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83)화 (83/366)



〈 8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사는 곳은 거진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이다.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같은 이벤트성 기념일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며칠 전부터 가게마다 사탕이나 빼빼로, 초콜릿같은 것들이  깔리는 것처럼 유사 화이트데이를 앞둔 이곳의 장사꾼들도 벌써부터 좌판세팅을 끝내놓고 한창 매상을 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각양각색의 꽃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길을 따라 늘어선 좌판마다 쭉 깔려있는데 덕분에 어딜가든 꽃냄새가 물씬 풍겨와서 꼭 꽃밭으로 나들이를  것만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리고 원래 축제 당일만큼이나 기대되고 설레는 게 축제 전야인 법.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엄청 많네요."


저번에 그녀하고 놀러나왔을 때하고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거리에 사람이 득실거렸다.


그것도 하나같이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로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인파에 치이기  좋은 상황.


그래서였다.

"잠시.."

그 핑계를 대며 살짝 옆에서 걷고 있던 레이시아의 손을 잡고 내쪽으로 끌어당겼던  말이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을 꼬옥하고 움켜쥐며 내쪽으로 쭉 끌어당기니 얼떨결에 내쪽으로 끌려와 내 품안에 포옥하고 안기게 된 레이시아가 내게 몸을 기댄 채로 몸을 움찔거렸다.

"뒤에 조심하십쇼."


딱 그 타이밍에 맞춰서 양손에 짐을 한 가득 짊어진 여자가 아슬아슬하게 레이시아의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짐이 레이시아의 몸을 뒤에서부터 툭하고 떠밀었다.

덕분에 나와 한층 더 바짝 몸을 밀착하게된 레이시아가 '읏..'하고 나지막한 신음성을 내뱉으며 내 옷깃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미, 미안하다.."

그 상태로 슬그머니 고개만 들어올리면서 그리 말하는데..

레이시아의 머리카락이 워낙 부드러워서 그랬던 걸까.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 부분이 스르륵 뒤로 넘어가며 그 아래 숨겨져있던 그녀의 얼굴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축제 전야가 선물해주는 설렘에 취한 것일까.


도홧빛으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그녀의 얼굴 옆으로 백금발의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진 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나는 뒤로 스르륵 넘어가던 그녀의 후드를 붙잡아 그대로 다시 씌워주었다.

"큰일날  했네요."

"고, 고맙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선을 내리깔듯 레이시아가 살짝 들어올리고 있던 고개를 푹 숙였다.


 상태로 애꿏은 로브자락만 꼬옥하고 움켜쥐는 게 살짝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방금  접촉 때문에 심장이 제멋대로 콩닥콩닥대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 그녀의 기색을 모르는  해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척을 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조금 더 붙여서 움직여야할  같습니다. 기념일 전 날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엄청 많네요."

"그, 그래."


슬며시 로브의 소매 부분을 그녀를 향해 내미니 잠시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시아가 이내 그걸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일단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네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 뭔가를 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였다.


그래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광장 쪽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까 우리가 있었던 곳이 핫플레이스라도 됐던 모양.

그렇게 사람이 비교적 적은 곳으로 빠져나오니 그제서야 좀 정신을 차린 것일까.

큼큼하고 헛기침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시아한테 빌려주었던 소매자락 쪽에서 느껴지던 잡아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기념일 전날이다보니 다들 들뜬 모양이군. 늦은 시간임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확실히 거진 다 데이트 나온 커플들이긴 하네요."

무안함을 쫓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설마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레이시아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니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또 무슨 상상을 한 것일까.

덕분에 살짝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언니랑 오빠도 데이트 나온 거에요?"

꾹꾹하고 로브를 잡아당기는 손길과 함께 귓속으로 파고들어온 앳된 목소리였다.


그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내려보니 살짝 허름해보이는 옷을 걸치고 있는 소녀가 우리 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가 걸치고 있는 옷과 뭔가 간절해보이는 소녀의 표정을 본 순간 눈치챘다.


소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둘에게 접근했는지를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용해줘야겠지.


"음, 글쎄?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데?"

그래서였다.


즉시 쪼그려앉아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던 건 말이다.

"으음.."

이제 한 열 살정도 되어보이는데 열 살짜리한테는  질문이 어려웠던 걸까.

아무래도 그랬나 보다.

그래서 조금 더 쉬운 버전으로 바꿔주었다.

"우리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이번에는 비교적 쉬웠나 보다.

나와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레이시아 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소녀가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언니한테 선물할 걸 찾고 계시면은.."


역시나 소녀가 우릴 찾아온 목적은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래? 그럼  번 보여줄래?"

덕분에 그런 소녀의 제안에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미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몇 번의 실패를 겪었던 걸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내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표정이 어찌나 밝은 지 주변에 깔려있는 꽃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따라오세요!"

그렇게 어딘가를 향해 호다닥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그제서야 레이시아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소녀를 상대로 커플처럼 행동했던 게 당혹스러웠던 것일까.


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대는 그녀를 상대로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내키지 않더라도 조금만 어울려달라고.

그런 내 말에 움찔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를 데리고 소녀가 달려간 방향으로 향하니 나름대로 멋들여지게 꾸민 다른 좌판들에 비해 허름하게 느껴지는 것 하나가 우릴 반겨주었다.

소녀는 그 앞에  있었다.

제 언니와 남동생으로 보이는 이를 앞에 둔채로 말이다.


"앗, 오셨다!"

드디어 손님을 확보했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서 먼저 달려나갔다가 우리가 바로 따라오지를 않으니 초조했던 걸까.

연신 뒤쪽을 힐끔대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소녀가 나와 레이시아의 앞까지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내 로브자락을 잡아끄는데..


"세, 셀리!"


그 모습을 확인한 소녀, 셀리의 언니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뭘 걱정하고 있는 지가 눈에 빤히 보여서 괜찮다는 뜻으로 손까지 휘휘 저어봤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하긴..'


척봐도 수상해보이는 모습이긴 하지.


둘다 뭔가를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로브를  눌러쓰고 있는 상태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셀리라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좌판 앞에 서니 과연 왜 파리만 날리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저희 언니가 직접 만든 거에요!"

"그래?"

확실히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솜씨기는 했다.


재료가 별로라서 문제지.

들꽃같은  꺾어서 만든 걸까.

주변 좌판에 깔려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장미를 연상시키는 크고 화려한 꽃들을 재료로 하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느낌이라면 여기 깔려있는 건 상대적으로 볼품없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지만..

'괜찮은데?'

나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 좌판 위에 깔려있는 것들은 내 입장에서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것들 뿐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이쪽은 풋풋한 느낌이 물씬 드는  마음에 들었다.


"흠, 이건 얼마인가요?"

해서 슬금슬금 내 눈치만 보고 있던 셀리의 언니를 상대로 좌판에 깔려있던 꽃 팔찌 하나를 들어보이며 가격을 물었다.

"어, 그, 그건.."


가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훠어어어얼씬 쌌다.


이렇게 팔아서 과연 인건비나 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팔찌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싼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였다.


"음.. 여기 있는 거  합치면 총 얼마인가요?"

잠깐 고민하다가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던 건.

쭉 파리만 날리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들고 나온 걸  번에 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던 걸까.


'하나 사주려나..'하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연신 내 눈치를 살피던 언니 쪽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와 레이시아를 이곳까지 이끈 셀리의 반응도 비슷했다.


띠용하고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올라 있는 느낌?

나름 귀여운 모습이라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미소가 맺히는 게 느껴졌다.

"아, 혹시 한 사람한테 한 개씩만 판다던지 뭐 그런.."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런  절대 아니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은 언니 쪽이 내 뒤에 서 있던 레이시아 쪽을 힐끔거렸다.


부럽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내가 여기서 구매한 걸 전부 레이시아한테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게 착각해준다면야 나야 땡큐지 뭐.

"그럼, 계산해주시겠습니까?"


마침 이쪽은 아직 얼굴 한 번도  본 이안의 형이라는 양반이 슬슬 떨어지지 않았냐면서 편지로 용돈을 리필해준 덕분에 주머니가 빵빵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풍족해진 상황.

덕분에 거리낌없이 값을 치룰 수 있었다.

하나같이 쬐끔쬐끔한 것들이라서 다 합쳐도 얼마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아놓고 보니 양이 상당하더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셀리의 언니가 감사하다면서 바구니를 덤으로 넘겨줘서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졸지에 꽃을 든 남자가 될 뻔한 상황.

 안에서 느껴지는 나름대로 묵직한 무게감에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바로 옆에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할 것도 없이 레이시아의 것이었다.


충동구매를 한  책망이라도 하는 것일까.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제법 따끔해서 멋쩍게 웃으면서 미리 생각해둔 변명을 입밖으로 꺼내들었다.


"어째 남일같지가 않아서요. 아까 보니까 남동생도 같이 데리고 나왔던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황급히 변명을 하는 척 횡설수설 말을 이으니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아가 쿡하고 작게 웃었다.


"딱히 뭐라  적은 없다만."


"으음.."


"그나저나  많은  대체 어쩔 생각이지?"

"음, 확실히 좀.. 많긴 하네요."


"좀 많은 수준이 아니다만.."


그러면서 은근 내 얼굴하고 바구니 안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는 장신구들을 힐끔거리는  꼭 하나 받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차마 그걸 입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건 아마도..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디아나가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거참 귀엽기는..'

계속 그렇게 힐끔댈거면 차라리  시원하게 하나 달라고 하던가 간식 달라고 어필하는 강아지도 아니고 저게 뭐란 말인가?

귀엽기 그지없는 레이시아의 행동에 속으로 피식피식 웃고 있자니 오래 걸어다녀서 슬슬 다리가 땡기기라도 하는 걸까 레이시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씩 다리를 주춤거리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였다.

"..슬슬 다리도 아픈데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그녀를 상대로 그런 제안을 했던 건 말이다.


그런  제안에 아주 잠깐 멈칫했던 것도 잠시, 레이시아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주변을 살피니 비어있는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와서 그녀를 곧장 그쪽으로 이끌었다.

역시 말은 안했지만 다리가 좀 아팠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그마한 주먹으로 허벅지를 콩콩 두들기는 레이시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잠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꽃 장신구를 파는 좌판 사이에 섞여있던 음료수 좌판으로 다가가 그녀와 내 몫의 음료수를 구매해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밤인데도 덥네요."


"화, 확실히 그렇긴 하군."


내가 건네는 음료수를 보니 저번에 내가 건네준 차를 마시고 난동(?)을 부렸던 게 떠오르기라도 했던 걸까.


머뭇머뭇 거리면서 내가 내미는 것을 건네받는 레이시아의 손끝이 살짝이지만 가늘게 떨렸다.


그렇게 레이시아와 나란히 앉아서 좌판에서 사온 음료수를 들이켰다.


"다 손잡고 다니네요. 덥지도 않나.."

"그, 그러게 말이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있자니 그들에게서 풍겨나오는 풋풋하고 달큰한 분위기가 우리에게까지 전염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이시아가 괜스레 침을 꼴깍 삼키면서 눈앞의 풍경으로부터 눈을 돌렸던 건.


"그나저나 어쩌다보니까 제 독단대로 덜컥 결정해버렸네요."

"뭐.. 그런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디아나  아이라면 화려한 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걸 더 좋아할테니까."

"그렇습니까?"

"다만 양이 문제인데.."

대체 이 많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설마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아니겠지? 그건 그 소녀의 노고를 무시하는 행위다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로브 아래로 날 지그시 노려보는데..

"확실히 그건 그렇죠."


덕분에 다시 한 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렇지만 순순히 넘겨주면 재미가 없겠지.


"으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래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러다가..


"아!"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것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선배한테 줄 것만 따로 빼놓은 다음에 남은 건 동기들한테 하나씩 나눠줄까요?"

물론, 그것도 레이시아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가 보여준 반응을 보면 확실했다.

그런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로브 아래로 얼핏 보이던 고운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으니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만."

"그렇습니까?"

"음, 그걸 받고 오해하는 이도 분명 나올테니 말이다."


"으음.."

그에 다시 한 번 고민에 잠긴 척을 하고 있자니..

"나눠줄 거라면 차라리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지인들 위주가 좋겠지. 그러면 괜한 오해를 살 가능성도 줄어들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얼른 하나 내놓지 않으련?


레이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흠.. 그래야 겠네요. 그럼."


물론, 이번에도 모르는 척을 했다.

그리고는 디아나에게 넘겨줄  따로 빼놓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구니 안에 든 것을 집어들어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이 못내 원망스럽기라도 했던 걸까.

옆에 앉아있던 레이시아의 몸에서 토라진 듯한 기색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느낄  있었다.

'거참..'


고작  정도로 삐지기나 하고 말이지.

왠지 뒤집어 쓰고 있는 후드를 걷어보면 저번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을 것만 같은 레이시아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회장님, 회장님."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이쪽을 봐달라는 뜻으로.


그에 레이시아가 다시금 내쪽을 돌아본 순간.

"이 둘 중에 뭐가 더 괜찮은가요?"


바구니를 뒤져 따로 빼놓은 것  개를 그녀를 향해 들이밀었다.

자긴 섭섭해 죽겠는데 자꾸만 디아나만 생각하고 있으니 순간적으로 그게 확 끓어올랐던 걸까.

"..둘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래요? 그럼.."


그녀의 손을 잡고 미리 골라두었던 것 중에 하나를 그녀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희고 고운 손목을 새하얀 들꽃을 얼기설기 묶어서 만든 팔찌가 꼬옥하고 감싸안았다.


말 그대로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눈만 동그랗게 뜬채 굳어있던 레이시아의 몸이 움찔하고 떨린 순간.


댕- 댕- 댕-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노리고 있었다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미리 생각해둔 멘트를 꺼내들기에는 말이다.

"회장님은 워낙 매력적인 분이시니까 그동안 여기저기서 많이 받으셨겠지만.."


그녀를 향해 눈꼬리를 살짝 접어주면서..

"올해는 제가 처음인 것 같네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내 모습이 날 바라보는 레이시아의 머릿속에 박혀들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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