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자, 그럼 각자 역할하고 작전도 다 정해졌고 하니..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이제 미끼를 커스터마이징할 시간이었다.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 새끼들을 줄줄 꾀어낼 수 있는 주인공 놈과는 다르게 주황머리 년은 그런 피리부는 사나이같은 편리한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부족분을 메꿀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커스터마이징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다행히 갈아입을 옷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치안대 측에 양해를 구하고 압수품들을 모아놓은 창고를 확인해보니 차고 넘치는 게 빈민들의 옷이었으니까.
심지어 하나같이 구석에 처박혀있어서 뿌링클마냥 먼지 시즈닝까지 솔솔 뿌려져있는데..
"여기요."
개중에서 이것보다 완벽한 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걸 하나 끄집어내서 주황머리를 향해 내밀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 손에 들린 허름하고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야말로 누더기라는 단어를 형상화해놓은 듯한 물건의 모습을 확인한 주황머리 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비쥬얼이었던 모양.
그래서 그런지 옷을 수거해갈 생각을 안 하길래..
"자자, 얼른요."
친절하게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거기에 앨리스하고 합을 맞춰서 얼른 갈아입으러 안 가고 뭐하냐는 뜻으로 지그시 시선까지 던져주니 결국 제 운명을 받아들이더라.
"대체 내가 왜.."
방으로 들어가면서 좀 많이 꿍시렁대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입고 있던 기사용 정복을 대신해 누더기로 갈아입고 나온 주황머리가 나와 앨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시선을 던졌다.
"이제 됐지?"
동시에 그리 묻길래 보란듯이 고개를 가로저어줬다.
됐냐고?
그럴 리가 있나.
고작 누더기 하나 걸친 걸로 주인공 놈의 어그로력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얘는.
당연히 이 정도로는 나를, 그리고 장기자랑 참가자들을 모집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사교도 놈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사교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왜 또 뭐."
"옷은 허름한데 머리나 얼굴이 너무 단정하잖아요."
쉽게 말해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이대로라면 시도하는 즉시 바로 탄로날 테니까.
안 그래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년이 공적도 쌓고 겸사겸사 옆에 있는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눈이 멀어서 무리한 닥돌을 감행한 바람에 놈들의 경계심이 많이 올라가있을 게 뻔한데 타겟한테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백퍼 저건 아닌갑다하고 빤스런을 치겠지.
그 다음부터는 경계심이 더 심해질테고.
결국에는 니가 한 짓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다.
라는 말을 최대한 길게, 그리고 일곱 살짜리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리있게 풀어서 해주니 주황머리의 멘탈은 금세 걸치고 있는 누더기마냥 너덜너덜해졌다.
"몰라.. 알아서 해.."
하얗게 불태운 사람마냥 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제 운명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해서..
"어떻게 할까요?"
"음, 확실히 너무 깔끔한 것 같긴 해."
그 즉시 앨리스와 상의에 들어갔다.
안건은 쟤를 어떻게하면 흔하디 흔한 빈민 1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였고.
'뭐, 사실..'
이미 놈들의 경계심이 올라간 상황에서 미끼 작전을 쓴다는 것부터가 살짝 에러긴 한데..
그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놈들이 이왕 들킨 김에 치안대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선보이기 전에 크게 한 탕하고 잠적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가능성이 아예 제로는 아닌만큼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앨리스와 컨셉회의를 하고 있자니 그녀가 꽤 괜찮은 의견을 내놓았다.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이라면 분명 취사시설이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검댕을 얻어다가 발라버리자는 것.
"거기다가 진흙도 좀 묻혀주고 그러면 좀 꼬질꼬질해지지 않을까?"
"좋네요. 바로 가보죠."
역시 히로인다운 훌륭하기 그지없는 의견이었다.
"검댕이요?"
"네."
"그런 건 왜.."
"쓸 곳이 있어서요."
식당에 방문하니 어렵지 않게 검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식당 책임자랍시고 나온 아저씨는 파견나온 애들이 왜 그딴 걸 구하고 다니는 지 굉장히 의아해하는 눈치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순순하게 우리를 화덕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렇게 화덕 안을 들쑤시고 있자니..
'흠?'
같이 쓰면 더 좋을 것 같은 물건이 눈에 들어와서 그것도 챙겼다.
그렇게 분장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서 다시 주황머리의 앞으로 복귀하니 나와 앨리스의 손에 들려있는 것들을 확인한 그녀가 허허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제 좀 포기한 모양.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구워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하라는 것처럼 의자 위에서 몸을 축 늘어뜨리길래 원하는대로 해줬다.
'일단은 볼터치부터.'
마치 땀 닦다가 손에 묻어있던 게 옮겨묻은 것처럼 주방에서 챙겨온 검댕으로 가볍게 볼터치를 좀 해준 다음에 옷에도 좀 칠해주었다.
그리고는 손까지 손수 칠해주니..
'이야..'
꽤 그럴 듯한 결과물이 탄생했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화룡점정이 필요한 상황.
그래서 아까 검댕과 함께 챙겨온 것을 주황머리를 향해 내밀었다.
"여기요."
찰랑하고 병 안에 든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알싸하기 그지없는 알코올향이 코를 콕콕 찔러댔다.
"..마시라고?"
남자에 환장하는 것 같더니만 술도 좋아하는 걸까.
언제 울상을 하고 있었냐는 듯 술냄새를 맡자마자 살짝 표정이 밝아지길래..
"아뇨. 뿌리시라고요. 몸에다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단칼에 일축해주었다.
사실 마셔서 취하기까지하면 위장이 더 완벽해지긴 하겠지만 미끼 역을 수행하는 년이 제정신이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책임질 일은 피해야지.'
해서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주황머리의 손에 손수 술병을 쥐여주니 그녀가 병 안에 든 것을 제 몸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하나로 묶고 있던 머리까지 풀어서 부스스하게 헤쳐주니?
'아, 이건 못 참지.'
주황머리는 인신매매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의 수집욕구를 물씬 불러일으킬만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팜므파탈과 옴므파탈의 뒤를 잇는 인신므파탈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바로 실전에 투입할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 확인해야할 것이 있었으니까.
"한 번 취한 척 해보실래요?"
먹음직스럽게 생긴 미끼라도 미끼라는 티가 확 나버리면 아무 소용 없지 않겠는가?
해서 시험삼아 연기를 주문해보니..
"음.. 그냥 뭐 하려고 하지 마시고 적당히 휘청휘청거리다가 근처에 사람없다 싶으면 취한 척 벽에 등대고 앉아계세요."
결과는 처참했다.
그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어떤 모습을 연기할지까지 모두 정하고 나니 남은 건 이제 실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앨리스의 턴이었다.
내가 작가 겸 감독이자 스타일리스트라면 앨리스는 현지 코디네이터라 할 수 있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네 명 중에 그녀보다 수도의 뒷골목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또 없을 터.
해서 적당한 곳을 골라달라고 부탁하니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괜찮은 인신매매 명소라도 있는 것일까.
곧바로 그녀를 따라나서니 과연 납치범들이 환장할만한 장소가 튀어나왔다.
일단 주변 골목이 거미줄마냥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매복하고 있기 딱 좋은 데다가 유동인구도 납치를 실행하기에 딱 좋았으니까.
지름길이라도 되는 지 가끔씩 한두 명씩 드나드는데 내가 볼 때 수도에서 납치극을 벌이기에 이만한 장소가 또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튀기도 좋았다.
슬럼하고도 밀접해있는 탓에 혹시라도 일이 틀어졌을 때 거기로 낼름 튀어버리면?
쫓는 입장에서는 벙찔 수밖에 없겠지.
중요한 건 그 사교도인지 악마숭배자인지 아니면 순수한 인신매매단인지 알 수 없는 놈들도 이 장소를 알고 있냐는 건데..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최근에 여기하고 관련된 소문 하나가 돈 적이 있거든."
"소문이요?"
"응, 일종의 괴담같은 건데.."
대충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야심한 시각에 이곳을 이용한 사람들이 행방불명 되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내용이겠지.
그런 게 화제가 되지 않고 그대로 묻혀버렸던 건 사라진 이들이 하나같이 빈민들이라서 그랬던 것일거고.
"아무튼 여기가 가능성이 높다 이거죠?"
"응."
그렇다니 당연히 이곳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어디에 몸을 숨기면 좋을지 매복포인트를 고심하고 있으니 앨리스가 적당한 곳이 있다며 나와 주인공 놈을 어딘가를 향해 이끌었다.
그런 그녀를 따라서 멀쩡해보이는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튀어나온 건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이었다.
특이한 건 앨리스의 태도였다.
무슨 제 집 들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혹시 그녀가 사는 곳인가 싶을 정도였다.
들어가보니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사는 곳이라면 생활감이 조금이라도 묻어나왔을텐데 여긴 오랫동안 방치된 듯 온통 먼지투성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기는 왜 추천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시선을 던지니 앨리스가 대뜸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발판같은 것을 밟고 다락방같은 구조를 하고 있는 곳 위로 올라간 그녀가 이내 사다리를 내려주었고, 그걸 타고 올라가보니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왜 이곳을 추천했던 건지를.
'딱 좋네.'
위치나 높이, 구조까지 이곳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그야말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골목 안을 감시하기 딱 좋은 장소랄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역시 높이가 주변의 다른 건물들보다 높아서 벽 곳곳에 숭숭 뚫린 구멍을 통해 주황머리가 진입하기로 되어있는 골목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곳이라면?
그 인신매매단 놈들이 우리가 들어와있는 이곳의 문을 열고 들이닥치기라도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는 일은 없을 터.
흡족한 마음에 즉시 엄지를 치켜드니 그런 내 찬사가 기꺼웠는지 앨리스가 씩 웃으며 많고 많은 구멍 중 하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쪽 방향은 자기가 담당하겠다는 걸까.
"난 이쪽을 보고 있을게."
해서 주인공 놈하고 남은 두 방향을 나눠서 맡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에 적당히 어둑어둑하게 변했을 때 미리 귀뜸해두었던대로 주황머리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휘청휘청하며 걷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봐도 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오..'
아까 연습할 때보다 확연히 자연스러워진 그 모습에 속으로 짧게 감탄을 토하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푹 고꾸라질 것처럼 비틀비틀대며 걷던 주황머리가 이내 벽에 대고 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어깨가 작게 들썩거리는 걸보면 헛구역질 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는 중인 걸까.
'잘하는데?'
알고 보니 실전파였던 주황머리의 연기에 내심 감탄하고 있으니 딱따구리마냥 벽에 머리를 박고 있던 그녀가 이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몸짓마저도 상당히 그럴 듯했다.
누가봐도 술기운 때문에 제 몸을 못 가누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으니까.
"잘하네요.."
"그러게.."
그에 새삼 감탄하고 있던 것도 잠시,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에 최대한 집중했다.
안 그래도 골목이라서 어두운데 하늘까지 어둑어둑해지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사물을 구분하기가 살짝 힘들었으니까.
'어떻게..'
반응이 올지 모르겠네..
주황머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선전을 보여준 상황.
그래서 나름대로 기대감을 품어봤지만 어째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역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사리기 모드에 들어간 것일까.
언제까지고 저런 모습으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속으로 철수타이밍을 고심하고 있던 찰나였다.
대로변에서 누군가가 골목 안으로 진입하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지름길을 이용하려는 생각인 걸까.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이던 거뭇거뭇한 실루엣이 마침내 골목에 널브러져있는 주황머리와 조우했다.
골목 한복판에 사람이 쓰려져있어서 당황한 걸까.
주황머리와 조우한 실루엣이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이야..'
시체 루팅하듯 주황머리의 품을 뒤지기 시작하더라.
그 매정하기 그지없는 수도 인심보다도 더 감탄스러운 건 그 와중에도 연기를 멈추지 않는 주황머리의 모습이었다.
'설마 저거..'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잠든 건 아니겠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사이 주황머리 앞에 쪼그려앉아 그녀의 품속을 뒤지던 실루엣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쏠쏠하게 용돈벌이 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허탕이라서 화난 걸까.
분풀이라도 하듯 널브러져 있던 주황머리를 걷어찬 실루엣이..
대뜸 어딘가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그와 함께 골목 곳곳에서 로브를 뒤집어 쓴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확신했다.
'떴다..!'
놈들이 미끼를 물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