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63)화 (63/366)



〈 6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가 클레어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조력자라는 감투를  손으로 직접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준 덕분일까.


평소보다 흐리멍텅해서 아슬아슬한 느낌을 물씬 풍기던 앨리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평소의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긴 했다.

딱봐도 어떻게 하면 클레어를 효과적으로 조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는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또한 당연히 내몫이었다.


솔직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따로 생각해놓은 게 있다고 말하니 앨리스는 순순히 내 뜻을 존중해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까.

내 복수인만큼 자기 내키는대로 하기 보다는 최대한 내 의사에 맞춰주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문제는 그걸 행동으로 옮기려면 지금 터진 일부터 수습해야 한다는 거지만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주의를 클레어 쪽에서 주인공 놈이 물고 온 인신매매 사건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아까 레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던 것을 고려하면 아직 인신매매라고 확정이 난 건 아닌 모양이지만.


인신매매인지 아닌지 그걸 확실하게 하려면?

"그럼, 일단 유일한 목격자부터 만나봐야겠네."

우선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앨리스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앨리스가 의무실부터 가보자며 앞장을 섰다.


저번에 레아에게 시설을 안내받을  전부 다 기억해둔 것일까.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는 앨리스를 따라 움직이니 길 한 번 헤매는  없이 순식간에 의무실 앞에 도착할  있었다.

주황머리 년은 그곳에 있었다.


그래도 나름  조였다고 주인공 놈이 다칠 때까지 여자로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던 걸까.

주황머리 년의 얼굴은 마지막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묘하게 어두워보였다.


"아..!"

그렇게 얼굴 위에 살짝 그늘을 드리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나와 앨리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 맞춰서 주황머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 앨리스가 날 의무실 쪽으로 떠밀었다.

여긴 자기가 맡을테니 안쪽에 있는 놈은 내가 맡으라는 걸까.


나야 사양할 이유가 없었기에 곧바로 앨리스와 찢어져서 의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침대를 따라 둘러쳐진 흰색의 커튼을 수줍게 흔들었다.

그리고  위로 진으로 추정되는 실루엣 하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옷이라도 갈아입는 중인 걸까.

부스럭대는 소리와 커튼 위로 넘실거리는 실루엣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하긴..'

팔뚝을 베였다고 했으니 그곳을 덮고 있던 것도 같이 찢어졌을테니까.

그걸 그대로 입기는 좀 그랬겠지.


아무튼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갈아입고 나올 것 같아서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대충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를 따라 둘러쳐져있던 흰색의 커튼이 걷히며  뒤에서 주인공 놈이 살짝 헐렁한 셔츠를 몸에 걸친  걸어나왔다.

의외인 건 놈의 반응이었다.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았으니 아까 내가 들어오면서 난 소리 때문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텐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걸까.


내가 너무 정면에 대놓고 앉아있었나?

뭐, 아무튼..


"다쳤다면서?"


일단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게 먼저니까.

다짜고짜 사정청취부터 들어가는 건 너무 정없지 않겠는가?


해서 그리 물었더니 주인공 놈이 다시 한 번 멈칫거렸다.

그것도 잠시 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애가 그래도 반성이라는 걸 할  아는 구나하고.


내가 거쳐온 주인공 놈들 중에는 그 당연한 것도 못하는 놈들이 태반이었는데 말이다.

"괜찮냐?"


"응, 뭐.."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궁금한 게 있어서."

부상입은 게 쪽팔린 걸까.

묘하게 쭈뼛대던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그렇게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는..


'거참..'

내게 헛웃음을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하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트롤 짓을 해댄 게 주인공 놈이 아니라 주황머리 년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랬다.


레아가 전해준 정보에는 누락된 부분이 있었다.


알고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몰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쩐지 답지 않게 죽상이더니만..'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만.

하긴, 쪽팔릴만도 하지.


보나마나 남자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나섰던 걸텐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긴 커녕  남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니까.


심지어 그 남자가 자길 구하다가 상처까지 입어버렸으니..

여자로서 쪽팔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터.

'아니, 그나저나..'

얘는 대체 어떻게 그런 현장을 발견한 걸까.

내 기억이 맞다면 2조가 순찰도는 코스는 납치하고는 거리가 먼 장소들 뿐인 걸로 아는데 말이다.


궁금한 마음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소리가 들렸거든."


"소리?"


"응, 비명 소리가 들렸어."

그래서 그걸 따라가봤더니 로브를 뒤집어  무리들이 의식을 잃은 남녀를 자루 안에 수납하고 있었단다.


"잠깐만 남녀라고?"


"응."


"나이가 얼마 정도였는데?"

"음.. 둘다 30대 정도로 보이던데. 확실하지는 않아."


피해자가 30대로 추정되는 남녀라.

악마 뽕에 취해있는 놈들이 선호할만한 산제물상은 아닌데..

그럼 사람들한테 강제로 장기자랑을 시키는 게 취미인 놈들 소행일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왔지만 섣불리 확정짓지는 않았다.

이제 막 수사를 시작한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외에 기억나는 점은 더 없고?"

팔을 다친만큼 자신은 당장 전력이 되기 어렵다는 걸  놈도  알고 있는 걸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듯 진은 내 물음에 생각한  이상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에 살짝 기대감을 느끼고 있자니..


"아."

쓸데없이 긴 속눈썹을 과시하며 고민에 잠겨있던 놈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보니 그놈들  한 명이 아직 한참 부족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아."


과연 내뱉은 탄성에 딱 어울리는 단서였다.


덕분에 놈들을 어떻게 추적하면 좋을지 대충 계획이 섰으니까.


부족하다는 건?

보나마나 대규모 장기자랑에 참여할 사람의 수를 말하는 것일거다.


그렇다면 놈들은 당연히 그 부족한 수를 채우기 위해서 타의적 참가자들을 모집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터.

그런 상황에서 납치하기 딱 좋게 생긴 대상이 납치하기  좋은 장소에서 얼쩡거린다면?


놈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야..'

당연히 좋다고 덥썩 물겠지.


하루 빨리 머릿수를 맞춰야 할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 먹음직스러운 미끼 역할에 딱 어울릴만한 이를  명 알고 있었다.

딱봐도 힘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어보이는 호리호리한 몸에 저항할 때 상당한 가산점이 되어줄 팔의 부상.

거기에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한테만 허락된 희소하기 그지없는 종특까지.

그런 사람이 미끼가 된다면?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얘도 동의하냐는 건데..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보면 될 터.


해서 나는  궁금한 건 없냐고 묻는 듯한 주인공 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놈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놈을 미끼로 써먹기로 결정한 순간, 내 안에서 놈을 설득하기 위한 말들이 A에서부터 Z까지 쭈르륵 펼쳐졌다.


허나 그게 빛을 보는 일은 없었다.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놈이 고개를 끄덕여버렸으니까.


"알았어. 할게."

"괜찮겠어? 그래도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는게.."


결정이 빨라도 너무 빨라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괜찮아. 안 그래도 놓쳐버린 게 마음에 걸렸거든."

본인이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맡겨주는 수밖에.

'맘같아서는 내가 미끼짓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런 역할을 맡기에는 내 피지컬이 너무 좋았으니까.


세상 어느 납치범들이 나같은 놈을 납치하려 들겠는가?


그렇다고 앨리스한테 시키자니 그쪽은 특유의 분위기가 문제였다.

애가  앞에 있으면 푼수같아져서 그렇지 가만히   닫고 있으면 누가봐도  뒷골목 출신입니다라는 위험한 아우라를 풀풀 풍겨대는 게 바로 앨리스니까.

고로 미끼라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수행할  있는 건 주인공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 역할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재수없게 놈이 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도 끝이니까.

최대한 놈의 안전을 확보해놓고 미끼 작전에 시동을 걸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그러지 말고 네가 해."


"..네?"


"그럼 너 구하다가 다친 사람한테 시키려고? 인성에 문제있냐?"

앨리스의 개입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대타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선뜻 나선 주인공 놈하고는 다르게 본인은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다행히 대타의 피지컬은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이었다.


몸에 알알히 박힌 근육이 조금 흠이긴 했지만 저 정도야 품이 좀 넉넉한 옷을 골라서 입히면 얼마든지 커버 가능하니까.

주인공 놈하고 다르게 숨만 쉬고 있어도 온갖 어그로를 끌어당기는 종특이 없다는 게 살짝 아쉽긴 했지만..

'일단 얘로 한 번 써보고..'


안 통하면 그때가서 다시 생각해보면 될 터.


그렇게 결정하고서는 주황머리 년한테 갈굼을 시전하고 있는 앨리스의 옆으로 합류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앨리스에 이어 나까지 가세하니 안 그래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던 주황머리 년의 입에서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더라.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역시 그게 걱정되는 걸까.


하긴, 자칫 잘못하면 인질로 잡힐 수도 있으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런 주황머리의 우려를 불식시킨 것은..


쐐액-! 퍽-!


어느 순간 앨리스의 손에 사출된 그녀의 손바닥만한 비도였다.


대체 언제 꺼내서 언제 던진 걸까.

누군가로 하여금 보란듯이 벽에 푹 박힌 채로 부르르 몸을 떨어대는 비도 아래에는 자그마한 벌레 하나가 두동강난채 널브러져있었다.


그게  미래의 제 모습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주황머리의 목울대와 눈동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봤지? 혹시라도 인질로 잡히면 바로 구해줄게."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쩌겠는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하면 되잖아요. 하면."


어딘가 체념한듯한 한숨과 함께 주황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끼가  운명을 받아들이니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우선 미끼 작전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레아부터 찾아갔다.

파견기간동안 그녀가 우리들의 직속상사인만큼 뭘 하더라도 그녀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의 앞으로 나아가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운 작전을 설명하니..


"흠, 그래서? 내가  해주면 되는 거지?"

레아는 상당히 흥미로워했다.


뭘 해주면 되냐라.


말만하면 다 지원해주겠다는 걸까.

그렇지만 필요 없었다.

이런 일에 사람을 대량으로 동원해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까.

'뭣보다..'


치안대 내부에 그 인신매매 조직의 끄나풀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도 그럴 것이 국룰이잖아.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이 뒤가 구린 놈들하고 내통하는 건 말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레아한테도 계획에 대해 오픈하지 않는 편이 맞았지만..

'이 사람은 괜찮다고 그랬으니까.'


앨리스가 그렇다니까 믿어줘야지 뭐.


그래야 그녀도 날 믿어줄테니 말이다.

아무튼 계획에 대해 말했더니 필요한 게 있냐고 묻는 레아의 질문에 일단은 사양의 뜻을 밝혔다.

"나중에나 좀 도와주십시오."

"그렇다면야 뭐.."


그렇게 레아에게 보고까지 마쳤으니?

"아으.. 진짜.. 이거  해야돼요?"

주황머리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미끼대작전을 가동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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