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74)화 (74/366)



〈 7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렇게 원래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원래 일상으로 복귀했다.


레이시아는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게 어떻겠냐고 걱정하는 척 은근히 제 아쉬운 마음을 내비춰왔지만..

"더 폐끼치긴 좀 그렇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나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오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데..

'크..'


솔직히 좀 오싹오싹했다.

아무튼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해서 열심히 뺑이를 치다보니 시간이 후딱 흘러갔고.. 마침내 그 날이 도래했다.

그러니까.. 에반젤린네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자 가만히 두면 언제까지고 폭주할 것만 같은 클레어를 길들이기 위한 날 말이다.


일부러 낮에 근무를 서는 날로 약속을 잡았기에 나는 근무가 끝나자마자 학원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앨리스와 함께 클레어를 통해 전달받은 주소로 향했다.


그렇게 쪽지에 적혀있는 주소에 도착하니?

'이야..'

디아나네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저택이 우릴 반겨주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이에게 초대를 받고 왔음을 밝히고 우리 둘의 신원까지 오픈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릴 이곳으로 초대한 세피아가 에반젤린과 손을 잡고 등장했다.


집사나 하다못해 그때 봤던 남편이라는 사람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무려 집주인이 직접 나올 줄이야.


날 클레어하고 엮어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만 같아서 솔직히 좀 황송할 정도였다.

"어서들오세요."


"언니! 오빠!"

에반젤린은 우리 둘의 방문을 상당히 반가워했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달려있지도 않은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듯한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 딸내미의 모습이  귀여워보였던 걸까.

에반젤린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세피아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나름 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에반젤? 인사부터 해야하지 않겠니?'

"앗..!"

깜빡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것도 잠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에반젤린이 이내 입고 있던 스커트의 양 끝자락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어서오세요.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함미다."

꽤나 그럴 듯한 모습으로 나와 앨리스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여보였다.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미리 연습이라도 한 걸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리액션을 해줘야겠지.


행동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생각하면 에반젤린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좋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클레어가 보면 더 좋았고.

그래야 그녀가 느낄 압박감이 한층 더 강력해질테니 말이다.

그래서 짝짝 박수를 쳐주니 에반젤린이 부끄럽다는 듯 통통한 뺨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헤헤하고 귀엽게 웃었다.

"그럼, 에반젤린?"

"네!"

"두 분께 저택을 안내해드리지 않으련?"


세피아의 말에 에반젤린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녀의 움직임에 맞춰 트윈테일로 묶어놓은 머리가 요리조리 흔들렸다.

"그럼, 저는 마저 준비해야할  있어서.."


그렇게 세피아가 퇴장하자마자 에반젤린이  가슴을 콩콩 두들기며 선언했다.

"따라오세요!"

에반젤린네 저택은 디아나네 저택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안내역이 귀여운 것도 한몫했지만.

"여기는 공부하는 곳이에요! 저는 여기 싫어요.."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방식대로 저택 곳곳을 안내해주는 소녀를 따라 움직이다보니 마침내 마주칠 수 있었다.

"아."


역시나 미리 와 있었던 걸까.


뒷뜰같은 곳에서 수련이라도 하다가 막 몸을 씻고 나온 것인지 클레어의 머리카락 끝은 살짝이지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목에도 살짝 젖은 수건이 걸쳐있었고.


에반젤린을 따라 움직이던 나와 앨리스를 발견하고는 방으로 들어서려다가 말고 그대로 멈춰선 클레어의 모습에 바로 옆에 서 있던 앨리스의 기세가 사나워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꽈악하고 움켜쥔 그녀의 주먹 쪽에 손을 가져다댔던 것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것일까.


앨리스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리더니 날카롭게 벼려지던 그녀의 기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그녀와 눈을 맞추며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직은 네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좀만 참으라고.


그게 분하기라도 했던 걸까.


앨리스가 꾸욱하고 입술을 깨무는 사이, 나는 클레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에반젤린."

"네?"

어린아이가 알아차리기에는 굉장히 오묘한 분위기 속에 퐁당 빠져서 고개만 연신 갸웃거리고 있던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언니한테 마저 안내좀 해줄래? 오빠는.."


여전히 내 쪽을 외면하고 있는 클레어의 옆 얼굴에 시선을 맞추며 슬며시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고모하고 할 이야기가 있거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클레어와 단둘이 되는 데에는.


"아, 넵!"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에반젤린이 앨리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앨리스는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나와 클레어를 단둘이 남겨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몇 번이고 내쪽을 돌아봤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에반젤린과 앨리스가 자리를 떠난 순간.


"잠깐 이야기 좀 하실까요?"


나는 클레어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어가려던 방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거절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몸짓이었고, 내가 그렇게 밀고나가니 클레어가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아예 생활하는 곳 같지는 않고, 가끔와서 머무는 곳일까.

방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촐했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서 나는 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소파로 가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는..

"앉으시죠."


클레어를 상대로 내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손님인 내가 마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클레어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그런 것 치고 그녀는 순순히 내가 권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보기나 하겠다는 걸까.


 말이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그녀가 날 바라보며 턱을 까딱였다.


아까 날 대하기 어려워하던 태도는 그새 집어치워버린 것일까.


그녀는 어느새 평소의 시니컬하고 무신경한 모습으로 회귀해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궁금하시죠? 제가 무슨 말을 할지."


보란듯이 싱긋 웃으며 그리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었지만.

"궁금하실 거에요. 이 놈이 대체 뭘 믿고 이러나 싶으시겠죠."

아직까지는 여유가 느껴지는 클레어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금씩 어조를 격양시켰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것들을 지금 이 순간 터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클레어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여태껏 묵묵히 감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내가 갑자기 폭발해버리니 당황스러웠던 걸까.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그 뿐이었다.


"더 이상은 못해먹겠어."


아직까지는 주도권이 제 손 안에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 말에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배째라는 반응이었다.

'안 참으면 네가 어쩔건데?'

 그리 묻는 듯한 비웃음에 가까운 시선이 가소로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과 함께 내쪽으로 날아와꽂혔다.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반응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파들파들 경련하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면서 보란듯이 웃어보였던 것은.

그런 내 반응이 의외였던 것일까.


클레어의 눈가가 꿈틀하고 경련한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해둔 말을 그녀를 향해서  던졌다.

입꼬리를 한껏 말아올린채로.


"내가 여기 왜 온 것 같아요?"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클레어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걸 눈에 담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생각없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밥이나 먹으러 온 것 같아요?"


"..."


"내가 왜? 뭐가 이쁘다고?"

네 가족인이상 그것들도 증오스럽게 느껴지긴 매한가지다.

그러한 뉘앙스로 말을 내뱉은 순간 흔들리던 클레어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바로잡혔다.

그러더니 오히려  압박하듯 예의 그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올리는 그녀였다.

"왜?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기라도 하시려고?"


"..그래."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든가."

그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어온 순간 나는 일부러 몸을 흠칫거렸다.


꼭 마치 예상했던 것하고는 다른 상대방의 태도에 크게 당황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다시 자신이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날 밀어붙이려는  클레어가 따박따박 말을 내뱉었다.


"해보고 싶으면 가서 한 번 해보라니까? 응? 왜? 못하겠어?  못해먹겠다면서?"

 말을 들으며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내 반응을 보고 한층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클레어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누구 말을 더 믿어줄까?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데다가 일개 생도에 불과한 너?"

"..."

"아니면 나?"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심지어 즙을 짜면서 호소하든 사람들은 내 말을 믿을 것이다.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리 말할 수 있는 자신감 뒤에는 본인의 입지가 크게 한몫했겠지.


지금이야 전선에서 물러나서 제자나 키우고 있지만 한때는 그래도 전쟁영웅이랍시고 꽤나 이름을 날리던 양반 아니던가?

분명 여기저기에 연줄이 많을 터.

그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내가 불리한 싸움이 맞았다.

이 놈의 세계는 은근히 남자를 우대해주는 듯 하면서도 깔아뭉개는 경향이 없잖아 있으니까.

원래 세계에서처럼 '피해자의 눈물이 그 증거입니다!'라는 전개는 안타깝게도 성립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클레어의 말마따나 내가 이 사실을 세피아한테 알린다면 어떻게 될까.

나름 공명정대해 보였던 그녀지만 그녀가 내 편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클레어의 편에 서서  압박하는데 힘을 실으려 하겠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가문의 명예는 또 별개니 말이다.


나와 클레어를 엮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때다하고 더욱 거세게 날 압박하지 않을까?


내가 클레어의 옆으로 기어들어가는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가문의 골칫거리였던 클레어의 혼처 문제도 해결될테니까.

그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일타쌍피, 일석이조, 일거양득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겠냐만은..


평소에 나름 공명정대한 모습을 보여주던 기득권이라는 놈들이 제 잇속이 걸린 문제와 직면했을 때 어느 정도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 그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던 나로서는 차마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묵하고 있자니 그런 내 태도를 '굴복'내지 '현실 파악'이라고 받아들인 것일까.

클레어가 숫제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날 위협해왔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그냥 쭉 닥치고 있어. 괜히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이야..

그 발언에는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전장에서 굴렀다고 했으니 도덕이나 뭐 그런 것따위는 거의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줄이야.


이렇게 나오면..

'나도 더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위대한 함무라비 법전에도 쓰여있지 않던가?

받은만큼 페이백주라고 말이다.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라면 협박에는 당연히 협박으로 응수해줘야겠지.


"고마워요."

"...?"


"마지막 말 덕분에 일말의 망설임마저도 사라져버렸거든요."


내 말에 클레어가 '하-!'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느새 그녀의 눈빛은 상황파악을 못하는 머저리를 바라보는 듯한 사람의 그것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을 확인했을 때  눈빛이 어떻게 바뀔지를.

"그래, 어디 한 번 세피아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쳐봐."


난 가만히 있을테니까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젖히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사람한테 간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랬다.

나는 클레어의 '가족'한테 말할 거라고 했지 세피아의 이름은 단  번도 언급한  없었다.

"꼭 동생만 가족인 건 아니잖아요?"


조카도, 여동생의 남편도 가족인 건 마찬가지다.


"궁금하긴 하네요."


"..."


"존경하는 고모가, 아내의 언니가 남자 약점이나 잡아서 시도때도 추행을 일삼는 파렴치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됐을 때 두 사람의 반응이 과연 어떠려나.."

"즈, 증거.."


"증거요? 당연히 없죠."


그런  말에 창백하게 질려있던 클레어의 얼굴 위로 살짝 화색이 감돈 순간.

"근데 증인은 있더라고요."

거기에 대고 쐐기를 박아넣었다.


본인도 짐작가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막 화색이 맴돌기 시작했던 클레어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면서..

"들어오세요. 선배."

방금 전부터 문밖에서 느껴지던 기척의 주인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달칵-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앨리스가, 경멸로 가득찬 눈빛으로 무장한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클레어가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던 당당함은 파도에게 덮쳐진 모래성마냥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그렇게 굳어버린 그녀를 바라보면서 보란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때요? 증인까지 있으니까 이제는 좀 믿어주지 않을까요?"

"..."

"아직 상황파악이  되신 모양인데.."

"..."


"언제까지 앉아있을 생각이지?"

뻔뻔하게 말이야-

기습적으로 반말을 입밖으로 내보낸 순간,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앨리스가 마침내 내 뒤에 섰다.

 든든하기 그지없는 기척을 만끽하면서 클레어를 향해 친히 주지시켜주었다.

"꿇어."


이제부터 네가 있어야할 곳은 나와 같은 소파 위가 아니라 저기 저 바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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