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시원한 콜라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다고 했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한 때는 진짜로 그 정도로 간절했던 적도 있으니까.
그래 한 때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끔 생각나긴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으아..'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어지러움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이대로 다시 기절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욱신욱신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팍 쓰고 있으니..
윙윙하고 귓가로 울려퍼지던 이명이 잦아들며 어지러움에 가려져 묻혀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카트린느네 오두막에서 나는 특유의 쌉싸름한 약초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그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뒤통수와 맞닿아있는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기절한 나를 누군가 들어서 소파 같은 데 뉘여준 걸까.
'쉽지 않았을 텐데..'
카트린느와 레이시아가 기절한 내 몸을 잡고 낑낑대는 모습이 왠지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 문득 실소가 나왔다.
그나저나 베개 되게 부드럽네.
말캉하기도 하고 말이지.
물베개같은 걸까.
겉면을 감싸고 있는 천이 살짝 뻣뻣한 게 흠이긴 했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압도적인 탱탱함과 부드러움이 있었다.
맘같아서는 카트린느한테 하나만 달라고 조르고 싶을 정도로.
그 끔찍할 정도로 기분 좋은 감촉을 만끽하면서 조심스레 그것에 얼굴을 부볐다.
동시에 거기에 얼굴을 파묻기 위해 손을 움직이니..
말캉-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감촉이 손바닥 안으로 착 감겨들었다.
"그.. 정신차렸다면 이만 일어나는 게 어떨까 싶다만.."
진짜 신기하네.
베개가 말을 하잖아?
심지어 목소리는 레이시아의 것과 꼭 닮아있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그 목소리 말이다.
그것이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그 안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간질간질함이 확 올라왔다.
그걸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대니..
푸흐하고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내 뒤통수를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것 덕분이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선사하는 행복감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반사적으로 치켜뜬 순간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타이트한 제복에 감싸인채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누군가의 잘록한 허리였다.
'에..'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가 베고 있는 게 베개 따위가 아니라 레이시아의 허벅지라는 걸.
아니 무슨 허벅지 감촉이..
내가 할 말을 잃고 침묵하고 있는 사이 깨어난 것처럼 움직이다가 다시 멈춰버린 내가 걱정스러웠던 걸까.
레이시아가 살짝 상체를 숙였다.
문제는 내 머리가 레이시아의 배하고 거의 맞닿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시아가 상체를 숙이니..
"우풉..?!"
볼륨감 넘치는 그녀의 가슴이 내 옆얼굴을 슬며시 짓누르며 나는 졸지에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 사이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이 감촉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런 게 포위섬멸전이라는 걸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숨이 턱턱 막혔다.
위험한 건 그 숨 막히는 감각하고 기분 좋은 감각이 동시에 느껴진다는 것이었고.
이대로 계속 갇혀있으면 이상한 성벽이 생겨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떠니..
"앗, 미, 미안하다."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레이시아가 숙이고 있던 몸을 원위치시켰다.
그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레이시아가 이만 일어나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응..?'
잠깐만.
레이시아의 손이 이렇게 컸었나?
순간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위화감이 확 올라왔지만 일단 그녀가 요구한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지러움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라서 최대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스륵-
몸 위에 걸쳐져있던 것이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기절해있는 사이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느라 흐트러져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야가..
평소보다 낮았다.
자세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상한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쟤는 또 왜..'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 사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이쪽을 향해 절, 아니 도게자를 박고 있는 카트린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옆쪽에서 큼큼하고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일단 옷부터 어떻게 하는 게 어떨까 싶다만.."
어쩐 일인지 레이시아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어느 것 하나 해결될 기미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만 하는 의문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끙.."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동자만 움직여 이쪽을 힐끔대던 레이시아가 살짝 앓는 소리를 내더니 옆에 있던 거울을 집어들어 내쪽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이게 뭐 어쨌다는 걸까.
그런 의문을 느끼며 앞으로 들이밀어진 거울 쪽에 시선을 때려박은 순간, 그리하여 그곳에 비친 걸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덤으로 카트린느가 저렇게 도게자를 박고 있는 이유도.
"그러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해서 조심스레 입을 여니 내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앳된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시발.
내 굵직한 목소리 어디갔어.
내 목소리 돌려줘요.
그래서였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던 건.
아니 갑자기 목소리가 확 달라졌는데 당황하지 않고 배기겠냐고.
해서 말을 하다 말고 살짝 벙쪄있으니 그런 날 보다못한 레이시아가 나를 대신해서 나섰다.
툭툭-
"얘기 해."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카트린느가 '히익..!'하고 헛숨들이키는 소리를 내며 크게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그, 그게 실은.."
횡설수설하며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황급히 입 안으로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요약해보면..
"착각했다고요?"
"으응.."
착각하셨단다.
음료수하고 이번에 새로 만들어낸 테스트용 약품을 말이다.
"아니, 그걸 어떻게.."
착각할 수가 있냐고 물으려 했더니 카트린느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에 그걸 따라 시선을 옮기니 볼 수 있었다.
거의 동일한 색을 하고 있는 액체로 채워져있는 두 개의 병을 말이다.
둘 사이에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안을 채우고 있는 액체의 양이었다.
한쪽은 살짝 비워져있는 반면에 한쪽은 끝까지 가득 채워져있었으니까.
아마 살짝 비워져있는 쪽이 내가 마신 쪽이겠지.
'과연..'
저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구분하기 어려울만 했다.
일단 색이 거의 동일한데다가 병 디자인도 똑같았으니까.
이렇게 나란히 늘어놔서 그나마 좀 구분이 가는 거지 둘이 따로 놓여져있었다면?
순간적으로 혼동이 올 만 했다.
올만 했지만..
"라벨은요."
병에 자그마한 라벨같은 거라도 하나 붙여놨다면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해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카트린느가 정곡을 찔린 사람마냥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면몫없다는 듯 시선을 푹 내리깔더라.
그 모습을 보니 살짝 안쓰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딴게 아니라 나였다.
아직 꼭 확인해봐야할 게 남아있었으니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긴 한 거죠?"
그래,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질문을 던져놓고도 좀 불안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카트린느도 나와 비슷한 신세니까.
지금이야 중화제인지 뭔지를 복용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지만 평소에는 지금 나처럼 어려진 모습으로 지내지 않던가?
그 말은 그녀의 능력으로도 아직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그래서 불안했는데..
"으음, 돌아가기는 할 거야. 네가 마신 건 내가 마셨던 거하고는 다른 거라서.."
다행히 그렇단다.
자신감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게 약간 신뢰가 안 가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문제는 돌아가기까지 얼마나 걸리냐는 건데..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요?"
그래서 그것도 물어보았다.
"..글쎄?"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굉장히 무책임해서 문제였지만.
글쎄라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답변에 짜게 식은 눈으로 카트린느를 바라보니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레이시아가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나와 같이 카트린느를 노려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카트린느로 하여금 보란듯이 입을 벙긋거리는데..
나는 봤다.
레이시아가 카트린느를 향해 입모양만으로 속삭인 한 단어를.
예산.
모든 연구자들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그 단어가 레이시아의 입을 떠나 카트린느의 몸에 푸욱하고 박혀든 순간 그녀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고로 모든 연구자들은 예산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을 이기지 못하는 운명이니까.
하물며 카트린느처럼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타입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어쩐지..'
아까부터 레이시아한테 쪽을 못 쓰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였구만.
그렇게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레이시아한테 굴복한 카트린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기준으로 디자인한 약이라서 그게 남한테 적용되었을 때 효과가 얼마나 갈지 짐작하기 어렵다나?
'이거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내게 허락된 휴가가 오늘 하루 뿐임을 고려하면 더더욱.
내일부터는 다시 치안대로 나가서 근무를 서야 하는데 이런 몸으로 근무를 선다?
절대로 무리다.
그래서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마신다는 중화제라는 것에 대해서도 문의해봤다.
정 안되면 근무서는 동안만 그걸 마셔서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물어봤는데..
"으음, 그건 좀.."
그런 내 물음에 카트린느가 난색을 표했다.
어째서?
"애초에 그것도 날 기준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그래서 자신이 복용했을 때처럼 제대로 효과가 나올지도 의문일 뿐더러 예상치 못한 부작용까지 우려된단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포기할 수밖에.
'시발..'
진짜 어쩌지.
이러다가 에반젤린 건하고 사교도 건으로 벌어놓은 걸 무단이탈로 다 까먹게 되는 건 아니겠지?
레아한테 사정을 설명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보통은 안 믿겠지.'
나라도 그럴테니까.
레이시아가 증인으로 나서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 해주려나?
잘 모르겠다.
'아니, 그래서..'
진짜로 이걸 어쩐다.
원래 몸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는데 해야할 일은 있는 상황.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까 막 깨어났을 때처럼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골뿐만 아니라 이제보니 몸도 군데군데가 불편했다.
꼭 근육통이라도 온 것마냥 욱신욱신 거리는 게..
'부작용인가?'
하긴 몸이 쪼그라든 거니까.
부작용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
생각해보니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나 이거..'
이 몸으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긴 하려나?
정문으로 들어가면 보나마나 사감 선에서 컷될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잠입을 하자니..
조심스레 팔을 들어올려 확인해봤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원래의 것과 비교하면 한없이 연약해보이는 가느다란 팔이었다.
이런 몸으로 과연 내 방까지 무사히 숨어들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노숙까지 하게될지도 모르는 상황.
'돌아갈 때까지만 여기서 재워달라고 해야하나..?'
해서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크흠!'하고 작지만 또렷한 헛기침 소리가 점점 더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던 내 정신을 일깨웠다.
그에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얼떨결에 눈이 마주친 레이시아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걸까.
"이번만 본 왕녀가 특별히 도와주도록 하마."
속으로 고개를 갸웃한 찰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발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