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길고 길었던 파견근무도 어느덧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기차가 수도에 도착하기만 하면 파견근무는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상황.
그 때문일까.
각자 좌석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이들의 얼굴은 저마다 각기 다른 감정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오래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재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누군가는 파견기간동안 거둔 성과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던 그 순간.
디아나의 얼굴은 그런 이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겠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눈에 익은 모양으로 변해갈수록 그녀는 기대감으로 심장의 고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초조함이 같이 찾아와서 입술이 자꾸만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진작에 비워진지 오래인 상자를 꼬옥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것뿐이었다.
머리 뒤로 뻗은 손가락에 딱딱하면서도 매끄러운 감촉이 걸렸다.
달그락-
그것들끼리 맞부딪히며 난 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초조해졌던 마음이 그나마 좀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꾸만 그걸 툭툭 건드리게 되었던 건.
'신기해..'
그걸 톡톡 건드려댈 때마다 폭풍치는 바다처럼 술렁거렸던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졌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정말 별거 아닌, 어딜 가더라도 좀만 뒤져보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하디 평범한 머리끈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그 이유는 아마도 선물해준 사람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일견 평범해보이는 이 머리끈 하나를 고르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만 같아서 기차의 움직임에 맞춰 살짝씩 흔들리는 이 머리끈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와있으려나?'
그렇게 수도가 차츰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이라는 놈이 자꾸만, 제멋대로 고개를 치켜드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긴장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저번처럼 이안이 역까지 나와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예쁜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무려 2주만에 만나는 것이니만큼 더더욱.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래서였다.
이미 괜찮을 거라는 대답을 몇 번이나 들었음에도 맞은 편에 앉아있는, 이번 파견으로 그나마 좀 친해지게된 후배한테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던 건.
계속해서 같은 질문에 답을 하려니 내심 질리기라도 했던 걸까.
팔짱을 낀채로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던 후배의 입술 사이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대체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은 덤이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고 있자니 민망함이 확 몰려와 얼굴이 뜨끈뜨근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던진 질문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남에게 잘보이기 위해 꾸며본 적이 몇 번 없는 만큼 혼자서는 안심이 되질 않았으니까.
남의 입을 통해 인정을 받아야만 그나마 좀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철회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무릅 쓰고 꿋꿋하게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오늘 정말 괜찮으시다니까요?"
"그, 그래..?"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대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 마저도 솔직히 좀 신기했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는 이 정도로 만족감을 선물해주지 않았으니까.
이왕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연 것 이 참에 다시는 똑같은 질문을 듣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겠다는 걸까.
"생각해보십쇼. 선배님. 집안도 좋아. 몸매도 탄탄해. 심지어 얼굴까지 예뻐. 아무리 성욕이 없는 고자새끼들이더라도 이건 끌리지 않는 게 이상하죠."
낯을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말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전이었다면?
저런 말을 들은 즉시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저렇게 얼굴을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아부성 멘트들은 성격상 딱 질색이었으니까.
헌데 오늘은 달랐다.
듣자마자 얼굴이 근질근질해지는 건 똑같았다. 똑같은데..
그것이상으로 만족스러움과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래서였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찬양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는 후배를 굳이 제지하지 않았던건.
그렇게 술렁거리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는 걸 느끼고 있던 찰나.
"그런데 참.. 생각하면 할수록 타이밍이 좀 얄궃긴 하네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발언이 후배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전개였다.
그에 그건 또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니..
"아, 아닙니다."
후배의 얼굴 위로 실수했다는 표정이 떠오르며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질 말던가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들어놓고 '그렇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하고 넘어갈만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후배의 얼굴 위에 떠올라있는 곤란해하는 표정을 싸그리 무시한 채 꼬치꼬치 캐물었다.
방그 그건 무슨 뜻이었냐고.
"아, 아니 정말 별 뜻 아닌데.."
"그럼 더더욱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안 그래?"
정말로 별거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로 미소를 돌려주니 끄응하고 침음성을 삼키는 소리가 후배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와 그대로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이대로면 이 건으로 도착할 때까지, 아니 어쩌면 도착하고 나서도 갈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본 것일까.
뭐라도 마려운 강아지마냥 연신 끄응하는 소리를 내던 후배가 슬그머니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저, 정말로 오해하지 말고 들으셔야 됩니다?"
횡설수설 밑밥을 깔아대기 시작했다.
이안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보통 그런 경우가 많으니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며 열심히 밑밥을 깔아대는 후배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밑밥까는 건 그만하면 됐으니까 이제 말이나 해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슬금슬금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후배가 더듬더듬 입을 연 건.
"그..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대체 뭘 말하는 걸까.
그녀로서는 도저히 짐작가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그 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어디선가 한번 들어본 것 같은 말이 후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지나가다 한 번 정도는 들어본 듯한 그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 속에서 뭔가가 쿵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두근두근-
후배가 열심히 늘어놓은 아부성 멘트 덕분에 그나마 좀 잦아들었던 가슴의 술렁거림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기분 나쁘게 술렁거리는 가슴.
그에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킨 순간, 그런 이쪽의 속도 모르고 후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게다가 그.. 아직은 사귀는 단계까진 아니고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그 말 뒤로 따라붙을 말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뻔했으니까.
"그런데 2주나 떨어지게 되었으니.."
슬슬 이쪽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금씩 작아지는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의 발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맘 같아서는 그만하라고 이안이 그럴 리 없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질 못했던 건..
"그리고 그.. 이안은 다른 남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보니까 아무래도 노리는 사람이.."
차마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으니까.
입학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알려진 수도 학원의 기사부에서 남자의 몸으로 당당하게 1위 자리를 쟁취하면서 스스로의 뛰어남을 증명한 남자.
그렇기에 모든 귀족가에서 오매불망 찾아헤매는 '좋은 씨'를 줄 수 있는 남자를 노리지 않는 여성은 드무리라.
그건 평민임에도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은 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출세지향적인 이들인만큼 더더욱 이안을 노릴 것이다.
마침 신분도 그들과 같은 평민이니 접근하는데 거리낄 것도 없을 것이고.
심지어 이안은 외모까지 뛰어났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노리는 이가 많을 수밖에 없을 터.
심지어는 왕실에서까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후배가 지적하고 있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이안에게 접근해서 홀라당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어찌할 것이냐.
그런 뉘앙스가 담긴 말을 들은 순간 바로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이안이 그럴 리 없다고.
그 말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질 못했던 건..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기 떄문이었다.
자신은 분명 이안을 좋아한다.
솔직히 파견을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짝 긴가민가했다.
좋아하기 보다는 아직 호감에 가깝다고 생각했었고.
그렇지만 이번 파견을 계기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아직은 호감 정도라 생각했던 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고, 자신은 어느새 이안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그 계기가 뭐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렸던 거니까.
그렇지만 이안은?
이안도 그럴까?
일단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간 이안이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이쪽에게 호감이 없다면 할 리 없는 행동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안이 자신을 상대로 품고 있는 감정이 자신이 이안을 상대로 품고 있는 것과 똑같냐고 묻는다면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그걸 한층 더 증폭시키는 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자기 혼자서만 쏙 수도로 빠져버린 앨리스였고.
자신이 2주동안이나 떨어져있는 사이에 그 년은 이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간지럽혀서 불안감이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 그렇지만 이안이 그럴 리 없죠. 보니까 은근 지고지순한 타입인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래서였다.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후배가 황급히 그런 말을 덧붙였음에도 전과는 다르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렇기에 머리를 하나로 모아서 묶어주고 있는 머리끈에 달린 토끼 모양의 장식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기차가 멈추고, 역에 내렸을 때 이안이 저번에 배웅해줄 때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가슴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이 불안감도 깔끔하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디 그럴 수 있길 바라면서 수도를 떠날 때 이안이 건네주었던 박스를 꼬옥하고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머리끈의 장식을 매만졌다.
그렇게라도 술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었으니까.
그래야 바라는대로 이안이 역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 때 지금 짓고 있는 것처럼 이상하고 애매한 표정 대신 환한 미소를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초조함에 젖어있는 사이에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아까보다 몇 배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풍경이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차창에 비치는 풍경을 통해 그걸 확인한 순간 억지로 그곳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내리기도 전에 미리 확인하고 미리 실망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억지로 눈을 돌리고 있는 사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열차가 마침내 역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이익-
바퀴와 선로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완전히 멈춰섰다.
"그, 선배.. 도착했는데.."
맞은 편에서 힐끔힐끔 이쪽의 눈치만 보던 후배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이제 내려야하는 상황.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안이 건네주었던, 이제는 텅 비어버린 박스를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짐을 모두 챙기고 열차에서 내린 순간.
기다리고 있던 건 2주동안 꿈에 그렸던 얼굴이 아닌 비정하기 그지없는 현실이었다.
그랬다.
역사 안에서 이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저번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서 가능성이 있는 곳을 모두 뒤져봤지만..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고 있는 사이에 동기나 후배, 선배들은 마중을 나온 이들과 해후를 나누고 있었다.
개중에는 연인을 마중나온 이도 가끔이지만 섞여있어서..
꾸욱-
가슴 안쪽이 꽈악하고 죄어들면서 기분이 더욱 비참해졌다.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그래서 토라져서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이고?
'어쩌면..'
2주동안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던 게 실수였던 걸지도..
그만큼 바빴지만, 지금은 왠지 그게 핑계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찾아온 건..
'그래.. 아직 근무 중일지도 모르잖아..?'
정신승리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자신들이야 수도에 복귀하는데 걸린 시간을 고려해서 일찌감치 근무에서 해방되었지만 수도에 파견된 쪽은 그런 게 없을테니까.
어쩌면 지금 한창 순찰을 돌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마중을 나오고 싶었음에도 마중을 나오지 못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참 비참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뭔지모를 감정을 어떻게할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집사가 마차를 보내겠다고 연통을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을.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안이 마중을 나올 거라고 확신했던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쓰려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움직여야만 했다.
남들은 다 역사를 떠나고 있는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게 더 비참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차라도 빌려탈 생각으로 억지로 걷고 있었는데..
"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눈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