔하고 경련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몸만 밀착하고 있는 건데 이게 그리도 민망했던 것일까.
귀밑머리 옆으로 수줍게 고개를 드러내고 있던 디아나의 귀는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귀가 그 정도인데 얼굴은 어떻겠는가.
흡하고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귓속으로 은밀하게 파고들어왔다.
그렇게 감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하고도 간질간질한 침묵이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걸 깨뜨린 건..
"그.. 이안.. 오늘 말이다.."
놀랍게도 디아나였다.
무려 2주동안이나 강제로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파견근무 기간 이후로 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게 여기서도 나타나는 걸까.
전이었다면 분명 부끄러워서 말도 못 꺼냈을텐데 말이다.
"네?"
새삼 그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더듬더듬 내뱉어진 디아나의 말에 답을 했다.
그 분홍빛 입술에서 과연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 아니다."
안타깝게도 디아나의 용기는 이미 한도초과 상태였던 모양이다.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황급히 얼버무리는데..
내가 다 안타깝더라.
어찌나 안타까운지 내 계획을 귓뜸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리할 생각은 없었지만.
미리 알면 서프라이즈가 서프라이즈가 아니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꾸만 솟아오르는 욕망을 고양이가 꾹꾹이질을 하듯 꾹꾹 억눌렀다.
그러면서 성심성의껏 디아나의 가르침에 어울려주었다.
칼질 못하는 척을 연기를 하려니 살짝 고역이긴 했지만.
그렇게 디아나에게 자세를 교정받으며 검을 휘두르다가..
"앗, 벌써 시간이.."
탈의실로 들어가기 위한 핑계를 댔다.
"강의가 있나?"
"네."
솔직히 빠져도 딱히 상관없긴 했다.
월말평가 바로 다음날인데다가 유사 화이트데이라는 이벤트까지 겹치지 않았던가.
분명 분위기가 개판일텐데 그런 분위기에서 제대로된 강의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 사실을 디아나라고 모르지 않았던 걸까.
곧 강의시간이라서 이만 가봐야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내 말에 디아나가 할 말이 참 많아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기사부 부장이라고 빠져도 된다는 말은 하지 못했으니까.
그 말이 목구멍에 턱하고 걸려있는 게 눈에 훤히 보임에도 말이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그래.."
그렇게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해하는 디아나를 뒤로한채 탈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것과 디아나의 캐비닛을 동시에 열어젖혔다.
풀풀 풍겨오는 달큰한 향기.
그것을 만끽하면서 주머니 안에 고이 보관해두었던 디아나만을 위한 선물을 꺼내 디아나의 캐비닛 안에 걸려있던 제복 상의 주머니 안으로 옮겨담았다.
'과연..'
그녀가 언제쯤 그 사실을 눈치챌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두근대는 걸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