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밤에 진짜 쩔었지..'
그게 딱 눈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때 레이시아가 보여준 반응은 사랑스러움 그 차제였으니까.
덕분에 이제서야 좀 알 것도 같았다.
주인공이라는 새끼들이 왜 그렇게 히로인들한테 목을 맸던 건지를 말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이 나로 인해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진짜..
'인생 헛살았구만. 인생 헛살았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안타까웠던 점은 그토록 사랑스러운 표정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거다.
지인들한테만 주라는 그녀의 충고를 따른 거라고 은근슬쩍 둘러대니까 그녀도 정신이 좀 들었는지 언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냐는 듯 금세 얼굴을 수습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였다.
월말평가 바로 다음 날이라서 아침 구보가 예정되어 있지 않음에도 이렇게 일찍 눈을 뜬 건 말이다.
그런 레이시아의 표정을 보고 나니 디아나는 어떨지, 앨리스는 또 어떨지 무지하게 궁금해졌으니까.
그렇기에 오늘 어떻게든 둘다 확인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역시 타이밍인데..
일단 둘다 동시에 보는 건 절대로 무리였다.
그렇기에 시간을 잘 배분할 필요가 있었다.
애매하게 겹쳐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기는 커녕 서로를 향해 도끼눈을 뜬 모습만 보게 될테니까.
그렇게 둘에게 어떤 식으로 선물을 전달할까 고민하고 있으니..
주인공 놈은 어떻게 하려나-
하는 의문이 문득 머릿속을 채웠다.
역시 놈의 선택은 카트린느려나?
딱 보니까 그쪽 코인을 풀매수 때린 것 같던데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녀도 방문을 해줘야할 것 같았다.
주인공 놈이 다른 데 눈돌리지 않고 쭉쭉 성장할 수 있는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게 주인공을 보좌하는 조연된 도리 아니겠는가?
그렇게 디아나와 앨리스 옆에다가 카트린느의 이름까지 적어놓고 나니 괜히 클레어가 마음에 걸렸다.
원래라면 주인공의 스승으로서 그 위엄을 떨쳤을텐데 내가 주인공 놈을 대신해 그 자리를 꿰차버리는 바람에 뭔가가 많이 꼬여버린 여자.
그런 여자를 그냥 모르는 척 하자니 그게 또 살짝 찝찝해서..
'아, 몰라.'
그냥 다 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밤에 좌판 하나를 싹 털어온 탓에 남는 게 꽃 장신구니까.
물론, 그러려면 참 많이 바쁘겠지만 오늘 하루만 고생하면 되는 거니 못할 것도 없지 뭐.
'그럼 우선은..'
주인공 놈의 타겟일 확률이 높은 카트린느부터 방문해보실까.
역시 이런 건 선점효과가 중요한 법이니 말이다.
주인공 놈이 꽃 장신구를 건네주고 난 뒤에 건네준들?
흐릿한 인상을 남기는 게 고작일 터.
그래서였다.
곧바로 방을 박차고 나갔던 건.
아, 그러면서 겸사겸사 옆방도 확인해보니 주인공 놈은 아직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더라.
덕분에 날 막을 수 있는 건 기숙사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감 뿐이었다.
"어딜 가는 건가요? 이안 학생?"
"아, 아침 산책이나 좀 다녀오려고요."
그 마저도 오늘 구보가 없어서 산책으로 대신한다고 하니 바로 통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기숙사를 빠져나와서 곧장 카트린느의 오두막이 있는 숲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두근두근 성 니나브 데이라고 해도 아직은 이른 시간대라 그런 걸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오두막 앞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설마..'
실험한답시고 안 잔 건 아니겠지?
왠지 그랬을 것만 같아서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자그마한 창문을 통해 새어나와 아직은 어두운 숲 속을 밝혀주고 있는 불빛을 따라서 닫혀있는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 앞에 도착해 조심스레 그것을 두들기니..
"네에에에~ 누구신가요오오."
맥아리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앳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 순간 확신했다.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아예 안 잔거라는 걸.
'으이구 진짜..'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면서 카트린느의 물음에 답을 하니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어, 음, 그래 들어와."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해서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병든 닭마냥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는 카트린느가 앉은 자리에서 팔만 살짝 들어올린 채 날 반겨주었다.
"어쩐 일이야? 이 밤 중에.."
밤이라니..
설마 실험에 몰두한 나머지 진작에 날이 밝았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이고야..'
덕분에 살짝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그도 그럴 것이 이쯤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날이 밝는 지도 모르고 실험에만 매달린 사람이 밥이라고 제때 챙겨 먹겠는가?
안 봐도 뻔했다.
분명 귀찮다고 걸렀겠지.
혹은 때웠더라도 대충 보존식같은 걸 주워먹었던가.
그러니 안색이 저 모양 저 꼴 아니겠는가.
'이거 딱 보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눈치인데..
'괜히 왔나?'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 챙겨주기로 했다.
실수로인한 사고였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레이시아가 날 조금 더 의식하게 된 데에 그녀의 공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은혜를 갚는 셈 치지 뭐.
저렇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게 마음에 좀 걸리기도 하고.
"밤이라뇨? 해 뜬지가 언젠데요."
해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는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니 카트린느가 어색하게 웃었다.
누가봐도 무안한 걸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한 웃음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길래 곧바로 따라붙었다.
그리고는..
"누나 밤 샜죠?"
그리 물으니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던 카트린느가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어..니?"
어면 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어..니는 대체 뭐란 말인가.
계속 시선을 피하길래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으니 카트린느가 앙증맞고 통통한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우연찮게 잡을 수 있었고, 그걸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밤동안 알아낸 게 학문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 열심히 떠들어대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니, 뭘 알아야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주든 그래 너 고생했다라고 고개를 끄덕여주든 하지 아는 게 요만큼도 없는데 어쩌겠는가?
깔끔하게 무시하는 수밖에.
"그래서 밤 샜어요. 안 샜어요."
"새기는 했는데.."
"밥은요."
"어.. 먹.. 먹었.. 먹었을걸?"
대답을 하기 전에 두 번이나 망설인데다가 그렇게 내놓은 대답마저 의문형인걸 보면 굳이 재차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니까 저녁도 안 먹고 여태까지 이러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으, 으음.."
"자꾸 시선 피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눈을 못 맞추더라.
그래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니 카트린느의 어깨가 그에 맞춰 슬며시 흔들렸다.
"그 실험인지 뭔지는요. 끝났어요?"
"어.. 이, 일단은?"
"잘 됐네요."
말끝을 흐렸던 걸 보면 아직 남은 게 있는 듯 했지만, 싸그리 무시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밥먹고 자러가면 되겠다. 그죠?"
동의하냐는 뜻으로 시선을 맞추며 물으니 카트린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가봐도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얘는 은근 응석부리는 거에 약하단 말이지..'
내게는 먹히지 않았다.
나는 카트린느의 약점이라고 할만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누나가 걱정돼서 그래요.."
그래서 곧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카트린느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리며 자그마한 입술 사이에서 '으윽..'하고 곤란해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알겠어.."
카트린느한테서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데에는 말이다.
"알겠으면 일단 몸부터 씻으세요."
"어, 어..?"
"아니 그러면 그냥 주무시려고요?"
"아니, 그.."
카트린느는 여러모로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싸그리 무시하며 그대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무슨 말을 할지야 솔직히 뻔했으니까.
그렇게 꼬맹이 모드인 그녀를 반쯤 들어올리다시피 욕실 안에다가 집어넣은 뒤..
저번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곁눈질로 파악해둔 주방 쪽으로 향했다.
'이야..'
저번에 옷장 안을 확인했을 때부터 집안일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방은 또 차원이 달랐다.
게으른 사람이 혼자 살면 안 되는 이유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해야할까.
'내가 왜..'
덕분에 다시 한 번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하고 현자타임이 몰려왔지만 일단 팔부터 걷어붙였다.
저런 게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질 않았으니까.
어차피 저걸 어떻게 하지 않으면 쓸만한 그릇도 없을 것 같았고.
주인공이라는 놈들 뒤치닥거리를 하며 쌓인 스킬들을 십분 발휘해 후딱 해치워준 다음에 곧바로 주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밥을 아예 안 해먹고 사는 건 아닌가 보다.
조금 딱딱하게 굳었긴 해도 어제 만든 걸로 추정되는 빵도 있었고, 계란도 있었으며 치즈하고 소세지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뭐..'
한 끼 정도는 뚝딱이지 뭐.
화덕에 불 피우는 게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계란도 풀고 빵도 굽고, 소세지도 굽고 하다보니 순식간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소세지를 곁들인 프렌치 치즈 토스트 한 상이 뚝딱 완성되었다.
여기에 우유까지 있었다면 그야말로 게임 끝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없더라.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한채 그것만 들고 주방을 빠져나가니..
"어, 네가 한 거야?"
고새 샤워를 끝낸 것인지 카트린느가 날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제가 있다면..
'오우야..'
대체 언제 중화제를 복용한 것인지 그녀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데다가 몸에 걸친 게 팬티 한 장 뿐이라는 것 정도?
덕분에 그녀가 살짝이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푸릉푸릉 떨릴 것 같은 탄력적인 가슴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눈을 어지럽혔다.
샤워할 때 찬물로 샤워를 하는 타입인 걸까.
연분홍빛 유두가 가슴 끝에 매달린채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게 또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흠칫흠칫 떨려대는데..
내 가슴도 같이 떨렸다.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그 광경에 잠시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하는 거에요. 옷이나 입어요."
그리고는 본심하고 정반대인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그랬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또 가관이었다.
"왜에~? 새삼 부끄러워?"
놀릴 건수라도 잡은 사람마냥 히죽히죽대는데..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얘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고서 저러는 걸까.
"옛날에는 맨날 누나아~ 누나아~ 하면서 같이 목욕하자고 졸라댔으면서."
맨날 같이 목욕이라고?
'이안 이 새끼 이거..'
이 좋은 걸 어렸을 때부터 지 혼자서 독점했단 말이야?
물론, 입밖으로 튀어나간 소리는 그것하고는 또 달랐다.
"됐으니까. 얼른 옷이나 입으시라고요."
"응, 알겠엉."
덕분에 어찌어찌 옷을 입히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기껏 골라입은 옷이 몸에 쫙 달라붙는 셔츠라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아까 인사를 나눴던 게 셔츠 위로 툭 튀어나와 다시 한 번 내 눈을 어지럽혔다.
'시발 이러다가..'
내 다리 사이도 튀어나오겠는데..
아마 본인은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하는 행동이겠지만 당하는 입장이다보니 말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카트린느는 좋다고 내가 차려준 아침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 먹으니 차려준 입장에서 좀 뿌듯하긴 했다.
그래서 입을 열심히 오물대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같이 먹겠답시고 어디선가 가져온 정체불명의 음료를 꿀꺽꿀꺽 들이킨 카트린느가 '푸하-!'하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래서 진짜 왜 온 거야?"
다시 한 번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어왔다.
그래서 역으로 물어봤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냐고.
아니나 다를까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어.. 그, 글쎄.."
딱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누가봐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
그 상태로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
이래도 모르겠냐는 뜻으로 기숙사에서 챙겨온 꽃을 엮어 만든 팔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랬더니..
"어어..?"
그런 소리와 함께..
'..어?'
카트린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