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68)화 (68/366)



〈 6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째서?

그게 레이시아의 말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만큼 궁금했으니까.

저렇게 날 선뜻 도우려고 하는 이유가 말이다.

저번 외출로 인해 날 바라보는 레이시아의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선뜻 도와줄 정도로 호감이 쌓였냐면 글쎄..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내가 뭐 호감도같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주시겠습니까?"


반색을 하며 그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이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야 내가 걱정하는 부분들 중 태반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간단하게 해결될테니까.


해서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니 레이시아가 큼하고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일단 옷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군."


대뜸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그 탓에 나는 졸지에 카트린느의 옷장을 뒤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나 혼자서 말이다.

처음에는 카트린느가 자기도 돕겠다며 앞으로 나섰지만 레이시아한테 가로막혔다.


아직 들을  남았다는 이유였다.


 덕분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옷장 안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솔직히 처음에는 나름 기대감같은 것도 있었다.


그게 증발해버린 것은 옷장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고.

'..개판이구만.'


바깥이 그런 모습일 때부터 정리하고 거리가  타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래서 갈아입을 옷은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속옷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용에 성인용까지 온갖 종류의 옷들이 뒤섞여 탄생한 자그마한 동산의 모습에 슬쩍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저번에 방문했을  인사했던 토끼 팬티가 오늘도 날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팽팽하게 늘어나있던 저번과는 다르게 오늘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진채로.


'으휴 진짜..'


 큰 처자가 이런  하나 못해서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 지..

속으로 쯧쯧하고 혀를 차면서 수북하게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집어들어 차곡차곡 갰다.


그리고는 오와 열을 맞춰서 속옷은 속옷대로 옷은 옷대로 정리하고 있자니..

똑똑-


"네에."


누군가 문을 두들기더라.

그래서 거기에 대고 대답하니 문이 벌컥 열리며 그 사이로 레이시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갈아입으러 들어갔던 사람이 한참동안이나 소식이 없으니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문틈을 통과할 때만 하더라도 걱정을 한 가득 베어물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황당함 반, 그리고 정체모를 감정 반의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뭐하는 거지?"


오늘따라 레이시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유독 이쪽하고 시선을 못 맞춘다고 해야할까.

평소에는 제 미모를 아낌없이 뽐내기 위해 잘만 맞추더니 말이다.

'설마..'

이런 모습이 취향인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꼬맹이가 취향일까 싶었지만 섣불리 부정할 수가 없어서 문제였다.

지금 내 모습은 원래라면 레이시아와 이어졌을 주인공 놈하고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여리여리하고 중성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안 이 새끼 이거..'


어렸을 적에 누나들 좀 홀리고 다녔겠구나 싶은 귀여움이 있달까.

이랬던 애가 어떻게 그런 늠름한 모습으로 자라난 건지 살짝 신기하긴 했지만.. 중간에 한 번에 확 컸나 보지 뭐.

원래 남자한테는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이 모습이 레이시아의 취향이라면?


'당연히 이용해줘야지.'


여자 꼬실 때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라는 게 김치 카사노바 놈의 가르침이었으니 말이다.

놈의 말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당연히 이것마저도 이용해줘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치도 못한 사고로 이런 모습이 된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영영 이 모습으로 살아야한다면 좀 달랐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다가 레이시아가 도와주기로  이상 걱정할 일도 없을테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즐겨보자.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건 약효가 다하기 전까지만이니까.


"옷 갈아입으라고 보낸 거지  정리하라고 보낸 건 아니었는데."


그리 말한 레이시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심 어이가 없었나 보다.

하긴, 그녀 입장에서는 옷 갈아입으라고 들여보냈는데 막상 확인해보니 갈아입지는 않고 무슨 메이드라도  것마냥 옷을 정리하고 있는 상황이었을테니까.


어이가 없을만 하지.

귀엽게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확인해보니까 상태가 좀.. 그래서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개다가 만 옷을 마저 개서 서랍 안으로 밀어넣었다.

레이시아의 물음은 물음이었고 이건 이거니까.


각을 맞추는 도중에 멈춘다?

그건 결코 해선 안 되는 범죄같은 거였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에 비해 봐라.


깔끔하게  잡아서 정리해놓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오와 열이 딱딱 잡혀있는 풍경에 흐뭇하게 웃고 있으니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레이시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음.. 입을만한 게 딱히 없는데요?"


찾아보면 반바지같은 거라도 하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옷장 주인이 바지 혐오파라도 되는 건지 하의라고는 죄다 치마 뿐이었다.


여기서 그나마 건질만한 게 있다면.. 셔츠 정도?


그 마저도 어론 모드일 때 입는 것인지 지금의 내게는 좀 컸다.

'대체 얼마나 작아진 거야..'

덕분에 원래 몸에 비하면 사이즈가 확 줄어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 걸치고 있는 원피스인지 셔츠인지 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아무튼 일단 상의라도 갈아입을 생각으로 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니..

"뭐, 뭐하는 게냐!"

레이시아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모처럼 왕녀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말투는 덤이었다.

그나저나 아직 있었구나.

아무 말 없길래  닫고 돌아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앗, 죄, 죄송.."


"내 말은.. 끄응.."

물론, 노리고  거였다.

모처럼 이런 몸이 된 건데  정도는 해도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효과야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레이시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 상태로 제 얼굴에 대고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해대던 그녀가 일단 갈아입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돌아서 나갔다.

'거참..'

부끄러워 하기는..

귀엽다 귀여워.

아마 지금 내 얼굴을 봤다면 환상이 깨진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정도로 히죽히죽 웃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방금 레이시아의 반응은 귀여웠으니까.


그렇게 흡족하게 웃으면서 눈여겨봐둔 셔츠로 갈아입었다.


'음..'

그나마  낫네.

원래 입고 있었던 건 거의 무릎까지 내려왔는데 말이다.

게다가 품도 굉장히 커서 몸을 잘못 비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주륵하고 흘러내릴 기세였다.

그에 비해 카트린느의 옷장에서 찾아낸 건 가슴 부분이 좀 많이 헐렁하게 느껴지긴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문제는 바지인데..'

지금이야 허리춤을 움켜쥐고 있는 걸로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지만 계속 이러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걸어나갔다.

당당하게 손으로 허리춤을 움켜쥔 채로 말이다.

그런  모습에 레이시아가 당황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춤을 꽉 말아서 부여잡고 있는 탓에 보이지 말아야할 것의 윤곽이 바지 위로 슬쩍 드러나있었으니까.

그랬다.

이안은 크게  놈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놈이었다.


그런  얼핏이나마 봐버렸으니..


'어때?  참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모습을 확인한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숨이 살짝 거칠어지는 게..

'오우..'

살짝 위험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에 비해 카트린느는?

"으이구.. 혼자서 못 묶겠어? 이리와. 누나가 묶어줄테니까."


어느새 누나 모드가 되어있었다.


이안이 어렸을 때 돌봐줬다길래 옷 정리 하나 못하는 칠칠맞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애를 돌본 건지 신뢰가 안 갔었는데 지금하고 있는 얼굴만 보면 진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책임감과 모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이리오라는 그녀의 말과 손짓을 거부하지 못했던 것은.

허리춤을 부여잡은  곧장 카트린느의 앞으로 나아가니 그녀가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바지를 고쳐주었다.

헐렁하기 그지없는 허리춤은 단단하게 묶어서 고정시켜주고, 바닥에 질질 끌리던 바짓단도 허벅지까지 말아올려서 살짝 묶어주니?


아까보다는 훨씬 움직이기 편해졌다.


살짝 볼썽사나워지긴 했지만.

그래서 더 좋은 거다.


못 생긴 애가 이런 꼴을 하고 있다면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귀여움이 철철 흘러넘치는 애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볼썽 사나운 모습 마저도 귀여움으로 치환되는 법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시아는 새로워진 내 모습에 눈을 어디다 두면 좋을지 알 수 없어했다.

그 와중에 내가 카트린느하고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입술을 삐죽인  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그나마 움직일만한 모습이 되고 나니?

"..그럼 이만 가지. 이래저래 처리해야할 게 많을테니 서둘러야겠군."

레이시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리해야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나 서두르겠다는 걸까.

그보다는 아까 전부터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있는 카트린느와 나를 떨어뜨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뭐, 그녀의 본심이 어떨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앗, 넵."

허둥지둥 그런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렇지만 그녀를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보폭도 확 줄어든 데다가 복장이 복장인지라 빨리 뛸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걸음을 재촉하니 그제서야 내가 늦는다는  깨달은 레이시아가 걸음을 멈추고 내쪽을 돌아보았다.

그에 맞춰서 살짝 지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그랬더니 표정으로 아차하는 게..

'귀엽네.'

솔직히 좀 그랬다.


속으로 살짝 웃으면서 황급히 그녀의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죄, 죄송합니다. 이제 가시죠."


더 부담이 되라고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주니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살짝 체한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레이시아의 거리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나를 배려해서 레이시아가 속도를 늦춰줬음에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일부러 늦게 걸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이거..

'연비가 너무 구린데.'


그 조금 걸었다고 벌써 숨이 차다니.

덕분에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건 편했지만.


지친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던 나무를 짚고 있으니 그런 내 기척을 느낀 건지 레이시아가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고 내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숨을 고르다가..

"그.."

슬쩍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다가 그대로 입을 꾹 다무니 그런 내가 못내 답답했던 걸까.

"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레이시아가 내게 입을  것을 종용했다.


"..아닙니다."


물론, 그럼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밀당을 해주다가..


"명령이다."


답답함을 배겨내지 못한 레이시아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어주었다.

"그.. 실례가 안 된다면.."

"흐음?"


"손을 좀 잡아주시면.."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수치스럽다는 듯 더듬더듬하며 그 말을 꺼내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들었다.

'읏..'하고 누군가 작게 헛숨 들이키는 소리를  것을.


그에 일부러 밑으로 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올려보니..

화아아악-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붉은 기운이 확 번져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귀까지 변한 그녀가..

"아, 알겠다. 어, 어쩔  없지.."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주잡게 된 레이시아의 손은..


굉장히 따뜻했다.

그녀가 생활하는 숙소가 숲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게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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