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71)화 (71/366)



〈 7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니, 시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여전히  놓아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보이는 레이시아의 품에 안겨서 경악하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못 들었다고 생각한 걸까.


새롭게 울려퍼진 그 소리는 전보다 조금  컸다.


박자도 조금 더 빨랐고.


이전의 것이 똑-똑-똑이었다면 이번 건 그야말로 똑똑똑-이랄까.

조금만 더 있으면 노크고 뭐고 문을 따고 들어올 기세라 다급하게 시선을 들어올려 레이시아를 바라보았다.

물론, 사태의 급박함을 전하고 그녀의  안에서 해방되기 위함이었다.

내 딴에는 그녀도 그 심각함을 알아줄거라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으응? 왜에?"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히죽히죽하고 웃는 꼴이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그러시겠지.

이래뵈도 왕녀아닌가?


여차하면 직위를 가지고 찍어누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원래의 그녀였다면 그런 생각따위는 하지 않았을테지만, 지금은 술에 취해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문제는..


'안 통할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지만.


아마 레이시아가 직위로 찍어누르려고 든다면?

앨리스는 이번에야말로 맛이 가서 칼뽑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아, 아니지.'

난줄 모를테니까 '그런갑다..'하려나?

솔직히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와중에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일단 레이시아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같다는 점이었다.


막말로  참지 못한 앨리스가 문을 따고 밀고 들어온 순간 약효가 다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시발 상상만해도 끔찍하네.'

그래서였다.

"그.. 손님 오셨는데요."


어디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헤실헤실 웃고 있는 레이시아와 눈을 맞추며 그 말을 꺼내들었던 건 말이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그래서어?"


그래서라니.

아니,  양반아 손님 왔다니까?


쇼타콘 왕녀라고 소문이라도 나고 싶은 걸까.


 혼자만 급박하고 나 혼자만 절박한 것 같아서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자니 레이시아가 내 이마에 대고 후우하고 바람을 불었다.

내 앞머리가 눈에 거슬리기라도 했던 걸까.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드는지 '응응.'하고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눈꼬리에 맺혀있던 웃음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살짝이지만 가학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로.


"누나가 놓아줬으면 좋겠니~?"


그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해서  말이 흘러나온 즉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하하하-"

레이시아가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내 머리를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아까부터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던 그녀의 체향이 콧속으로 후욱하고 파고들어왔다.


소프트 아이스크림같은 향기라고 해야할까.

콘프로스트 말아먹고 남은 우유에서 풍기는 냄새하고도 비슷했다.


우유에 설탕을 섞어놓은 듯한 그런 향기 말이다.

그 달달하기 그지없는 향기에 애꿏은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니..

"어쩌지~? 누나는 놓아주기 싫은데~"

놀리는 기가 다분하게 섞여있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다이렉트로 파고들어왔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ASMR계의 진정한 강자는 클레어가 아니라 레이시아였다는 걸.


평소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

그래서인지 몰라도 레이시아의 목소리는 달달함을 넘어 끈적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런 게 귀에 대고 속삭여지니 그야말로 귓속을 유린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목소리로 레이시아가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중하게 부탁한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지도~?"

그러니까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것처럼 그녀가  머리를 꽈악하고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덕분에 행복하면서도 숨막히는 압박감에서 해방된 나는 일단 숨부터 들이켰다.

어쩐지 아까부터 머리가 몽롱하더라니만.

그렇게 후하후하하고 숨을 들이키고 있는 사이에도 레이시아는 예의  히죽대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베어문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한 번 해보라고 재촉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술 깨고 나서 보자고..

'내가 즨짜 갚아주고 만다..'


그냥 부탁한다는 한 마디만 내뱉으면 되는 건데 막상 내뱉으려고 하니 이상하게 수치심이 장난 아니었다.


"부, 부탁드릴게요.."


그렇지만 했다.

일단 이 자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으니까.


앨리스가 언제 문을 따고 침입할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그랬더니..

"맨입으로?"

그렇게 말하더라.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것도 모자라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얘는 진짜로 술 멕이면 안 되겠다고.


아니면 내 모습이 이런 게 문제려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만취 왕녀님의 니즈를 만족시켜줄  있을까 하고.

"소, 소원 들어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리고 그게 내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물론,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데도 상당한 수치심을 무릅 써야 했지만.


소원권이라니.

부모님 생신선물드리는 애새끼도 아니고 말이다.


솔직히 내뱉고 나서 과연 이게 통하긴 할까 스스로도 의문이었는데..

"좋아. 합격."

놀랍게도 통했다.

기억해두겠다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은 레이시아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스르륵하고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허리쪽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사라진 순간 나는 그대로 레이시아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내 행동이 매정하게 느껴졌는지 레이시아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쯤 문밖에서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앨리스를 케어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그대로 문쪽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저.. 회장님?"

얘는   따라오는 걸까?


그것도 입가에 미소까지 매단 채로 말이다.


"으응? 왜애?"


왜기는 왜야.

이제 곧 손님이 들어올텐데 계속 이럴 생각인 걸까.


황당해하는 듯한 눈으로 그녈 바라보니 지지않고 그런  시선을 맞받아친 레이시아가 손가락  개를 펴보였다.

"소원권 하나 더 주면 도와주지~"

아, 풀어주는 거하고 협조하는  또 별개시다?


아주 그냥 이 참에 뽕을 뽑으려 드는 구만.

덕분에 다시  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얘는 대체 내일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지금까지 쌓은 업보만해도 어마어마한데 말이다.

여기서  업보를 쌓겠다고?


내일 아침 술에서 깨어났을때 치사량을 훌쩍 넘는 수치심에 빠져 허우적댈 미래의 레이시아를 향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히 시간을 지체한 상황인데 여기서  실랑이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하고 웃어보인 레이시아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그대로 업무용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들어오도록."

평소의 그녀, 그러니까 맨정신일  그녀와 한없이 가까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문에 대고 그리 내뱉었다.

그에 오래 참았다는 듯 닫혀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순간, 나는 황급히 접객용 소파 쪽으로 달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앨리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양아치 기질이 강한 앨리스라도 작게는 학생회장이자 크게는 왕국에 단 둘뿐인 왕녀를 상대로 경거망동할 깡은 없었던 걸까.

순찰 업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호다닥 달려온 것인지 기사용 정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가 레이시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보였다.


그렇지만 난 봤다.


빠르게  안을 스캔하던 앨리스가 날 발견하고는 눈동자를 거칠게 흔들어제끼는 걸 말이다.


동시에 얼굴까지 살짝 붉히는 것이 그녀도 쪼그라든 내 모습이 상당히 취향인 듯 했다.


그렇기에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진짜..'


 놈의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계길래 여자들이 저렇게 미소년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뭐, 귀엽긴 하더만.'


저렇게 반응할 정도인가 생각해보면  정도까진 아닌  같은데 말이다.

속으로 작게 한탄하고 있는 사이, 레이시아가 앨리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럼.."


그에 앨리스가 사양하지 않고 내 맞은 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지만 그런 것치고 그녀는 어쩔  몰라했다.


눈을 어디다가 둬야할지 모르는 눈치라고 해야할까.

결국 그녀의 최선은 먼산을 바라보는 것마냥 내 뒤쪽에 시선을 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날 왕녀의 숨겨둔 애인 비슷한 거라고 판단한 모양.


'하긴..'


아까 레이시아한테 부탁할 때 앨리스를 불러달라고만 했지 자세한 사정까지 전해달라고는 안 했으니까.


오해할만 했다.


아무튼 앨리스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불편했나 보다.

"그래서 저는 어쩐 일로.."

시선을 내 뒤쪽에 자리한 허공에 대고 못을 박은 그녀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난 왜 부른 거냐.

그 말의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버전이 앨리스의 붉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순간,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그건 그에게 직접 듣도록."

내게 바톤을 넘기는게 아닌가?


물론 사양하지 않았다.


이런 건 솔직히 남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보다 내 입으로 직접 전하는 게 그나마 효과가 있을테니까.

해서 잘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서..

"그.. 선배."


앨리스를 불러보았다.

그러자 돌아온 건 내가 왜 그쪽 선배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거참 성급하기는.

의아함으로 가득 찬 그 시선을 느끼면서 최대한 빠르게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그 놀라지 말고 들으셔야 돼요?"


그리고는 조심스럽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실은 내가 이안이고 약을 잘못 먹어서 이런 모습이 된 거라고.

물론 처음에는 믿어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앨리스가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는 표정을 지은 순간.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본 왕녀가 왕녀의 명예를 걸고 보증하지."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레이시아가 그런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뭐야, 내가 누군지 까먹은 거 아니었어?


설마 그 모습이 다 연기였던 건..

아니면 소원권이라는 막대한 보상 덕분에 잠시동안 정신이 번쩍 들기라도 한 건가?


아무튼 무려 다음 대 왕위가 확실시 되는 사람이 제 명예까지 걸며 내 편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


그래서인지 몰라도 앨리스는 처음과는 다르게 쉽사리 부정하질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지..'

믿지 못하겠다면?

믿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힐끗하고 레이시아의 눈치를  번 본 나는 앨리스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클레어.


복수.


그 두 단어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없는 그 단어에 결국 앨리스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고..

"그.. 워, 원래대로 돌아오긴 하는 거지?"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영영 이 모습일까봐 걱정되었던 걸까.


걱정이 그득그득하게 담겨있는 목소리로 그리 묻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약효가 떨어질때까지 기다려야하지만요."

"그럼 파견근무는.."

"회장님께서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아.."

그제서야 자기가 여기까지 불려오게된 이유를 깨달은 것일까.


앨리스가 이제서야 이해가 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흘깃흘깃하고 레이시아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니 정말 그래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는 모양.

그런 앨리스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레이시아가 입을 열어 밝혔다.

"이번에 왕국을 위해 큰 일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건 왕녀로서 도리가 아닐테지."

"..."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 그곳에 있던 당사자기도 하고 말이다."

날 돕기로 한 이유를 말이다.

내가 따로 사심같은 게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어서 돕는 거다.


그러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 레이시아의 설명에 앨리스의 눈속으로 깃들기 시작했던 경계심이 조금씩 씻겨내려가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으이구..'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딱 보니까 저게 다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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