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75)화 (75/366)



〈 7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물론, 클레어는 쉽게 굴복하려 들지 않았다.

하긴, 나름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테니까.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한순간에 확 뒤바뀐 걸 받아들이는  쉽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한들?


먼저 이니시가 걸린 시점에서 이건 애초에 그녀가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잃을 게 많은 쪽하고 잃을 게 별로 없는 쪽이 목숨을 걸고 치킨게임을 벌이면 결국 잃을  많은 사람이 먼저 운전대를 돌릴 수밖에 없으니까.


클레어가 내세운 알량한 자존심을 때려부수는 데에는 몸짓 한 번으로 충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을 하니까 바로 무릎을 꿇더라고.

그렇게 내가 요구한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씩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보기 좋네요.  어울려."

거기에 감상평까지 덧붙이니 이를 악물고 있던 클레어의 몸이 들썩거렸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향해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앉아."


물론,  한 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지만.


"흐으음.."

역시 전 군인이라고 해야할까.


무릎을 꿇고 앉은 클레어의 자세는 묘하게 절도가 있었다.


그래서 살짝 웃겼고.

손으로 턱을 괸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보기만해도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게 다 자길 농락하기 위함이라는 걸 클레어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꽉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뿌득하고 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게 끝이었지만.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섣부른 저항을 할 생각은 없다는 걸까.

클레어는 묵묵히 그런 자신의 처지를 감내하는  택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 고민을 많이 했단 말이죠."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클레어의 귀가 쫑긋하고 떨리며  말에 반응을 보였다.

 입에서 제 처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올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걸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살짝 밑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원래 자리로 되돌린 그녀와 눈을 맞추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그동안 그녀한테 당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를.

"계속 그 생각만 했거든요. 어떻게하면 복수할  있을까. 어떻게 복수하는 게 좋을까."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이었다.


언젠가는 그녀와의 관계를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뒤집어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복수같은  생각한 적 없으니까.

아니, 막말로 대체 무슨 복수를 한단 말인가?

그녀가 내게 했던 건 다른 남자들이 당했다면 기겁을 했을만한 일이긴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저 가만히 있는데 좀 놀게 생긴 예쁜 누나가 다가와서 대딸을 쳐준 것에 불과했다.

복수심같은 게 생길 여지조차 없었다는 소리다.

아, 대딸 쳐줄 거면 시원하게 싸게라도 해줄 것이지 지 혼자 가버리고 냅다 튀어버린 바람에 나 혼자서 뒤처리를 해야했던 것에 대한 복수는   있겠지.

그때는 진짜 좀 빡치긴 했으니까.

아무튼 나는 클레어에게 복수할 생각이라고는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얼굴이 근질근질대는 걸 무릅 써가면서 복수심에 젖어있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얘 때문이지 뭐.'

앨리스 때문이었다.

이래야 그녀가 납득을 할테니까.


앞으로 내가 자기한테  짓들도 말이다.

그걸 위해서였다.

"어떻게하면 당신한테 내가 느낀 수치심과 치욕스러움을 똑같이 느끼게 해줄  있을까."


얼굴이 근질근질거림에도 꾹 참고 연기를 이어나갔던 건.


"생각을 해봤어. 생각을 해봤는데.."

말끝을 흐리면서 클레어를 향해 히죽하고 웃어보였다.


그녀가  향해 그랬던 것처럼 송곳니까지 훤히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한껏 말아올리면서.


"꽤 재밌을 것 같은 계획이 하나 생각나더라고."

"..."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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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시점****

"자위해봐."

앞에 앉아있던 이안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 떴다.

그만큼 생각치도 못한 발언이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제대로 들어놓고서도 귀를 의심했던 것은.


그렇게 경악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소파 팔걸이 위에 올려져있던 이안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이 부릅 뜨여진 눈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순간 깨달았다.


이안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지금 이안은 억지로 의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농락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클레어에게 자신이 느꼈던 치욕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말겠다는 일념 하에서 말이다.


'확실히..'


비참한 모습이긴 했다.

남자를 앞에 두고 쾌감을 구걸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참하게 제 다리 사이를 손으로 비벼대는 꼴이라니.


하물며 그걸 다른 여자가, 한때 제자로 삼으려 했던 자신이 옆에서 지켜본다면?


은근히 자존심이 높은 저 년에게는 그것만큼 치욕스러운 꼴이  없겠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안의 말을 듣고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클레어년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발끈했던 것은.

 순간 이안의 손에 깃들어있던 떨림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아무래도 위협적인 클레어의 모습에 살짝 위축된 모양.


"이거저거 가릴 처지가 아닐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눌러 숨기면서 최대한 의연한 척하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이안을 대신해서 나서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안 돼.'


목까지 차오른 그 감정을 꾹 내리누르며 억지로 참았다.

이건 이안의, 이안을 위한 복수이며, 그래야만 했다.


헌데 여기서 자신이 나선다면?

자신의 분풀이밖에 되지 않을테니까.

이안이 지금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 지 알고 있는 입장이기에 더더욱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꾸만 솟아오르는 안쓰러움을 꾹꾹 내리누르고 있자니..


이안을 죽일 듯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클레어년이 결국 압박감을 배겨내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피했다.

둘의 기싸움에서 이안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크읏.."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이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걸 깨달은 걸까.

클레어년이 입술을 짓씹으며 분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해요? 얼른 안 하고?"


"..."

"아, 아니면 혹시 관객이 부족한가? 가족들이라도 불러드릴까요?"


마음에도 없는 저런 말을 입밖으로 내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뇌를 했을까.


자신으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수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나서봐야 이안의 각오를 무시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테니까.


대신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어서 그것만큼은 충실하게 했다.

그건 바로 클레어년한테 시선으로 압박감을 선사하는 것.

그러고 있자니 막다른 곳에 몰려서 안절부절 못 하던 년이 정말 이 미친 짓거리를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이냐고 시선을 던져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도 막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복수 때문이라고 해도 이안이 다른 여자의 알몸은 물론, 스스로 위로하면서 헐떡거리는 모습까지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본심은 그랬지만 그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다.

이미 그에게 약속했었으니까.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최대한 그의 뜻을 따라주겠다고.

그래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 속에 담긴 신호를 싸그리 무시하며 시선만으로 압박을 가했다.

결국 당장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던 클레어년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입고 있는 셔츠를 향해 뻗어져나가는 그 손을 보고 있자니 그 뒤에 이어질 장면이 꼴보기가 싫어져서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잠깐만요."


이안이 그런 클레어를 제지했다.

그에 안도감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던 그 순간.


"누가 가슴보여달래요? 시킨대로 자위나 하라고요."


이안에게서 흘러나온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한 마디가 그 정체불명의 감정을 발치까지 떨어뜨렸다.


네 알몸 따위 관심도 없고 보기도 싫으니까 시킨대로 적당히 벗어서 자위나 해라.

클레어년한테 조금 더 수치심을 심어주기 위함인지 일부러 고압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안의 행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떠는 클레어의 얼굴은 누가봐도 치욕에 젖은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그 상태로 한참동안이나 몸을 파르르 떨고 있던 그녀가 이내 천천히 입고 있는 수련복 바지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스윽-

천과 살결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드러난 풍경에는 마땅히 자리하고 있어야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똑같은 거뭇한 털로 덮여있는 뽀얀 색의 둔덕.


나이치고는 굉장히 깨끗한 모습이라서 왠지 모르게 배알이 뒤틀렸다.


"뭐야,  입고 있었네?"

"..."

"혹시 기대라도 하고 있었어요? 아니면 이렇게  줄 알았다던지."

그 새 자기가 연기하고 있는 역할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입매를 비뚜름하게 말아올린 채 상대방에게 치욕스러움을 심어주기 위한 언동을 일삼는 이안의 모습은 퍽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전히 팔걸이를 짚고 있는 손은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지만.


그걸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쭉 펴고 있던 손을 슬며시 말아쥔 이안이 클레어년을 비꼬기 시작했다.

"하긴.. 스승님은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환장한 씹 변태년이니까요."

"이, 이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느끼시는 건가요?"

경멸로 가득 찬 눈빛.


그것에 적중당한 클레어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수련복 바지 사이와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늘어져있던 투명한 실이 툭 끊어졌다.


"벌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상이 되는  아닐지 모르겠네요."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클레어년이   있는 건 치욕감에 몸을 파르르 떠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클레어년이 입술을  깨문 채 다리 사이를 향해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거뭇거뭇한 수풀 아래로 얼핏 보이던 선홍빛 색살에 손가락이 닿은 순간.


츠윽-


"읏..!"

습기어린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신음성이 방 안을 꿰뚫었다.

"흑, 흐읏.."

처음까지만해도 클레어의 손놀림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누가봐도 억지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고..


"읏.. 흣.."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손놀림은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굉장히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긴, 그렇겠지.

남들은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잘 살 나이에 줄곧 혼자였으니 맨날 혼자서 해결했을테니까.

다른 교수들처럼 여러 학생을 가르키는 것도 아니니 남는 시간에 연무장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뭘 했겠는가?

혼자서 끓어오르는 몸을 달래기 바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 능숙한 손놀림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치욕스러움을 느껴야할 상대가 어느새  행위에 푹 빠져버린 상황.

이안은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

어느새 눈까지 지그시 감은 채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클레어년을 바라보며 이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에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있던 클레어년의 얼굴이 굴욕감으로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순간.


"..선배."


그런 클레어년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던 이안이 대뜸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자신은 왜 부르는 걸까.


설마 이 타이밍에 불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내심 당황하고 있던 순간.

"저 년은 혼자 하라고 내버려두고 저희끼리 즐기죠."


의미를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즐기자니.

여자 입장에서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그 발언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수가 없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침묵하고 있던 순간.


이안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말고 저한테 맞춰주세요.'

이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이안이 당부하듯 전했던 한 마디였다.

그걸 떠올리고는 알겠다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훅-

'어..?'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기울어졌고..


츕-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살짝 거칠거칠한 뭔가가 입술을 꾸욱하고 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게 이안의 입술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펑하고 터지며 그 안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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