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가 이런저런 세계를 경험하면서 알게된 건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다.
분명 완전 다른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달까.
그건 남녀의 정조관이 뒤바뀌어버린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런 것까지 똑같은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파견근무 기간이 끝나고 생도들이 다시 학원으로 복귀하면서 고요했던 학원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소란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들뜬 것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해야할까.
처음 그 분위기를 감지했을 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월말 평가가 치뤄질 예정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잦아들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지더라.
그래서 알아봤다.
다들 왜 이렇게 들뜬 건지.
그랬더니..
"..뭐?"
"응, 곧 있으면 성 니나브 기념일이잖아. 몰랐어?"
그렇단다.
아니, 그래서 그게 대체 뭔데.
앞에 성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붙은 걸 보면 종교 관련 축제려나?
그런 것치고는 들뜸의 정도가 너무 과한데..
같이 필기 수업을 듣는 여생도의 말에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것처럼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빠르게 머릿속을 뒤졌다.
그러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한 정체불명의 기념일이 뭐하는 날인지를.
그러니까 성 니나브 기념일은 말하자면..
이 세계버전 화이트데이같은 거였다.
남자가 여성에게 호감을 표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하고는 다르게 이쪽은 꽃으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한다는 정도의 차이랄까.
'아.'
어쩐지..
덕분에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근래 들어서 앨리스하고 디아나가 묘하게 내 눈치를 봤던 이유를.
난 또 서로를 견제한답시고 그런 줄 알았는데 설마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꽃으로 만든 장신구란 말인가?
그 부분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놈은 그런 쪽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모양.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그런 날이 하필이면 월말평가 바로 다음 날이라니.
학원의 분위기가 이렇게 헬륨가스 잔뜩 때려박은 풍선마냥 둥실둥실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남자한테 먼저 고백을 받는다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이벤트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월말평가 따위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그나저나 하필이면 월말평가 다음 날이라니.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이번에도 지명권을 써서 레이시아와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만큼 더더욱.
그러니 어쩌겠는가?
마땅히 이용해줄 수밖에.
참으로 다행히도 이번에도 지명권을 따내는 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파견근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뿐더러 실기 1등이야 따놓은 당상이니까.
변수?
그딴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주인공 놈은 파견근무 중에 입은 부상으로 나가리가 된 상태니까.
게다가 필기도 나름대로 꼼꼼하게 대비해놓았고 말이다.
그런 내 자신감은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기사부 전체를 통틀어 압도적인 1등.
그리고 이번에는 무려 전체에서도 1등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했던만큼 레이시아와 박빙의 승부를 펼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점수 차이가 많이 났다.
아니 단순히 점수 차만 나는 게 아니었다.
등수 차이도 꽤 났으니까.
'뭐지..?'
설렁설렁 좀 해도 된다고 충고했더니 그걸 십분 받아들여서 진짜 설렁설렁 하기라도 했던 걸까.
등수가 워낙 갑작스럽게 확 떨어져서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더라.
"본녀는 다른 곳에 파견을 나가 일손을 빌려줄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파견근무와 관련된 부분에서 0점이 나와버렸고, 그 탓에 등수가 확 떨어졌던 것.
"그랬군요. 어쩐지.."
"그래서, 오늘은 왜 찾아온 거지?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지금 1등 빈집털이한 거 자랑하려고 온 거냐.
꼭 그렇게 묻는 듯한 어조였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으음.."
그런 그녀의 질문에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레이시아가 이내 피식 웃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분명 저번처럼 본녀의 도움이 필요한 거겠지."
아니, 그건 맞긴 한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딱딱한 말투로 벽을 치는 걸까.
설마 저번에 여기서 있었던 일을 의식해서?
'하긴..'
의식이 될 수밖에 없겠지.
술하고 다른 뭔가에 취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무려 외간 남자의 물건을 손에 쥐고 흔들어대기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그녀의 발언에 그 말대로라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니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명권을 이용해 본녀의 시간을 빌리겠다?"
"..네, 뭐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 학원 측을 독촉해서 남들보다 한 발 먼저 받아낸 지명권을 꺼내 그녀의 앞에 내려놓으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시아가 이내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며 가슴을 쫙 폈다.
'오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러면서 내뱉은 말이 꼭 스스로한테 변명하는 것처럼 들렸던 건 과연 기분 탓이었을까.
왠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빤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레이시아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큼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다른 여자의 거처를 찾다니 디아나가 알면 분명 슬퍼할거다."
제가 느꼈던 무안함을 되갚아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곧장 반격을 시도해오는 게 아닌가?
그런 것치고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움찔하는 기색이 강했지만 말이다.
'흠..'
이거 아무래도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살짝이지만 날 의식하게 된 모양인데..
그래도 아직은 디아나 쪽이 더 신경쓰이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을 조금 더 의식하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경쟁대상이 다른 남자도 아니고 디아나라니 문득 실소가 나오려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급하거든요."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그녀의 발언에 답했다.
일부러 살짝 의미심장하게 말했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레이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그녀가 큼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으니까.
덕분에 굉장히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길래 저러는 걸까하고.
그걸 모르는 척 해주면서..
"아무래도 내일이 성 니나브 기념일이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그녀가 깜빡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언급해주었다.
"아, 그러고보니 그랬지."
역시나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매일매일 일에 치여살텐데 어디 뭐 국경일같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이벤트성 기념일을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제가 아직 선물 준비를 못 해서.."
그리 말하니 날아와 꽂힌 건 '뭐지 얘는?'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레이시아의 시선을 받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저희 고향에서는 그런 건 따로 안 챙겼거든요. 줄 사람도 없었고요. 그래서 뭘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서.."
아니, 변명하는 척을 했다.
그런 내 발언 어디가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걸까.
조심스레 말끝을 흐리고 있자니 레이시아의 입꼬리가 살짝이지만 위를 향해 상승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선물 준비하는 걸 도와달라?"
"..예, 그렇습니다."
"흐으음.."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꽂혔다.
"왜 그러시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다."
날 어떻게 보고 있길래 매번 나한테 그런 도움을 청하는 것이냐.
레이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물음이 내게로 날아와 푸욱하고 꽂혔다.
장난스러운 듯 하면서도 어딘가 내 속내를 떠보는 듯한 기색이 섞여있는 물음.
그녀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그런 질문을 던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전과는 다르게 살짝이지만 디아나를 견제하는 것 같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한 번 그 부분을 자극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선배에 대해 잘 아실테니까요."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레이시아가 슬며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뿐이었고..
"하긴, 그렇지."
후하고 작게 웃은 레이시아가 내게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본녀의 혜안을 빌려주도록 하마."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것 치고는 묘하게 기뻐보이십니다만.."
너무 놀려먹지 말라는 뉘앙스로 그런 그녀의 발언을 맞받아치니 레이시아의 얼굴 위에 떠올라있던 미소에 살짝이지만 금이 갔다.
"사실 제가 이렇게 꼬박꼬박 지명권을 써서 회장님을 지명하면 회장님한테도 좋은 일 아닙니까?"
"뭐, 뭣..?"
당황한 눈동자.
"지명권 핑계를 대고 합법적으로 휴식을 취하실 수 있을테니까요."
그것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면서 '어때 내 말 맞지?'라고 말하는 투로 그리 말하니 잠시 굳어있던 레이시아가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이런 들켜버렸군. 쭉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녀 딴에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기한 것 같았지만 내게는 그게 얼버무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들켰네?'라는 느낌으로 미소를 짓고 있던 레이시아가 이내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쪼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내 앞으로 들려온 그녀의 손에는 내 것과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로브 두 장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약같은 건 먹지 않는 걸까.
저번과는 다르게 밤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 부분이 영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챙겨온 게 로브라니.
심지어 디자인도 저번에 주웠던 거하고 똑같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심스레 로브를 뒤집어쓰는 레이시아의 모습 위로 그 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채 구관 복도를 거닐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보였던 것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육신을 손을 이용해 수줍게 숨기던 그녀의 모습이 방금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눈앞으로 펼쳐져서 제멋대로 물건이 움찔거렸지만..
진작에 뒤집어 쓴 로브 덕분에 어렵지 않게 숨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얘는 또 왜 옷하고 씨름을 하고 있는 걸까.
로브를 뒤집어 쓴채 열심히 허우적대는 꼴이 꼭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보쌈이라도 당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시녀들한테 시중을 받는 게 일상이다보니 혼자서 옷 입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로브를 뒤집어 쓸 때는 보통 밑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가볍기 그지없는 복장이었다보니 옷을 입은 채로 그걸 입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걸까.
내버려두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해가 뜰 때까지 쭉 저러고 있을 기세였다.
그래서..
"잠시만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물론, 그러지 않고도 도울 수 있긴 했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으니까.
뒤로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단 말이지.'
그녀를 돕은 척 뒤에서부터 팔을 뻗으니 로브 위로도 숨길 수 없는 압도적인 탱글함이 내 몸을 꾸욱하고 짓눌러왔다.
"자, 잠.."
뒤에서 느껴지는 내 기척에 당황한 걸까.
레이시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가 덩달아 흔들리며 내 하복부를 비롯해 여기저기를 꾹꾹 짓누르는 걸 느끼고 있자니..
로브 속에 갇혀있던 레이시아가 묘하게 얌전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로브 위로도 확 도드라질 정도로 몸을 움찔움찔대고 있었으니까.
엉덩이 쪽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촉 때문에 전에 바로 옆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그만 굳어버린 걸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뻗은 손을 움직여 로브 앞섬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밑으로 잡아당기자..
걸려있던 뭔가가 쑤욱하고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로브에 난 구멍으로 레이시아의 얼굴이 뿅하고 튀어나왔다.
문제는 우리 둘의 자세였다.
안 그래도 그녀를 돕는 척 몸을 바짝 밀착하고 있었는데 뒤에서부터 로브를 잡아당긴 반동으로 내가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렸으니까.
아직은 나보다는 디아나 쪽을 더 신경쓰는 그녀이니만큼 분명 날 떨쳐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말이다.
당황해서 사고가 마비되어버린 걸까.
로브 안에 갇혀있느라 숨이 막히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가슴이 위아래로 살짝씩 움직이며 기분 좋은 떨림을 내게 전해주었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은근히 내게 몸을 비비는 듯한 느낌마저도 들었으니까.
착각이겠지만.
"그.. 이만 놓아다오."
슬슬 정신을 차린 것일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레이시아가 내 팔을 툭툭 두들겼다.
"앗, 죄, 죄송합니다."
그에 나도 당황했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척 황급히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니 레이시아가 슬쩍 몸을 문쪽으로 돌리며 구겨진 로브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그러더니 뒤로 젖히고 있던 후드 부분을 머리 위로 푹 뒤집어썼다.
뭔가를 황급히 감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준비가 됐으면 출발하지. 아무래 기념일 전야라고는 하지만 더 늦으면 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가버릴테니까."
"아, 넵."
그렇게 내가 레이시아의 뒤를 따라나서면서...
나와 그녀의 두 번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