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 목소리가 대체 뭐라고.
그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대체 뭐라고 이토록 반갑게 느껴지는 걸까.
너무 반가워서 이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왈칵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동시에 가슴 속에서 고개를 치켜든 건 자그마한 원망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놀래켜주려고 숨어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거였다면 진작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 뭣하러 사람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뭐하는 거야."
이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입밖으로 튀어나갔던 건.
내뱉고 나서 속으로 아차했지만, 다행히 상대는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뭐야, 선배 혹시 삐지셨어요?"
여전히 장난기가 섞여있는 목소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모습이 안 보여서?"
그런 목소리로 정곡을 찔러오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그래서 대답대신 애꿏은 입술만 삐죽거리고 있으니..
손목을 움켜쥐는 손길과 함께 몸이 제멋대로 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이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둘러봤는데.. 좀 늦었나 보네요."
이안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늦게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다는 걸.
근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온 것일까.
마지막에 봤을 때하고는 다르게 기사용 정복을 차려입고 있는 이안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런 얼굴을 한채로 면몫없다는 듯 볼을 긁적이는 이안의 모습이, 땀으로 젖은 몸에서 짙게 풍겨져나오는 향기가, 살짝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쿵- 쿵- 쿵- 쿵-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분명 형편없는 표정일게 분명한데 뭣하러 그걸 보여준단 말인가?
멋있고 예쁜 모습만 보여줘도 부족할 판에 말이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것인데..
이안의 눈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삐져서 그러는 걸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에이, 삐졌네 삐졌어."
슬며시 달래주는 듯한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좋아서..
"..아니야."
괜히 투정을 부리게 되었다.
"아니면요? 왜 아까부터 얼굴 안 보여주시는 건데요?"
그건..
그 물음에는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얼굴이 빨개진 걸 들키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대체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랬는데..
"네? 선배? 얼굴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2주만이잖아요."
이안은 자신의 얼굴을 꼭 봐야겠나 보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졸라오는데..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렸으니까.
숨이 벅차오를 정도로.
동시에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얼굴만큼은 숨겨야겠다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얼굴이 이토록 뜨끈뜨끈한데 남이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이런 한심한 모습 절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누구는 선배 얼굴 보고 싶어서 근무 끝나자마자 옷도 못 갈아입고 그대로 뛰어왔는데.."
그러니까 제발 좀 조르지 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섭섭해하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어버리면 견디기 힘드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이안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엇!"
이번에는 또 뭘 발견한 것일까.
귓가로 울려퍼지는 반가움이 그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한 순간.
그의 손이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온 몸의 감각이 얼굴 옆쪽에 난 솜털에 모조리 집중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안의 커다란 손이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지는데..
그 근질근질한 감각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 놈의 얼굴은 대체 언제쯤 진정이 될 생각인 걸까.
열병에라도 걸린 것마냥 뺨이 뜨끈뜨끈했다.
그에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머리끈 하셨네요?"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느낌이 몸을 타고 쭉 내달렸다.
가슴 안쪽이 찌르르 울리며 꼬리뼈 부근이 근질근질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움츠렸다.
그러고 있자니..
"음, 역시 잘 어울리네요."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사이를 느릿하게 유영하던 손가락이 머리끈에 달린 장식을 톡톡 건드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까운 심정을 무릅쓰고 그가 선물해준 머리끈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쿵- 쿵- 쿵- 쿵-
여전히 심장은 크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가 펑하고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반사적으로 가슴께를 꾸욱하고 내리누르고 있던 순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는 게 느껴졌다.
'아..'
그에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샌드위치도 다 드신 것 같고.."
이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기쁨의 색이 너무나도 짙어서 아주 잠깐동안 숨이 막혔다.
"혼자서 드셨죠? 다른 선배들한테 안 나눠주고?"
"으, 응.."
어찌어찌 날아온 물음에 대답은 했지만 입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맥아리가 너무 없어서 마음같아서는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두들기고 싶었다.
'으, 응..'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했으니까.
물론,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잘 하셨어요."
정말 별거 아닌, 짧디 짧은 칭찬 한 마디가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니까.
그 짧은 한 마디가 대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는 걸까.
안 그래도 상대방과 눈을 맞추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자신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바닥하고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채 애꿏은 그것만 꼼지락대고 있자니..
"맛있었어요?"
평소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가 귓속으로 훅 파고들어왔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별거 아닌 그 한마디가 그토록 의미심장하게 들렸던 것은.
이제 막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얼굴로 열이 확 몰리면서 심장이 아까하고는 다르게 콩닥콩닥하고 방정맞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그 별거 아닌 질문에도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던 건.
"..혹시 별로였어요?"
"아, 아니다. 맛.. 맛있었다."
"에이, 그런 말 말구요. 이런 점이 좋았다라던지 다음에는 이건 좀 빼줬으면 좋겠다라던지 하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 글쎄.."
그런 게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다음에라니..
다음에도 만들어주겠다는 걸까.
과대해석하는 것일수도 있었지만 괜히 입꼬리가 근질근질거리며 기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꾸우욱-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 웃어버리면 진짜 우스운 얼굴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뭐 때문에 지금까지 얼굴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런 걸 보여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통제하고 있었는데..
"아~ 그나저나 얼굴은 대체 언제 보여주시려나~"
이안의 목소리 속으로 다시금 장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걸 알고서 저러는 거라는 걸.
남이 곤란해하는 걸 즐기다니..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니..
맞은 편에서 풍겨오던 향기가 훅하고 짓쳐들어왔다.
그와 함께 이번에는 꼭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바짝 들이밀어진 얼굴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만큼 당황스러웠으니까.
단번에 좁혀져버린 간격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도망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어.. 혹시 저.. 냄새나나요?"
그게 그에게는 또 그렇게 해석되었던 건지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아, 아니다. 그보다는.."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그만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할 뻔 했지만 어찌어찌 입밖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
그에 속으로 안도하고 있던 순간..
"그러면요?"
'걸렸다!'라고 외치는 듯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나, 나한테서 냄새가 날까봐.."
그에 황급히 변명을 내뱉어봤지만..
"안 나는데요?"
바로 후회했다.
설마 이렇게 바로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그것도 무려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이다.
"오히려.."
오히려?
"좋은 냄새만 나는데.."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혹시나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걸 막기 위해 출발하기 전에 몇 번이고 꼼꼼히 몸을 씻었으니까.
"그런데.. 화장하셨네요?"
"읏.. 이, 이건.."
"어쩐지 평소하고 냄새가 좀 다르다 했어요."
"자, 자꾸 맡지 마라."
자꾸만 냄새를 맡아대길래 당황한 나머지 바짝 들이밀어진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니..
"음, 선배 손 시원하다.."
오히려 손에 얼굴을 기대왔다.
열심히 뛰어왓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걸까.
손에 와닿은 그의 얼굴은 뜨끈뜨끈했다.
그 느낌이 부끄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을 놓이게 해서 몸에 깃들어있던 긴장이 탁하고 풀리는 걸 느끼고 있으니..
꼬르르르륵-
배 안에 있는 것이 눈치도 없이 아우성을 쳐댔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 이안과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일부러 식사를 걸렀다는 걸.
"어? 아직 저녁 안 드셨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걸 당사자 앞에서 곧이곧대로 밝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애매학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니..
"그럼 진작에 말을 하셨어야죠!"
커다란 손이 허벅지 옆에 애매하게 위치해있던 손을 확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마주잡은 손쪽에서 이안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그 기분좋은 박동을 느끼면서 속으로 소망했다.
부디 그게 이안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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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늦었는데 아직 식사 전이라니.
솔직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놀란 척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게 무슨 생각으로 끼니를 걸렀는지 알 것도 같았으니까.
보나마나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 나와 같이 먹을 생각이었겠지.
겸사겸사 그 핑계로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여태까지 굶었다는 사람을 마냥 굶길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물론, 이번에도 내 픽은 저번에 앨리스가 알려주었던 그 허름한 식당이었다.
딱히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마침 그곳이 가까웠으니까.
다만 시간이 좀 늦어서 어쩌면 진작에 영업이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아직 하더라.
'역시 앨슐랭 픽..'
속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디아나의 손을 잡고 그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어? 뭐야? 그때 그 청년 아니야? 또 왔.."
오늘은 저번에 앨리스와 방문했을 때 봤던 주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단골이 데려온 사람이라서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한 번밖에 못봐서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자연스레 아는 척을 해오던 그가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선 디아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앉을까요?"
그 분위기를 뚫고 디아나를 빈 자리로 인도했다.
그렇게 그녀와 마주앉으면서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다고.
이제 보나마나 누구하고 왔었냐고 물어볼텐데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
곧 날아들 질문을 대비해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네?"
"추천해주지 않겠나?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예상하고 있던 것하고는 다른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걸 안 물어본다고..?'
그렇다면 나야 땡큐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디아나의 요청에 응했다.
"음, 여기는.."
그런 내 추천을 디아나가 받아들임으로써 주문한 것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요것 봐라?'
덕분에 알 수 있었다.
파견을 나가있는 2주동안 디아나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물론, 내게 부정적인 변화같지는 않았다.
그건 2주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한 디아나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2주전의 그녀가 내가 훅하고 다가가면 '부끄러워!'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기 바빴다면 지금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건 같았지만 묘하게 적극적이었다.
"빵도 같이 드셔보세요."
"그, 그래.."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레이시아한테 그랬던 것처럼 스튜와 함께 나온 빵을 찢어줬더니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그걸 넙죽 받아먹더라.
전이었다면 분명 한참동안이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간신히 받아먹었을텐데 말이다.
그 미묘한 차이.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앞으로 재밌어질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