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가 머무는 숙소는 기숙사와는 외따로 떨어져있는 곳이었다.
역시 왕족이라는 걸까.
'하긴..'
기숙사에서 다른 생도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경호 문제부터 시작해서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테니까.
이렇게 아싸리 따로 나와서 사는 게 다른 생도들에게도 레이시아한테도 피차 편할테지.
의외였던 건 안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전에 시녀들하고 같이 생활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무도 없네요?"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질 않아서 의아한 마음에 물으니 레이시아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내보냈다."
"네?"
"아무래도.. 남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을테니 말이다. 아까 미리 사람을 보내서.. 비우도록 해놨다."
아, 하긴 언제 원래 몸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레이시아와 단둘이 있을 때 그렇게 되도 상당히 난감할텐데 시녀들까지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분명 학원부터 시작해서 왕국이 발칵 뒤집어지겠지.
그 점을 고려하면 이건 레이시아가 날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본인의 편의까지 포기해가면서 말이다.
"그렇군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 하는 내내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연신 내쪽을 힐끔대는 걸 보면 마냥 순수한 마음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에 어울려줘야겠지.
'그나저나..'
손은 언제 쯤 놓아줄 생각인 걸까.
숙소에 도착한 이상 더이상 손을 잡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 사실을 그녀라고 모르지 않을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 손 잡고 있다는 걸 까먹은 걸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알아달라는 뜻으로 마주잡고 있는 손을 살짝 꼼질대니..
"앗, 미, 미안하다."
그제서야 손을 놓아주더라.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레이시아와 함께 그녀가 업무를 보는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거기 앉도록."
그렇게 레이시아와 마주앉은 순간 그녀가 곧장 질문을 던져왔다.
자기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냐고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그래서 나도 하나하나 열거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시급한 건 뭐니뭐니해도 역시..
"제가 파견 근무 중이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몸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그거였다.
파견근무.
"아, 그러고보니 그랬었지."
당장 내일부터 근무를 서야하는 처지라고 말하니 레이시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종이에 대고 뭔가를 대충 휘갈겨 쓰고는 그걸 들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한 번 확인해보도록."
체감상 한 1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방으로 돌아온 레이시아가 내게 들고 나갔던 것하고는 다르게 생긴 종이 한 장을 내밀어왔다.
그걸 받아들어 확인해보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치안대에서 발행한 공문임을 알리는 멘트였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치안총감의 것으로 보이는 서명이었고.
공문의 내용 자체는 굉장히 간단했다.
레이시아가 치안대에 내 파견을 요청했고, 치안대에서는 그걸 수락했다는 내용이 전부였으니까.
명분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벌어진 인신공양 사건에 보다 자세하게 파악코자 한다는 게 내 파견을 요청한 명분이었으니까.
"어때? 이럼 됐나?"
"예."
이걸 가지고 언제까지고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적어도 며칠은 벌어줄 수 있을 터.
지금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며칠 안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으니까..'
가장 큰 걱정거리도 해결됐겠다 이제 남은 건 이 모습일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 뿐인데..
그러자니 앨리스의 존재가 살짝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것도 부탁해봤다.
혹시 앨리스를 이곳으로 불러줄 수 있겠냐고.
그런 내 부탁을 레이시아는 살짝 못마땅해하는 눈치긴 했지만..
"..흐음, 알겠다."
결국 들어주긴 했다.
그렇게 앨리스한테까지 초대를 보내놓고 나니?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나는 업무 좀 처리하고 있겠다. 밀린 게 좀 있어서.."
이만하면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본 걸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양해를 구하는 레이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더 신경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용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앉아 쌓여있는 서류를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시아가 시간 때우기에 좋을 거라며 건네주고 간 소설책 하나가 있긴 했지만 책이나 읽자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니까.
해서 적당히 방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척을 했다.
레이시아의 집무실은 거대한 서재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들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으니까.
업무를 보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이곳에 꽂힌 책들을 참고하는 걸까.
그렇게 서재를 채우고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흠?'
특이한 게 눈으로 들어왔다.
다른 책들하고는 다르게 표지가 묘하게 헐렁하달까.
꼭 마치 원래 표지를 벗겨내고 새로운 표지를 억지로 덧씌워놓은 듯한 어색하기 그지없는 느낌에 조심스레 그것을 뽑아드니..
"아앗..!"
뒤쪽에서 잔뜩 당황한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더니 알게 모르게 이쪽을 힐끔대고 있었던 걸까.
'반응을 보니 확실히 이 책에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시녀들 몰래 야한 소설같은 거라도 숨겨놨던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회장님..? 무슨 문제라도.."
동시에 책 표지를 누르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푸니..
스륵- 툭-
책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며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책이 둘로 분리되었다는 점이었지만.
책과 표지가 분리되며 화끈하기 그지없는 속표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알몸의 남녀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서로 부대끼고 있는 그림이었다.
'오우야..'
요즘 경제학책은 내용이 참 화끈하네.
제목도 참 바람직했다.
'집사는 밤마다 야수가 된다.'라니.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목이랄까.
대체 어떻게 야수가 된다는 걸까.
생각치도 못한 것의 등장에 그걸 보고 당황한 척 굳어있으니..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레이시아가 그것을 집어들고는 호다닥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드르륵- 탁-!
그렇게 '집사는 밤마다 야수가 된다.'는 레이시아의 책상 속에 봉인되었다.
아마 저게 다시 빛을 보는 건 내가 돌아가고 난 후가 되겠지.
이성을 초대했는데 그 사람한테 몰래 숨겨놓고 보던 야한 소설을 들켜버린 상황.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해졌다.
그걸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던 걸까.
"..시녀들한테 주의를 좀 줘야겠군. 이런 걸 들여오다니."
레이시아가 되도 않는 변명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조금 웃겼다.
변명을 할 거면 책을 주워가기 전에 하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수치심과 민망함으로 빨개진 귀라도 어떻게 좀 해보고 말을 하던가.
그렇게 황급히 주워가놓고서는 뭐?
시녀들?
통할 변명을 해야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많~이 당황했다는 걸.
뭐라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라 그런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니 분위기가 한층 더 어색해졌다.
살짝 숨막히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나조차도 이럴진데 들키지 말아야할 걸 들켜버린 레이시아는 어떻겠는가?
분명 숨이 턱턱 막히고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일 터.
그래서일까?
"그.. 차 한 잔만.."
제 앞으로 들이닥친 현실을 외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류에 고개를 쳐박고 있던 레이시아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올리며 살짝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혼탁한 나머지 평소와는 다르게 제 옆에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만 깜빡해버린 모양.
"..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한 척 의아해하는 반응을 돌려주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격렬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거기에 집중하는 '척'을 하더라.
해서..
속으로 잠깐 타이밍을 재다가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레이시아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니?
들을 수 있었다.
문틈 사이로 슬며시 새어나오는 누군가의 안도어린 한숨소리를 말이다.
'거참..'
아직 안도하긴 이를텐데.
분명 차 한 잔만 가져다 달라고 했겠다?
그럼 당연히 가져다 줘야지.
그녀는 나름 어려운 부탁도 들어줬는데 그 정도를 못 들어줄까.
'어디보자..'
주방이 어디지?
복도를 따라 걸으며 주방을 찾아 헤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부탁했던대로 차 한 잔을 타서 다시 레이시아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물론, 평범한 차는 아니었다.
주방에 꽤 괜찮은 재료가 많더라고.
그래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섞어봤다.
내가 즐겨마시는 방식대로 말이다.
덜렁 차 한 잔만 들고가긴 좀 그래서 주방에서 찾아낸 커다란 쟁반에 초코칩이 알알히 박힌 초코칩까지 올려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런 내 기척을 감지한 레이시아가 서류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목이 마르신 것 같아서.."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수줍게 웃으며 그리 말하니 레이시아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 반응을 모르는 척 하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주방에서 챙겨온 차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마셔주려나?
마셔주면 좋겠는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내가 내려놓은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맙군. 잘 마시겠다."
날 향해 짧게 감사를 표한 그녀가 김이 풀풀 올라오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그렇게 집어든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유심히 들여다 본 레이시아가 이내 호록하는 소리를 내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직접 탄 건가?"
"네."
"그, 그렇군."
아무래도 내가 타준 게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맨날 마시던 밍숭맹숭하고 가벼운 것들하고는 바디감의 묵직함이 차원이 다를테니까.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 집어든 찻잔을 내려놓지 않고 연신 그 안에 든 것을 홀짝이는 레이시아를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더 부탁할 거라도 있나?"
그런 내 시선이 못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들고 있던 걸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레이시아가 날 향해 물어왔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 해서요.."
그런 내 발언이 황당했던 것일까.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 저 때문에 시중을 못 받으시는 거니까..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고요."
그런 그녀를 상대로 주장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노는 것도 좀 양심에 찔린다고.
"난 괜찮으니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랬더니 레이시아가 지지않고 응수해왔다.
자긴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그, 그래도.."
납득하지 못한 척 슬쩍 말끝을 흐리면서 연신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리니 레이시아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말만하면 뭐든지 다 해줄 것같은 내 발언 때문에 이상한 상상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아까 숨긴 책 내용이라도 떠올랐나?'
쉬이 시선을 맞추질 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아, 아니면 어깨라도 주물러드릴까요?!"
살짝 급발진한 사람처럼 외쳤다.
"으, 응?"
그런 내 발언에 레이시아가 당황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까 보니까 어깨 쪽이 불편하신 것 같아서요.."
이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레이시아는 업무를 보는 동안 간간히 고개를 좌우로 꺾어가며 제 어깨를 한두 번씩 주물러대곤 했으니까.
그곳이 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점을 빌미로 듦과 동시에..
"안 될까요?"
그거라도 해야 내 마음에 편할 것 같다는 뉘앙스로 나름 간절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니 레이시아가 으음하고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췄다.
이럴 때는?
"네? 안 될까요?"
어려져서 레이시아의 취향이 된 이 페이스를 이용해줘야겠지.
시무룩해하는 척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면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졸라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망설이던 레이시아를 함락시키기에는 말이다.
평소보다 살짝 커진 초록빛 눈동자가 지금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 그럼 부탁하마."
그녀가 결국 수락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어깨 한정이긴 하지만 합법적으로 그녀의 몸을 주무를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그런 내가 간과한 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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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의 주량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씬 아래라는 점이었다.
"머리.. 쓰다듬어도 돼?"
"네."
스윽스윽-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며 지나가는 느낌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랬더니..
"귀여워.."
후훗하고 작게 웃은 레이시아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도 모자라...
"..불러줘."
"네?"
"나도 누나라고.. 불러줘.."
카트린느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떼까지 써대기 시작했다.
"누, 누나.."
그래서 불러줬더니..
"에헤헤헤.."
평소의 레이시아에게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헤픈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랬다.
레이시아는..
알쓰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심각한 수준의.
그런 레이시아의 품에 곰인형마냥 안긴 채로 생각했다.
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먹이면 안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