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즈그 친구들은 다 불끄러 나갔는데 지 혼자서 몰래 방 안에 숨어있던 개인주의로 무장한 새끼들을 손수 이승에서 작별시켜주면서 지하로 통하는 길을 찾았다.
무슨 근거로 지하일 거라고 확신냐고?
그야 그게 국룰이니까.
그렇게 지하로 이어진 길을 찾아헤매다 보니 눈에 띈 건 창고였다.
원래는 어떤 조직에서 쓰던 곳이라더니 조직원들이 마시는 술을 보관해놓는 창고였던 걸까.
벽을 따라 늘어서있는 선반과 군데군데를 채우고 있는 술병들을 보고 있자니 내 감이 속삭였다.
여기서 뭔가를 잘 건드리기만 하면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로 통하는 길이 나타날 거라고.
'그래서 그 뭔가가 대체 뭔데.'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뭐라도 보일 것 같아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은밀한 시설로 통하는 입구답게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인지 '이거다!'하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살짝 답답한 마음에 애꿏은 머리만 벅벅 긁고 있자니...
자박자박-
어디선가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가.
그에 반사적으로 선반 뒤에 몸을 숨긴 순간 깨달았다.
발소리는 벽 뒤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지하로 내려갔던 놈들이 바깥의 소란을 전해듣고 올라오고 있는 모양.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자리를 옮겼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선반 바로 옆으로.
그리고는 숨을 죽이고 있으니..
쿠구궁-
어느 순간 벽이 살짝 흔들리며 선반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
저건 또 어떻게 만들었대?
분명 옆으로 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십억짜리 오픈카마냥 위로 열릴 줄이야.
새삼 감탄하고 있자니 그렇게 생겨난 틈을 통해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 쓴 놈들이 빠져나왔다.
개중에는 내게 오싹오싹한 느낌을 선물해주었던 놈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는대로 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역시 높으신 양반이 맞았나 보다.
놈의 한 마디에 주변에 있는 놈들이 저렇게까지 쩔쩔매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렇다면?
저 놈은 무조건 생포해줘야겠지.
해서..
그대로 창대를 휘둘러 근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주변에 있는 놈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간부 놈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퍼억-!
사람은 원래 생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굳어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그건 악신을 숭배하는 놈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명령을 내리던 제 윗대가리가 실끊어진 인형마냥 풀썩 쓰러지니 놈들은 하나같이 멍한 얼굴을 했다.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걸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수밖에.
심문대상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놈들이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서 허벅지에 칼빵하고 창침을 고루 먹여줬다.
"크아아아악!!"
"끄흐으읍..!"
그랬더니 다들 좋다고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더라.
"아니, 그렇게까지 좋아해주면 부끄러운데."
그래서 조금 더 서비스를 해줬다.
혹시라도 지하를 뒤지는 동안 튀기라도 하면 곤란했기에 창대를 열심히 휘둘러 꿀밤을 먹여주었다.
"제, 제발 그만.."
"그러면 니가 빨리 기절을 하던가."
노력도 안 해놓고선 남들한테 의지할 생각부터 하다니 이래서 사교도란 놈들은..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왜 죄다 남자야?
쫄따구라는 놈들은 태반이 여자던데 나름 위치가 있어보이는 놈들은 하나같이 고추 새끼들 뿐이라니.
'설마..'
몸을 빌미로 교세를 불린다던가 뭐 그딴 식인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일까 싶었지만은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도록 하고.'
이 새끼들부터 어떻게 하는 게 먼저겠지.
해서 정말 하기 싫었지만 놈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로브를 일일히 벗겨내서 놈들의 몸을 포박했다.
'시발..'
이 새끼들은 안에 왜 저딴 걸 입고 있는 거야?
쓸데없이 눈만 버렸네 진짜.
마지막으로 적당한 크기의 선반을 놈들 위로 넘어뜨렸다.
졸지에 그 밑에 깔리게 된 놈들이 죽는 소리를 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뒤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뭐.'
그렇고 말고.
구석에다가 처박아 놓고 그 위에 선반까지 덮어놓았으니 혹시라도 누가 여기로 들어온다고 해도 구석까지 뒤지지 않는 한 저들이 구원받는 일은 없을 터.
해서 안심하고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지하는..
꽤 넓었다.
사람들도 많았고.
그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뒤지기 일보 직전이라서 문제지.
넓직한 공간 곳곳에 새겨져있는 온갖 흔적들과 공간 자체에서 짙게 풍겨져나오는 혈향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들은 사교도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새끼들이라는 걸.
'시발 차라리 악마 숭배자 새끼들이 낫지..'
하필이면 사교도라니.
제일 귀찮은 놈들이 걸려버렸다.
자고로 광신적인 믿음으로 무장한 집단만큼이나 상대하기 껄끄럽고 귀찮은 놈들이 또 없으니까.
벌써부터 무슨무슨 신님 만세!!를 외치며 날 향해 자살돌격을 감행하는 놈들의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 골이 지끈거렸다.
아무튼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야.. 이건 혼자서는 절대 안 되겠는데.."
그래서 다시 위로 올라갔다.
물론 주황머리도 함께였다.
'더럽게 무겁네 진짜로.'
기절한채였지만.
쌀포대 짊어지듯 주황머리가 들어있는 포대자루를 어깨 위에 둘러메고 다시 창고로 올라오니..
고새 지원병력이 도착한 모양인지 바깥이 시끌시끌했다.
그래서..
"선배님들!! 여기 벽 뒤에!! 벽 뒤에 공간 있어요!!"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가서 책임자한테 떠넘겼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인신매매단, 아니 사교도 놈들의 은신처 중 한 곳을 발견하고 놈들의 간부로 추정되는 이들을 사로잡은 공적을 고스란히 인정받았다.
물론, 뒤처리는 레아와 함께 출동한 이들이 그대로 넘겨받았고 말이다.
'진짜 가관이었지..'
기억이 남는 건 지하 시설을 확인한 기사란 년들의 반응이었다.
수도에서 치안 업무만 보던 년들이라서 그런 지 몰라도 사람이 소, 돼지마냥 도축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버티질 못하더라.
밑으로 내려가서 현장을 확인하자마자 다들 이곳저곳 부여잡고 구역질을 해대는데 그 탓에 중요한 단서가 훼손될 뻔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이렇게 생각치도 못한 보너스도 받았지만.'
지하의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일까.
레아는 내게 하루동안 쉬면서 심신을 추스를 것을 명령했다.
아무래도 내가 알게 모르게 많이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명령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에반젤린 건에 이어서 사교도 건까지 크게 한 건 터뜨린 덕분에 더이상 성과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으니까.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순찰돌고 있을 시간에 이렇게 한가하게 학원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앨리스도 같이 휴가를 받았으면 참 좋았을텐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레아한테 하루 쉬라는 지시를 받은 건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앨리스는 지금쯤 평소처럼 순찰코스를 돌고 있을 것이다.
레아가 임시적으로 붙여준 파트너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겠지.
'흠..'
한 번 놀러가 봐?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긴 한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껏 휴가를 받았는데 놀러가는 곳이 일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럼 뭘 한다..'
뭘 하는 게 좋을까.
뭘 해야 특별히 내게만 허락된 이 하루를 잘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나만 빼고 다 바쁜 모양인지 오늘따라 한적한 산책로 중앙에 배치된 벤치에 걸터앉아 애꿏은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아.'
놀러갈만한 곳이 떠올랐다.
마침 지금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건?
당연히 가줘야겠지.
마침 약속도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시기를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 괜찮을 거다.
지금부터 향하려고 하는 곳의 주인인 카트린느는 딱봐도 클레어랑 비슷한 타입인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한 곳에 틀어박히면 어지간하면 그곳에서 기어나오지 않는 타입 말이다.
그러니 지금도 분명 그곳에 있을 터.
'가서 없으면은 뭐..'
그때 가서 생각해보면 되겠지.
그러니까 가자.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저번에 방문했던 숲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숲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처럼 살짝 음침하면서도 조용했다.
그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나무들 사이로 작게 난 길을 따라서 걸음을 옮기니 저번에 방문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오두막의 모습이 날 반겨주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굳게 닫혀있는 문을 두어번 정도 두들기니..
"들어오세요~"
저번에 방문했을 때하고는 다르게 성숙한 버전의 목소리가 날 반겨주었다.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 걸까.
'하긴..'
이런 곳을 드나들만한 사람은 주인공 놈밖에 없을테니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닫혀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엇..! 뭐야 이안이었어?"
"흠?"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가 날 반겨주었다.
어쩐지 저번에 방문헀을 때와는 다르게 성숙한 버전이더라니 손님을 상대하느라 그랬나 보다.
문제는 그 손님이라는 게..
"여긴 어쩐 일이지?"
레이시아라는 거였지만.
그녀도 설마 여기서 나와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오늘도 여전히 그 특유의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학원의 제복으로 꼬옥 감싸고 있는 그녀가 날 바라보며 고운 눈썹을 씰룩였다.
"그러는 회장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그 와중에 날 흡족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반응이었다.
예전같았다면 날 보자마자 언짢아하는 반응을 보였을텐데 저번 외출이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나 보다.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미약하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섞여있었다.
뿐만아니라 나와 카트린느의 관계를 살짝 궁금해하는 눈치기도 했고.
얼핏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그녀가 내게 흥미를 품게 되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야 지인의 안부도 확인할 겸 필요한 게 있어서 받으러 온 것 뿐이다만."
그랬구나.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새롭게 알게된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자니 레이시아의 올곧은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자기는 대답했으니 이제 내가 대답한 차례라는 걸까.
해서 입을 열려하니..
"아, 혹시 놀러온 거야?"
카트린느가 선수를 쳤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난 봤다.
레이시아의 눈썹이 작게 꿈틀대는 것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거야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나와 카트린느가 가까워보이는 게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그게 과연 내가 제 소꿉친구인 디아나를 두고 카트린느와 놀아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카트린느의 말 뒤에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둘은 같은 동네 출신이며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낸 소꿉친구같은 관계라고.
"에이, 친구라니 그건 아니지. 내가 너 요만할 때부터 돌봐줬는데?"
물론, 카트린느는 그런 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듯 했지만 말이다.
내가 널 업어키웠는데 어딜 감히 친구를 먹으려고 드냐는 것처럼 피식하고 웃은 카트린느가 이내 내게 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레이시아의 바로 옆자리였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사양하지 않고 그녀가 권하는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이번에는 카트린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이번에도 사양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날이 푹푹 찌는데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살짝 목이 타던 참이었으니까.
"혹시 시원한 거 있어?"
해서 그리 물으니..
"시원한 거? 알았어."
카트린느가 총총걸음으로 주방 쪽으로 향했다.
문제는..
'오우 쉣..'
그녀의 치마가 뒤집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저번에는 전형적인 꼬맹이 취향으로다가 곰돌이 무늬더니 오늘은 또 화끈하기 그지없었다.
그 너머가 슬쩍 비춰보이는 검은색 시스루 팬티가 카트린느의 새하얀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뭐를?
골을.
"크흠.."
그것을 확인한 즉시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 옆에 앉아있던 레이시아의 반응도 나와 거의 동일했다.
덕분에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해져버린 상황.
서로 차마 입은 열지 못하고 애꿏은 허공하고 천장만 응시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 시원한 거!"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고 튀어버렸던 이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내 앞으로 올라온 정체불명의 음료는..
'음..'
확실히 시원해보이긴 했다.
색깔이 좀.. 그래서 그렇지.
보랏빛과 검은색 그 중간 쯔음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색이라고 해야할까.
색부터 함부로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이 물씬 풍기는데 심지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기포가 퐁퐁 터졌다.
아니, 잠깐만..
'기포라고..?'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그런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이라도 시켜주고 싶었던 걸까.
뽀글뽀글 올라온 기포가 퐁하고 터지며 날 유혹했다.
갓 컵에 따라낸 탄산음료처럼.
그래 어쩌면 이건 탄산음료일지도 몰랐다.
한때는 너무나도 간절해서 딱 한 모금만 마실 수 있게 해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매혹적인 음료 말이다.
그래서였다.
내가 뭐라뭐라 열심히 떠들던 카트린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표정으로 날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는 걸 보지 못하고 내 앞에 놓여져있는 컵을 집어들어 곧바로 입으로 직행시켰던 것은.
그렇게 체감상 한 100년만에 마시는 것 같은 탄산음료의 맛은..
자그마한 각얼음까지 동동 띄워져있는 그것의 맛은..
굉장히 짜릿했다.
의식이 날아가버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